시청률 수치로만 따진다면 여전히 지상파는 케이블과 위성TV를 압도한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의 ‘체감지수’는 좀 다르다. ‘지상파는 장르별로 날로 세분화, 전문화되고 있는 케이블·위성TV의 수십개 채널 가운데 하나의 선택지로 느껴질 뿐’이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케이블·위성TV가 지상파에 맞먹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특히 시간을 가장 알뜰하게 함축적으로, 뭐든 결론이 나게 쓴다는 지상파의 보이지 않는 원칙으로는 도저히 편성하기 힘든 프로그램들이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수많은 논점을 제공하고 있었다. 예컨대 케이블·위성TV 곳곳에 산재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괴이한 재미가 그렇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일본 드라마와 각종 외화 시리즈, 다큐멘터리, 성인 채널, 그리고 하나의 장르로 분류하기 애매한 ‘컬트 프로그램’들의 현주소를 살펴봤다.
올해로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손경수군. 지상파에서 운영하는 1시간 남짓의 어린이 시간대를 즐기기 위해 그가 들인 기회비용은 언제나 98% 부족했다. 하지만 2003년 11월, 80여개 채널을 보유한 위성방송에 가입한 뒤 그는 애니원TV와 디즈니채널 등을 보면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애니메이션을 즐긴다. 50대 주부 강금희씨는 드라마를 볼 때 외에는 지상파를 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지금, 고전영화 마니아가 돼 고전영화 채널만큼은 모조리 꿰고 있다. 잠이 안 오는 새벽녘 그를 지켜주는 것은 흑백화면 속에서 청춘 시절로 돌아간 김지미, 신영균, 황정순. 영화 두세편을 연달아 보느라 밤을 새는 일이 잦아진 점, 이것이 케이블에 가입한 뒤 가장 큰 변화라고.
40대 주부 김순자씨는 요즘 “푸드채널에서 방송하는 요리 프로그램 보는 재미에 산다”고 ‘고백’한다. 지상파에서 하는 주부 정보 프로그램은 너무 식상하다나. 케이블에 가입한 뒤부터 이들에게 지상파는 더이상 필요없었다. 이들의 이구동성, “지상파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너무 뻔하다”.
가장 재미있는 매체 그 이름은 케이블
굳이 이들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케이블과 위성의 위력이 증가하고 있음은 각종 자료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최근 한국광고주협회가 케이블TV 시청자 2천명을 대상으로 한 ‘케이블매체 수용자조사 보고서’는 우리의 허를 찌른다. 응답자의 32.9%가 케이블TV를 가장 재미있는 매체로 뽑았다. 지상파(23.4%)ㄴ는 무려 10% 가까운 차이로 뒤처졌다. 2위는 인터넷( 28.2%)이었다. 이를 시청자를 ‘가르치려’ 하는 현실감 없는 프로그램과 채널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 천편일률적인 오락 프로그램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 읽는다면 지나친 것일까.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사업지원2국 김진경 차장의 “만약 MBC와 SBS, KBS2의 콘텐츠가 미약하고 시청자들이 찾지 않는다면 케이블TV를 통해 이들 프로그램을 내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케이블이 지상파를 호령할 기미까지 보이는 것이다.
지난 2월 첫 방송을 시작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온스타일’의 콘텐츠 전략을 보면 케이블이 지닌 경쟁력의 ‘출처’를 엿볼 수 있다. 온스타일은 먼저 경쟁채널인 동아TV의 간판 프로그램이 패션쇼도, 뷰티 프로그램도 아닌 미국의 인기 시트콤 <프렌즈>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온스타일은 다른 여성채널들에 흔히 있는 패션이나 요리, 뷰티 프로그램의 편성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자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형식의 시트콤과 리얼리티 쇼 편성에 주력했다. 나머지 빈자리에는 드라마 시리즈와 스타 가십, 인테리어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이런 편성전략은 실로 대성공이었다. 온스타일 최고 인기 프로그램은 ‘예상대로’ 힐튼가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과 팝가수 라이오닐 리치의 딸 니콜 리치가 주인공인 리얼리티 시리즈 <심플 라이프>가 차지했다. 내용은 두 상류층 아가씨가 시골 마을에서 보내는 ‘시골 적응기’다. 채널 이탈 현상을 일으키는 유사 홈쇼핑 광고를 없애고, 최대한 많은 프로그램을 편성한 것도 유효했다. 그 때문에 온스타일은 개국 한달여 만에 안정을 찾고, 경쟁채널인 동아TV와 푸드채널을 바짝 뒤쫓을 수 있게 됐다(2004년 2월 말 스카이라이프 시청률 주간보고서, TNS Media Korea 조사).
좁고 깊게, 시청자들의 기호에 맞춘다
이제 프로그램이 아닌 방송사를 먼저 선택하던 시절은 변해, 훌륭한 콘텐츠가 채널 선택의 기준이 됐다. 케이블TV가 지상파TV 시청에 끼친 영향에 대한 조사결과는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응답자의 77%는 케이블TV로 인해 지상파TV를 시청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답했다. 이중 25%는 ‘매우 많이’ 줄었다고 답했다. 지상파TV 시청 시간이 늘었다고 응답한 이는 전체의 5%다.
80여개나 되는 채널의 편성표를 꼼꼼히 챙기며 그날 봐야 할 프로그램과 녹화해두어야 할 프로그램의 시간표를 짜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는 대중음악연구가 김형찬씨. 그는 3년째 스카이라이프를 보고 있지만, 지상파를 못 보는 게 그리 불편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좀더 많은 채널들을 위해 MBC와 SBS는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 “유행드라마는 시차를 얼마 두지 않고 드라마채널에서 재방송을 하고, 뉴스는 YTN이 있으니 큰 무리는 없다”고. 이라크전 당시 YTN은 지상파와 위성·케이블을 통틀어 최고의 시청률을 보였다는 사실은 김씨가 더이상 지상파의〈9시 뉴스>에 연연해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전문가들은 지상파와 케이블·위성간의 단순 시청률 비교가 무의미한 일이라고들 한다. 케이블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지상파와 달리 타깃이 아주 명확한 채널이어서 ‘대중에게 두루 인기가 높다’는 것이 오히려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시청률이 무작정 높은 것보다는 채널의 세분화만큼 시청자도 세분화되는 게 이롭다는 것이다. 이는 대학생 박혜정(서울여대 경제학과 4)씨의 말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케이블의 장점은 채널이 많은데도 각 채널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방송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드라마가 보고 싶을 땐 드라마채널을, 쇼·오락 프로그램이 보고 싶으면 코미디TV를 틀면 되니까요!”
2% 부족한 그러나 여전이 힘센 지상파
‘케이블매체 수용자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응답한 시청자의 68%가 케이블 가입 이유로 ‘다양한 채널’을, 20%가 ‘난시청 해소’를 들었다. 이는 지상파채널만으로는 점점 늘어나는 시청자의 욕구를 해결하기가 힘들다는 점을 역설하는 중요한 자료다(사실 케이블과 위성은 지상파가 안 나오는 난시청 지역민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시작하긴 했다. 하지만 난시청 지역이 줄어들고 있는 요즘은 좀더 다양한 콘텐츠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저 멀고도 먼 마라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음날 바다에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찍 잠들고, 일찍 아침을 맞는 이들에게 제일 필요한 TV란 날씨가 안 좋은 날의 한가한 낮 시간을 보낼 ‘오락도구’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시시각각 전해줄 ‘메신저’였다. 마라도에서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는 최종환씨는 “지상파를 제대로 볼 수 없어 (KBS라도 보려고) 위성방송을 신청했는데, 정작 TV를 볼 수 있는 시간에 지상파는 방송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는 현재 마라도 주민들이 세상을 보는 창구는 24시간 뉴스 채널 YTN이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채널은 스포츠채널과 홈쇼핑채널이라고 말했다. 그들에게도 지상파는 더이상 필요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지상파의 영향력이 아주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다. 아직도 시청자들은 지상파를 시청(111분)하는 데 인터넷(81분)이나 케이블TV(57분)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주로 획득하는 매체에 대한 조사에서도 지상파는 케이블TV보다 높게 나왔다. 인터넷이 40.9%를 보인 데 이어 지상파는 17.7%, 케이블TV는 14.8%를 기록했다(2003년 케이블매체 수용자조사 보고서).
이는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카이라이프 홈페이지(www.skylife.co.kr)에는 아직도 ‘지상파 재전송’을 원하는 글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위성방송을 보지 않은 이유로 ‘지상파 재전송’이 되지 않는다는 걸 꼽는 이들마저 있다. 하지만 얼마 전 도쿄에서 만난, CS위성방송(일본의 위성방송은 방송위성을 사용하는 BS와 통신위성을 사용하는 CS로 나뉘어져 있다) 스카이퍼팩TV 홍보팀의 요시히데 도는 한국의 지상파 중심적 방송환경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눈치다. 그는 “일본의 지상파는 지역 중심의 방송이라 드라마 등 몇몇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지역(현) 단위로 편성내용도 다르다”고 설명한다. 심지어 CM도 지역별로 다른 방송사도 있다고 한다. 지상파가 지역과 상관없이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방송되는 한국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이어 그는 “지역 중심의 정보 제공을 하는 지상파와 오락 기능을 주로 하는 위성과 케이블채널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를 지역적 특성이 많이 작용한 탓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미국 등 비교적 넓은 땅덩이를 가진 나라에서는 우리나라나 영국과 같은 좁은 나라가 가질 수 있는 지상파의 중앙집권이 힘들다는 것. 영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우리와 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런던 시티대 방송정책 석사과정에 있는 강주희씨는 여전히 “〈BBC>가 영국 최고의 방송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축구 중계의 잠재력을 예견해 중계권을 사들이고, 할리우드 거대 영화사들과 장기간 독점계약을 맺고 영화를 공급하는 등 질 높은 콘텐츠를 제공해 현재는 위성방송 〈BskyB>가 〈BBC>에 이어 두 번째로 영향력이 있는 방송사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국 역시 훌륭한 콘텐츠를 바탕으로 케이블과 위성이 지상파와의 경쟁에 불을 지피고 있다는 것이다.
지상파를 위협하는 당당한 경쟁채널
현재 TV시청이 가능한 1600만 가구 중 1200만이 케이블TV, 120만이 위성방송 가입자다. 전체 TV시청 가구의 3/4 이상을 차지하는 이들의 영향력은 숫자만 놓고 보더라도 분명 지상파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제 누구도 위성과 케이블을 지상파의 보조채널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의 강대인 교수가 <케이블TV> 2004년 2월호에서 주장한 “선도적 매체로 여전히 우월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지상파TV와 협력 내지는 경쟁의 범위를 어느 선에서 구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정책 방향을 마련할 때”라는 조언은 ‘탁상공론’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