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라, <블러디 선데이>
2004-06-1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열네명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던 ‘피의 일요일’. 잊혀졌던 진실이 삼십년 시간을 넘어 돌아왔다

1972년 1월30일 일요일 비무장 시위를 벌이던 북아일랜드 데리 시민 열세명이 영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열네명이 다쳤고, 그중 한명이 곧 죽어 사망자는 열넷이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날 벌어진 일 때문에 처벌받지 않았다. <블러디 선데이>는 ‘피의 일요일’이라고 기억되는 이날 진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기록하고 있는 영화다. ‘피의 일요일’ 꼭 30년 뒤인 2002년 1월25일 영국에서 개봉한 <블러디 선데이>는 마치 카메라를 가지고 시간을 거슬러올라간 것처럼 사실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이 영화는 단 한번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판단을 내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관객을 목격자로 만든다. 목격자는 자신이 본 사실에 어떤 식으로든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각본도 직접 쓴 감독 폴 그린그래스는 1만명 넘는 사람이 행진에 참가한 이 사건에서 네명을 골라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각각 두명을 선택해 중간에 서고자 했다. 영국군에 돌을 던졌다가 투옥된 적이 있는 17살 소년 제리와 시위를 조직한 아일랜드 하원의원 아이반 쿠퍼, 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경악하는 젊은 공수부대 병사, 원하지 않았지만 공수부대를 지휘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 육군 준장 패트릭 매클레란이 그들이다. <블러디 선데이>는 이들 중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면서 여자친구와 그날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하는 제리로부터 영화를 시작한다. 쿠퍼는 공수부대가 투입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위 경로를 바꾸겠다고 데리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 경찰과 합의한다. 그러나 시위대 일부가 처음 계획한 길을 고집하면서 투석전을 시작하고, 물대포와 최루탄이 발사되는 혼란의 와중에서, 두명의 아일랜드 시민이 실탄에 맞는다. 누가 처음 쏘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두발의 총알은 무기도 없고 죄도 없는 열네명 시민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린그래스는 “이 사건이 영국과 아일랜드 분쟁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고 믿고 있다. 사건 자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그 믿음은 <블러디 선데이>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영국군을 향한 증오와 시위가 주는 흥분으로 들뜬 소년들은 돌을 던지자고 외치고, 총격전 도중 한 아일랜드 남자는 권총을 쏘아대고, 쿠퍼는 병원에 도착해서야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거친 공수부대는 상황실에 머물러 있는 지도부의 통제를 일시적으로 벗어난다. 도대체 무엇이 이 비극을 만들었는가. <블러디 선데이>는 시위대와 상황실과 방벽 너머 공수부대를 오가면서 그저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때때로 격정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것은 윤색을 피하고 진실만을 취하고자 노력한 결과다. “왜 그랬지? 무장한 자는 보지도 못했어!”라고 무력하게 항의하던 젊은 병사는 얼마 뒤 표정을 감추고선 시위대가 먼저 총격을 시작했다고 진술한다. 영화 역시 그 병사처럼 무표정하지만, 진실이 묻히는 순간은 그자체로 분노가 될 수 있다. 그날, <블러디 선데이>의 카메라가 순식간에 스쳐간 것처럼, 총에 맞아 기어가던 소년이 또다시 총격을 받아 죽었고, 흰 손수건을 흔들며 부상자를 옮기려던 남자도 무방비 상태에서 희생됐다. <블러디 선데이>는 사건의 책임을 캐묻지는 않는다. 누가 잘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절망으로 하얗게 질린 쿠퍼가 말하는 것처럼 영국 정부는 그날 일 때문에 데리 지역 모든 젊은이들을 호전적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병사로 제공했던 것이다.

< 블러디 선데이>는 16mm 핸드헬드 카메라와 사건의 흐름에 밀접하게 따라붙는 편집으로 사실성을 얻어냈다. 예상하지 못한 총격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시작되고, 자칫 놓칠 수도 있어서, 그만큼 놀랍다. 멀리서 지켜보는 학살과 도주, 총격이 끝난 뒤의 거리 역시 뉴스 화면처럼 보는 이를 그 순간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피의 일요일’을 다시 겪는 것처럼 반응하는 아마추어 배우들이 없었다면 <블러디 선데이>는 지금처럼 놀라운 호소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복도에 방치된 시체들 앞에서 망연해진 기자들과 눈앞에 보이는 모든 이를 테러범으로 취급하는 사나운 병사들은 상황 설명 없는 이 영화를 현실의 한 토막처럼 실어나른다. 병원 로비에 모인 시위 참가자 가족들의 통곡은 놀라울 정도다. 아들을 찾고, 딸의 안부를 묻고, 시신 앞에 주저앉아 통곡을 터뜨리는 이들 사이에는 30년 전 가족과 친구를 잃은 중년 시민들이 있었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시간을 넘어 되살아왔고, 몇권의 저서와 청문회 요청이 있었던 90년대까지 잊혀졌던 희생자들에게, 받아 마땅한 자리를 돌려주었다. 결국 여자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죽은 제리 역의 데클란 더디도 최초의 희생자였던 재키 더디의 조카였다.

그린그래스는 1972년 열일곱살의 런던 소년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있지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고 그 무렵을 회상했다. 10년이 지난 1982년 그린그래스는 ‘피의 일요일’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 IRA에 가입했고 감옥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던 레이먼드 매카트니를 만나 그 사건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 30년 전 작은 땅 아일랜드에서 죽은, 십대 소년이 대부분이었던 열네명은 몇몇 이들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린그래스는 그 죽음이 남긴 여진이 아직도 아일랜드 영토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 질문과 의미를 걷어낸 <블러디 선데이>가 그럼에도 의문형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 피의 일요일

뿌리깊은 분쟁이 일으킨 비극

아일랜드와 영국의 분쟁은 뿌리 깊다. 1653년 아일랜드는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고, 1798년에는 자치를 요구하는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그뒤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일부 독립을 얻어냈지만 북아일랜드 여섯개 주는 영국 식민지로 남았다.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은 그 북아일랜드 지역에서 벌어진 불화의 결과다. 영국국교회를 신봉하는 영국은 북아일랜드 내 신교도를 지지했고,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의 차별과 반목은 더욱 뿌리 깊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블러디 선데이>에서 아이반 쿠퍼가 말하는 것처럼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의 사랑은 금기로 여겨질 정도였다. 1960년대 접어들면서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저항을 신봉하는 북아일랜드 민권협회(NICRA)가 활동을 시작했지만, 호전적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역시 위축되었던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영국은 이에 맞서 북아일랜드에 정규군을 파병했고, 1972년이 시작되자 자치권을 완전히 몰수하기에 이르렀다. 1972년 1월30일에 있었던 시위는 시민권을 돌려주고 반(反)구교도 정책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평화로운 행진이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데리시 보그사이드 지역 내에서 비무장 시민 13명을 사살했다. 이 사건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분쟁에 전환점이 되었다. 이날 이후 데리와 벨파스트 지역 구교도 노동계급은 비교적 약세였던 IRA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시작했고 그 세력을 키워주었던 것이다. 공식적으로 묻혀졌던 ‘피의 일요일’은 1998년 당시 재판결과에 반발하는 청문회가 열리면서 다시 역사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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