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가 개봉됐을 때, 정재은 감독은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인 성장영화를 만든 여성감독"이었다. 정리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언론의 속성이라지만, 영화를 만드는 감독을 타고난 성(性)으로 구분짓고, 한 영화를 그저 ’성장’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단정짓는 단순함은 그에게 있어 사실 지루한 것이었다. <고양이…> 이후 2년 반. 정재은 감독은 약간의 휴식을 취했고, <여섯개의 시선>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그남자의 사정>을 연출했다. 우연히 관심을 가지게 된 소재를 가지고 시작한 그의 두번째 장편이 구체적 제작공정에 들어선 것은 지난 6월.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트에 미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의 이야기인 <태풍태양>의 크랭크인은 이제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번에도 정감독은 처음으로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사실 그가 만든 단편영화 중에는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도 많다), 그리고 또다시 성장영화를 찍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따지고 보면 거의 모든 영화에서 인물들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재미없는 질문들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영화를 만드는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정재은 감독이 영화를 완성하는 것은 앞으로 반 년 뒤. <태풍태양>은 아마도 이런 지루한 물음에 쉽게 답을 주지 않는 영화가 될 것 같다.
실마리 - 사람과 스케이트 사이의 밀착감과 속도감
<태풍태양>이 만들어지게 된 시작지점에는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트가 있다. 이는 공격형 스케이트 혹은 격렬한 스케이트를 의미하는데, 공중에서 회전하거나 계단 손잡이를 타고 내려오는 등 과격한 동작을 시도하는 인라인 스케이트의 일종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작업이 진행 중이던 무렵 정 감독은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다. 관광명소나 박물관보다는 거리문화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팅을 즐기는 일군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사람과 스케이트 사이의 밀착감과 속도감”에 매혹됐고, <고양이…>가 끝난 직후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정감독은, 이후 작품이 격렬한 스포츠를 즐기는 20대 남성들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밝힌 바 있다.
한편 정 감독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연출부를 할 때 잠실의 창동여고 근처를 지나다니면서 받았던 느낌은 영화의 주된 공간을 결정한 계기가 됐다. “88년 서울올림픽 때, 최첨단을 자랑하는 공간이었던 잠실이 1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는, 나무들이 웃자란 변두리 주거공간이 됐다는 것이 묘했다. 사회와는 무관하게 자기네들끼리 성장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사는 곳으로 잠실이 적당할 것 같았고, 그곳은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팅 1세대들이 스케이팅을 시작한 장소이기도 하다.”
전개도 - 김강우, 천정명, 이천희 등과 리딩 진행
<고양이를 부탁해>가 위태롭지만 도도하게 세상을 건너는 스무살 여자아이들의 여행기였다면, <태풍태양>은 거침없는 당당함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이뤄가는 20대 소년들의 도전기다. 소녀들의 힘겨운 세상을 보듬던 정재은 감독의 시선은 이제, 어그레시브 인라인을 즐기는 아이들의 몸에 즐비한 크고작은 상처들을 쓰다듬어줄 참이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것이어서,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역사와도 같은 그 상처”는 감독에게 실제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었다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여러명이다. 소요, 모기, 갑바라는 특이한 이름 또는 닉네임을 가진 한 무리의 구성원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전작에서 다중시점을 통해 아이들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던 내러티브는, 이제 “소요의 1인칭으로 진행되고, 주된 갈등은 ‘스케이팅을 좋아하는 방법’을 둘러싼 것”이라고 정 감독은 설명한다. 이를테면 강렬한 카리스마로 무리를 압도하는 모기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스케이팅만을 추구한다면, 처음에는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소요는 마지막까지 어그레시브 인라인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통해 자신의 애정을 보여주는 식이다.
영화는 6월부터 본격적으로 준비작업에 돌입했고, 6월 말에는 공개오디션과 기타 캐스팅작업을 통해 이천희, 천정명, 김강우 등 주요 배역을 결정했다. 현재는 헌팅작업과 배우들의 리딩을 진행하고 있다. 더위가 가시는 8월 말 크랭크인하여 내년 2월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계속하여 어그레시브 인라인 동호회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각종 대회에 팬클럽 자격으로 참여했던 정재은 감독의 스케이팅 실력. 그냥 인라인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 나이에 어디 부러지면 붙지도 않는다”는 동호회 친구들의 사려 깊은(?) 만류 때문에 어그레시브 인라인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승부처 - 요즘 녀석들의 쿨한 모습
정재은 감독의 승부처는 배우들, 그리고 그 배우들이 표현할 ‘멋진’ 인물들이다. “근래 영화 속에서 줄곧 조폭 의상이나 군복만 입고 나왔던 싱싱한 남자배우들에게 멋진 옷을 입혀주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영화 속에서 보여질 젊은 남자 캐릭터는 여태까지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보았던 그 나이 또래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일 것이다. 스타급 배우들의 캐스팅을 자제하고 대규모 공개오디션을 통해 새로운 얼굴을 찾아내려했던 그의 노력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실미도> 등에 출연했던 김강우(모기),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 등으로 얼굴이 알려진 천정명(소요)과 같은 배우들도 일단 캐스팅이 된 이상, “이전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은 그의 또 다른 포부이기도 하다.
시놉시스 - 평범하고 내성적인 고등학생 소요는 공원 한가운데서 몰려다니며 스케이트를 타는 그룹, 그중에서도 유달리 화려한 묘기를 선보이는 모기에게 매료된다. 결국 소요는 그 무리에 합류하고, 집을 떠나버린 부모님의 자리는 스케이팅이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세계대회를 위한 비행기표를 위해 원치 않은 CF를 하려던 모기는 고의적 사고를 내고, 스케이팅을 그만둔다. 이해할 수 없는 모기의 행동에 목표를 잃고 방황하던 소요. 하지만 우연히 거리를 자유롭게 스케이팅하는 한 무리들을 맞닥뜨린 뒤, 소요는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스케이팅임을 깨닫고 다시 세계대회로 발돋움한다. 세계대회의 인파 사이에서 그는, 얼핏 모기인 듯한 사람과 눈빛을 마주친다.
한마디 - “거칠기보단 역동적이고 유연하게” (촬영감독 김병서 <…ing>, <여섯개의 시선> 중 <그 남자의 사정>)
“일단은 촬영자로서도 상당히 탐나는, 그동안 영화 속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비주얼을 선보일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어그레시브 인라인에 대한 막연한 고정관념을 깬다는 점이었다. 어그레시브 인라인을 즐기는 친구들은, 겉보기에는 위험하고 공격적이지만 오히려 남들보다 성숙한 이들이다. 아직까지는 헌팅, 콘티 작업이 진행 중이라 확실히 정해진 것은 없지만, 도시 안에서 스케이터들이 주행하는 모습을, 거친 것보다는 역동적이고 유연한 느낌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다수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라서, 각각의 인물들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고 성장해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고민되는 지점이다. 수평공간을 좀더 활용하려는 취지에서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사용할 것이고, 이를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가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이자 탐험의 공간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싶다.”
참조 - 서울 도심은 놀이터이자 탐험장
극한의 상황에 도전하여 성취감을 얻는 것은 익스트림 스포츠만의 매력이다. 따라서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트의 참맛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스케이트 파크가 아니라, 난간이나 계단 손잡이 등을 이용할 때 알 수 있다고.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일상적인 도심의 공간이 밤만 되면 어그레시브 인라인을 즐기는 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실제로 텅 빈 건물에서 경비를 피해 스케이팅을 시도하는 이들의 에피소드는 시나리오에도 반영돼 있다. 속도가 관건인 이들의 스케이팅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여주기 위해 고민 중이라는 정 감독. 공간의 미장센에 집중하면서 인천의 뒷골목을 꼼꼼히 훑었던 카메라가, 이번에는 극한의 속도를 즐기는 스케이터들과 함께 흘러가는 풍경을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귀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