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행제로> 끝내고 1년 정도 빈둥거렸더니 노는 게 지겹고 돈도 떨어지더라. 게다가 영화 잘 봤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30대 마초 아저씨들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사랑 이야길 쓰자. 그러면 우아하고 교양 있는 여성 팬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웃음) 현실적인(?) 이유로 차기작 구상에 시동을 건 뒤, 조근식 감독은 한동안 제작사인 KM컬쳐에 “멜로영화를 쓰고 있다”고만 통보했다. 제목조차 불문에 붙였다. 지금 와서 털어놓지만 당시 그가 쓰던 시나리오의 제목은 <천재소년과 척척박사>. <품행제로>의 원제였던 <명랑만화와 권법소년>처럼, 제작사가 들으면 ‘뜨악’할 이름을 가진 “서늘한 느낌의 러브스토리”였다고 그는 전한다. 그렇다면 연내에 제작에 들어간다고 알려진 조 감독의 신작 멜로영화가 바로 이 작품?
실마리 - 따뜻한 온기+칙칙한 감수성
비밀리에 <천재소년과 척척박사>의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하던 도중 그는 <여름 이야기>를 봤다. 장항준 감독의 부인인 김은희 작가가 쓴 멜로 시나리오였는데, 무엇보다 캐릭터가 귀엽고 따뜻했다. “시나리오 속 정인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맑고 강한 여자의 느낌을 지녔다. 자연의 아이라고 해도 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런 캐릭터를 보는 순간 내가 가진 시니컬함을 이 작품이 녹여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여름 이야기>는 방송국 작가로 일하는 수진이 대학 시절 자신이 흠모했던 노교수 윤석영의 첫사랑인 정인을 찾아나선다는 스토리. 조 감독은 따뜻한 온기를 품은 캐릭터와 자신의 ‘칙칙한 감수성’이 더해진다면 이야기의 균형이 맞을 것 같았다. “이런 경우를 날로 먹는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주위의 모니터 반응은 “글쎄, 될까?” 하는 갸우뚱이었다. 그저 말랑말랑한 러브스토리는 아니었기 때문. 조 감독의 청개구리 심보는 그때부터 발동됐다. “다들 오케이했으면 때려치웠을 텐데, 다들 고개를 흔드는 걸 보니 욕심이 났다”는 그는 그때부터 작가와 번갈아 쓰기 시작하며 개작에 들어갔다.
전개도 - ‘낑겨 있는’ 사람들의 속앓이 듣기
“작업한 지 7, 8개월 정도 됐는데 지금은 늪에 빠진 느낌이다.” 처음에는 석영과 정인이 만났던 1970년대 초반으로 이야기를 끌고 들어가는 것이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해보니까 장난이 아니었다. “장선우 감독님에게도 어떻게 풀었으면 좋겠느냐고 했더니 나보고 그 칙칙한 시대에 무슨 재미난 게 있었겠느냐고 하시더라.” 하긴, 아침에 만나면 서로들 “재건합시다” 하고 인사를 나누던 삭막한 시절에 무슨 유희나 낭만이 있었을까. 그렇다 해도 상상력으로 채운 동화 같은 시공간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우회하지 말고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해버릴까, 싶은 맘이 들기도 했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뒤늦게 읽은 것이 아마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러고선 여지없이 오그라들었다.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 김일성의 사망을 직접 겪은 그 사람의 경험의 깊이를 맛보면서 정면 승부는 내 자신을 과하게 넘어서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꿀꿀한 시대, 저항하기에는 용기가 없고 순응하자니 엿 같은 세상이고, 자신을 포함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낑겨 있는’ 사람들의 속앓이를 다뤄보자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고, 그는 같은 부류지만 30여년 전에는 시니컬 대신 굳건한 믿음과 착한 심성으로 세상을 대하며 자신을 가꿔나갔던 인물들이 문득 그리워졌다.
“머리로 사는 사람은 가슴으로 사는 사람을 보면 두려움과 매력을 느낀다. 석영이 정인에게서 느꼈던 사랑의 감정도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석영은 조 감독을, 아니 ‘시니컬함을 자신의 존재 보호장치로 여기는’ 지금 세상 사람들을 닮았다.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시니컬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지금이 30년 전보다 더 엄혹한 시대가 아닌가 하는.”
승부처 - 담백하되 정갈하고 깊이있게
조근식 감독이 넘고 싶은 바(bar)는 다른 감독들이 만든 멜로영화가 아니라 자신의 데뷔작 <품행제로>다. “열심히 해서 미련이 더 남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내가 얼마나 가득 차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서 액션에 코미디에 게다가 시대까지 거슬러오르고 마지막에 잘랐지만 애니메이션까지 넣었다. 오만 가지 것을 뒤섞었더니 거칠어졌고 도전적인 생명력을 덤으로 얻었지만 이번엔 좀 심플해지고 싶다.” 평소 본성인 산만 충동으로 인해 괴롭긴 하지만 이번에는 ‘담백하되 정갈하고 깊이가 있는 영화’를 만들고픈 소망이 있다. “어지럽게 요리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하나만 주고서 대신 씹었을 때 깊은 맛이 우러났으면 한다”는 그는 아직 승부처를 정하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현재로선 내 시니컬함과 애초 시나리오가 갖고 있었던 따뜻함, 이 두 가지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어떤 것이 최종적으로 압도할지는 모르지만 계속 부딪치게 하고 싶다. 이 아이템을 접지 않고 계속 밀고나가는 것도 오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결과가 어떤 스파크를 만들어내고, 어떤 무늬를 그려낼지 내 자신이 궁금해서다.” 힘겨루기가 결판이 나는 가을이면, <여름 이야기>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설 준비를 할 것이다.
시놉시스 -〈TV는 사랑을 싣고> 작가인 수진은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얼떨결에 특집 방송 게스트 섭외를 책임지겠다고 나선다. 곧바로 은사이자 평생 학자로 외길을 걸어온 명망 있는 윤석영 교수를 프로그램에 섭외하기 위해 나선 수진. 그러나 다짜고짜 윤 교수를 찾아가 만취 끝에 주사를 부리는 만행만 저지른다. 하지만 엄격하기로 유명한 윤 교수는 제자 수진에게 “평생 잊지 못할 여인이 있다”며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바로 그 사람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윤 교수가 대학 시절 농촌봉사활동에서 만난 서정인이라는 여자를 찾기 위해 수내리로 내려간 수진과 김 피디. 마을 사람들은 정인이 빨갱이로 내몰린 삼촌 때문에 집이 풍비박산이 된 뒤 어떤 남자와 마을을 떴다는 소식만을 반복해서 전해줄 뿐이다. 수진 일행은 낙심하지만 특집 방송을 망칠 순 없는 일. 수진 일행은 취재 끝에 윤 교수와 그의 대학 친구들이 농활을 내려왔던 당시의 이야기를 하나둘 듣게 된다.
한마디 - 엄마, 아빠도 사랑을 했구나(시나리오 작가 김은희)
“젊은 날의 아름다웠던 사랑 이야기를 써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엄마, 아빠의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분들도 사랑을 했구나 하는. 무엇보다 60년대나 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이들에게선 격동의 세대를 지나쳐왔는데도 휘말리지 않고 살아냈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고, 그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청춘이나 사랑이 지금의 그것보다 더 아름답게 여겨졌다. 감독님과 같이 작업한 뒤엔 한 남자의 회고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회고 같은 느낌이 더해졌다. 평면적이었던 석영의 캐릭터가 바뀌어서 이제는 한 인간이 살아온 이야기를 잔잔히 듣는다는 느낌이다. 과거에 그렇게 살았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고, 또 그래서 이렇게 죽게 되는 인간의 이야기 꼴이 됐다. 현재는 전체적인 드라마를 자연스럽게 잇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줌마여서 그런가. 석영의 젊은 시절 배우는 요즘 상종가인 강동원이 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참조 - 럭 델러헤이(Luc Delahaye) - 보스니아의 아미치(1993)
폐허 같은 삶일지라도, 꿈을 꿀 수 있는가얼마 전 매그넘 그룹의 사진전에 들렀다 조근식 감독이 건진 이미지.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꽃으로 그득하지만, 정작 바라보는 내부는 총탄 자국으로 벌집이 되어 있다. 이 사진에서 그는 “폐허 같은 삶일지라도 미래를 내다보고, 꿈을 꿀 수 있는가” 하는 극중 인물들의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었다. 조 감독이 또 하나 꼽은 건 강렬한 햇살의 해변에서 두 남녀가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는 사진. 이들은 세상에 자신들만 존재하는 것 같은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육체는 하늘을 나는 커다란 비행기의 그림자에 포박당해 있는 장면이었다. 석영과 정인이 나누었던 과거의 사랑도 그러했을지 모른다. 외로운 존재들이 부벼 만든 신열은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로 인해 더더욱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