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두둥! 신작 프로젝트 5인 5색 [1] -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
2004-08-18
글 : 김혜리
사진 : 이혜정

한해에 쏟아지는 한국 영화는 대략 60∼70편. 시사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부지런을 떨었다 치더라도 조금 지나면 제목조차 가물가물한 영화들이 적지 않다. 하물며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름까지 줄줄줄 머리에서 불러내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여기 다섯 감독들은 조금 별난 위치를 갖고 있다. 1∼2편의 영화만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세간에 각인시켰고, 이후에도 차기작이 과연 뭘까, 충무로 안팎의 관심을 독차지해왔기 떄문이다. <해피엔드>의 정지우를 시작으로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품행제로>의 조근식, <번지점프를 하다>의 김대승, 그리고 <라이터를 켜라> <불어라 봄바람>의 장항준까지, 세간의 주목과 기대가 어쩌면 이들의 행보를 더더욱 조심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새로운 돛을 단 배가 진수됐고, 이제 목적지에 닿기까지 숨가쁜 여정을 계속해야만 할 다섯 선장의 포부를 미리 들었다. /편집자

사랑도 일정한 유형이 있다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

“그동안 영화랑 샅바싸움했어요… 논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아요.”

묻지 않아도 정지우 감독은 뻔한 첫 질문의 답을 들려주었다. 아무리 전작 제목이 ‘해피엔드’였다지만, 5년의 중간 휴식은 너무 길었다. 더구나 첫 장편을 성공시킨 젊은 감독에겐. 세기말 치정극 <해피엔드>,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동안 정지우 감독은 영화 경력의 요람이었던 청년필름을 떠나 처음으로 “우리”가 아닌 “나”라는 주어로 영화를 고민하게 됐다. 2000년 가을부터 2년 반 동안 <두 사람이다>와 씨름했다. 그리고 지난해 초여름 고이 접어 ‘보류용’ 서랍에 넣었다. 예산, 캐스팅 그 밖의 것들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해질녘 그림자처럼 늘어지는데 스탭들을 마냥 붙잡아둘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약속을 명백히 하지 않은 채,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것도 싫었다. “열망이 통하지 않은 것은 결국 감독이 미숙한 탓”이라고 반성했다는 정지우 감독은 큰 공부를 했다고 여겼다. “만날 공부만 할 테냐. 도대체 ‘시험’은 언제 칠 거냐?”는 주변의 힐문(?)도 있었지만, 정말이지 시나리오는 당분간 쓰기 싫었다.

실마리 - ‘씩씩한 열정’의 여인에 매혹

첫사랑에 관한 그 시나리오는 꼭 초코파이 광고 같았다. 지독하게 단순하고 상투성덩어리였다. 수식이 없었고 영화적 장치가 없었고 거짓말이 없었다. 그리고 진심이 있었다. 2003년의 더딘 여름날,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에 낙선한 공미정 작가의 <같은 자세>를 우연히 만난 정지우 감독은 그 위에 <사랑니>를 덧쓰기 시작했다. 열일곱살 시절 첫사랑의 도플갱어를 만나 뿌리까지 흔들리는 주인공은 서른살 여자. 그렇게 정지우 감독은 또 한번- <생강> <해피엔드>, 미완의 <두 사람이다>에 이어- 여자 이야기에 말려들었다. 추문의 매연 속으로, 자신의 직관을 따라 똑바로 걸어들어가는 아름답고 씩씩하고 충동적인 여자. <사랑니>의 조인영은 정지우 감독이 어김없이 매혹당하는 여인의 초상과 닮았다. <해피엔드>에서 죽어간 최보라의 좀더 쿨한 여동생이라면 적당할까 물었더니 그럴 법도 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개도 - 배우 물색 중, 가을께 촬영 시작

에릭 로메르의 도덕 희극, 아녜스 바르다 영화를 불가피하게 상기시키는 <사랑니>에 정지우 감독과 스탭들이 익살스럽게 붙인 부제는 ‘과자 부스러기처럼 나를 따르는 남자들’, 혹은 ‘복 많은 여자’다(첫사랑의 현신과 동거남, 괜찮은 남자로 자란 진짜 첫사랑까지 인영을 둘러싼 남자들은 무려 셋이다). 쓸쓸하고 부조리한 도시생활에 죽지 못해 사는 권태를 느낀다… 거나 하는 것은 여주인공 인영과 무관하다. 규칙적으로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인영의 일상은 다만 특별하지 않을 뿐이다. 뭔가 꼭 모자라거나 넘쳐야 사람이 사랑에 미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자신의 충동, 직관, 기분을 잃지 않고 사는 인간이 내겐 매력있다”는 정지우 감독의 생각대로 <사랑니>는 쉬운 짐작과 달리 사춘기 시절 충격에 대한 멜로드라마도, 성장영화도 아니다. 인물이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크게 변하지도 성숙하지도 않는다. “경험으로 인간이 개선되면 얼마나 좋으랴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감독의 판단.

굳이 이름짓자면 <사랑니>는 발전보다 발견에 관한 영화에 가깝다. “남자나 여자나 이성에게 끌리는 형태는 일정한 유형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한 남자/여자들은 어딘가 닮았다고 깨달을 때가 있다. 하다못해 돈많은 이성에게 반복해서 매료되는 경우도 그렇다.” 정지우 감독의 지적이 예고하는 영화 <사랑니>는 우리의 인생과 연애에 잠복한 일정한 패턴에 관한 짧은 고찰이다.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부터 정지우 감독과 친분이 있는 김은영 프로듀서의 키플러스가 제작하고 시네마서비스가 투자하는 <사랑니>는 가을 나뭇잎이 다 지기 전에 촬영을 시작한다는 목표로 현재 배우를 물색 중이다.

승부처 - 현재 사랑과 옛사랑의 수레바퀴

인터뷰가 있던 오후, 정지우 감독의 노트북 컴퓨터 옆에는 로버트 드 니로가 말론 브랜도의 청년기를 연기하는 <대부2>의 DVD가 놓여 있었다. “과거로 들어가고 나오는 방식이 지금 보아도 무척 모던하다”고 새삼 감탄하는 정지우 감독에게도 이제 시간의 지층을 영화적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는 당면 과제다. <사랑니>에서 인영과 석의 현재 사랑은, 과거의 사랑과 나란하게 공평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지우 감독은 기억과 시간의 궤를 특별하게 잇는 ‘플래시백’을 상상하고 있다. 과거의 괄호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풀릴 것이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사랑니>가 제일 먼저 넘어야 할 승부의 고비는 캐스팅이다. 눈 맑고 씩씩한 서른살 인영과 열일곱살 이석을 찾는 것은 1단계일 뿐이다. 앞서 말한 사랑의 유형을 떠올린다면 가늠할 수 있겠지만, 남자끼리 여자끼리 외양과 성격의 친연관계가 성립해야 하고 다시 남자와 여자가 호감과 애정의 모티브로 연결되어 관객을 설득시켜야 하니, 태양과 달과 지구가 한줄로 서는 것보다 조금 쉬운 과제일 터다. 하지만 어디 이뿐이랴. “영화는 쉼없이 방향을 찾고 새롭게 만들어진다”고 느끼는 정지우 감독은 <사랑니>에서도 시시각각 새 승부처를 찾아낼 것이다.

시놉시스 - 고액 과외교습소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서른 살의 인영은 새로운 교습생으로 들어온 열일곱살 소년 이석을 보는 순간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한다. 열일곱 시절 첫사랑과 이름도 모습도 똑같은, 맑고 당돌한 소년 이석으로 인해 인영의 세계는 심각하게 흔들린다. 소년도 인영에 대한 끌림을 감추지 않는다. 인영과 고교시절부터 사귄 남자친구로서 현재의 룸메이트인 정우도, 동료 과외 교사도 추문을 부를 것이 뻔한 인영의 연애를 만류하지만 소용없다. 인영과 함께 석을 대면한 정우는, 첫사랑에 대한 인영의 기억을 반박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슬픈 표정의 한 여고생이 석이를 찾아오고, 정우는 서른살이 된 인영의 진짜 첫사랑 이석을 데리고 나타난다.

한마디 - 인생에 한번쯤 해야 할 숙제 같다(제작자 키플러스 김은영 대표)

“감독도 나도 생각했다. 우리가 미래에 어떤 영화를 다시 같이 한다 해도 사랑니나 첫사랑을 다루는 영화를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사랑니>는 그렇게 인생에 한번쯤 해야 할 숙제 같은 프로젝트다. 정지우 감독은 ‘씩씩한 열정’에 관한 영화로, 나는 ‘용감한 사랑’에 관한 영화로 정리하고 있다. 감독과 동의하기를, 첫사랑이라는 충분히 멜로적이고 진부한, 그래서 수백년 동안 사라지지 않은 소재로 ‘현대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세대의 감성, 가치관을 지니고 있으면서 현대 영화의 형식을 누구보다 깊이 공부하고 고민하는 정지우 감독의 면모와 맞을 것이다.”

참조 -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와타야 리사 지음/ 황매 펴냄)

젤리처럼 뭉쳐서 규명되지 않는 감정선

“영감을 준 책도 참고가 된 책도 아니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나서 우연히 읽었으니까. 그런데 두고두고 자꾸 생각이 난다. 19살 작가가 썼다는데, 젤리처럼 뭉쳐서 규명되지 않는 복합적인 감정 상태를 있는 그대로 계속 밀고 나가는 문체가 내가 상상하는 <사랑니>의 정서와 비슷했다. 최근 고전적 이야기를 관철시키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감정적으로 단순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좋다, 싫다, 기쁘다로 일축하기에는 사람들의 감정이 너무 복잡한 것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