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세계를 도발하는 여자 사드, 카트린 브레이야
2004-09-01
글 : 심영섭 (평론가)
전략적인 노출증 : 여성의 질을 똑바로 좀 보란 말이야

그리하여 카트린 브레이야는 이 모든 폭력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노출증을 선택한다. 남성적인 시선이 여성의 육체를 재단하는 사회, 관음증이 판치는 이 사회에 맞서는 방식으로 전략적인 노출증을 선택한다. 시선의 은폐를 거부한다. 좀 봐라. 두렵지. 싫지. 거북하지. 메스껍지. 황홀하지. 예쁘지. 징그럽지. 그 무엇이라도 고개를 돌리지 말고 봐라. 그녀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좀 봐라. 여성의 질을 봐라. 그 수많은 편견과 두려움과 환상의 두께로 뒤덮였을 그 장소를 그저 좀 보라는 것뿐이다. 이 점은 그녀에게 평생 두 가지의 업보를 끌고 다니게 했다. 검열과의 끊임없는 투쟁, 오시마 나기사나 파졸리니나 파스빈더가 이미 다 해버렸다는 남성평론가들의 비판. 때론 포르노그라피처럼 보이는 그녀의 과격한 영화화법에 대해 평론가들은 그녀를 ‘프랑스의 여자 사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반대로 베르톨루치 같은 감독은 그녀의 광팬이 되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무세트라는 단역으로 출연시키기까지 했다(무세트란 이름이 브레송의 오마주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녀의 화법은 늘 어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팻 걸>에서 25분간 이어지는 엘레나와 이탈리아 청년 페르난도의 처녀막을 둘러싼 설왕설래는 틀림없이 남성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그렇게 하라고 죽을 힘을 다해 25분이나 끈 신이니까. 브레이야는 일부러 이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었다. 현실을 담는 일종의 창으로 여겨지는 롱테이크가 남과 여의 섹스신에 전례없이 사용되었을 때, <팻 걸>의 이 장면은 참으로 네오리얼리즘 섹스라 불릴 만한 사실적인 터치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청소년 섹스코미디나 여름 로맨스를 다룬 숱한 할리우드영화들의 클리셰를 깨부수고, 남성감독들의 몽타주에 의해 조각조각 나버리는 여성의 육체를 꿰매어 하나의 통일된 육신으로 온전히 스크린에 되돌려준다. 무엇보다도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는 시선은 엘레나의 여동생 아나이스의 그것이다. 남자는 스크린 밖에서 헉헉대지만 카메라는 아나이스를 바라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남성관객은 여성관객이 근 100년 동안이나 지긋지긋하게 해온 경험을 아니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남성관객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뚱뚱하고 남성의 환상이 제거된 육체를 지닌 아나이스와 시선을 겹치고 그녀와 강제 동일시를 하든지, 그 모든 지켜보기를 멈추고 이 장면에서 빠져나와 훔쳐보기의 쾌락을 저버리든지. 이 장면은 롱테이크로 찍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성관객에게 훔쳐보기의 쾌락을 저버리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어 있다. 그들이 객관적으로 이 정사신을 쳐다보는 동안, 감독은 대체 사랑이란 이름으로 꾸며놓은 에로티시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준다. 한마디로 카트린 브레이야의 의도된 노출증은 남성에게 휴지 한통 써가며 마스터베이션하라고 만들어놓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브레이야의 자매들이여, 살고, 사랑하고, 실수해라

68혁명 당시, 17살의 브레이야가 처음 쓴 소설 <쉬운 남자>는 아이러니하게도 18살 미만은 구입금지당하는 판정을 받는다. 자신이 쓴 쉬운(?) 소설을 읽을 수 없게 된 소녀는 그뒤로 수십년간 검열과 싸워야 했다. 그 검열에 대한 결정적인 화답, 여성감독으로서의 희로애락과 자신의 심경을 모두 고백한 <섹스 이즈 코미디>는 감독의 자의식으로 충만한 자기 반영성이 흘러넘치는 유머러스한 수작이다. 가짜 플라스틱 성기를 매달고 촬영장 안을 어슬렁거리는 남자주인공을 보고 브레이야의 분신 같은 잔느는 이렇게 말한다. “가짜는 예술이고 진짜는 외설인가?” 그것은 곧 카트린 브레이야의 모든 영화를 사적 영화라는 프랑스영화의 전통 안에서도 영화라는 매체를 탐구하는 자기 반영성과 성적 정체성, 그리고 개인적인 사담이 함께 어우러지는 독특한 지점으로 몰아간다. <로망스>에서 <지옥의 체험>까지 유난히 신체가 노출 가능한 여름이라는 계절을 즐겨 배경으로 삼고(심지어 겨울에도 여름신을 찍을 정도로), 늘 광대한 여성성의 상징으로 바다가 나오는 브레이야의 영화에서, 또 하나의 단골손님이 바로 여성과 남성의 체위에 관한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이다. 브레이야의 여주인공들은 남성과 첫 관계를 가질 때 예외없는 후체위로, 인간적인 대면관계가 사라진 섹스를 한다. 브레이야의 영화세계에게서 사랑을 성의 정치학, 권력과 폭력의 문제로 뒤바꿈하게 되는 상징은 등 뒤로 통한다. 그러나 이후 남성들은 복수를 당하는 듯 여성주인공에 의해서 압도당하게 되어 있다. <지옥의 체험>에서 게이로서, 여성들에게 면역이 있는 게 다행이라 여겼던 남자는 이윽고 여자에게 받은 돈을 뒤로 하고 여자 뒤를 홀린 듯 쫓아나간다. <로망스>에서 동거하되 섹스는 못하겠다는 남자를 여자는 가스불로 날려버리고, 자신의 아이와 새 삶을 시작한다.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특징 말고도 <섹스 이즈 코미디>는 카트린 브레이야가 종종 보여주었던 역전된 남녀 관계라는 특징을 집약해놓고 있다.

여기서 남자이자 배우인 이 청년은 <팻 걸>의 이탈리아 청년처럼 우스꽝스럽고 자기 도취적이고 예언 가능한 행동을 계속한다. 이 친구는 전형적인 브레이야의 남자주인공이다. 저런 머저리와 함께 연기하지 못하겠다고 툴툴대는 여배우를 달래며 감독인 잔느는 그를 바보라고 부른다(바보, 남자를 지칭하는 이 단어가 빠진 브레이야의 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 남자를 움직이는 유일한 두 가지는 ‘모호함과 조롱’이라는 장 피에르 멜빌의 말대로, 잔느는 끊임없이 그의 자존심에 기스 가게 만든다. 전형적으로 여 배우와 감독 사이에 있을 법한 관계가 몽땅 역전되고 나서, 실컷 킥킥 웃고 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찍은 섹스신을 뒤로 하고, 여배우는 긴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그녀를 잔느는 뒤에서 꼭 안아준다. 후체위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카트린 브레이야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전언이다. 나의 자매여. 사실을 알고 있어도 그대들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사랑에 연습은 없다. 섹스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매여. 살아라. 감추지 마라. 실수해라. 브레이야는 연대한다. 보듬어준다. <팻 걸>에서 자신의 주인공 머리통을 여지없이 한방에 날린 그녀였지만, <섹스 이즈 코미디>를 통해 느껴지는 그녀라는 사람은 바나나를 우적우적 먹으며 “삶은 굉장한 거죠”라며 활짝 웃는 인간이다. 그러니 이제는 믿겠는가. 이제는 알겠는가. 왜 그녀가 뚱뚱한 여자라는 상태를 지칭하는 ‘팻 걸’이란 명사를 집어던지고, 자신의 영화의 이름을 ‘나의 자매여’로 바꾸었는지를. 잔느는 내뱉는다. “말은 거짓이야. 진실한 것은 몸짓이지.” 그 몸짓으로, 모두가 누구를 따라해도 자신의 몸짓으로, 브레이야의 자매들은 영화사의 길 모퉁이에서 불쑥, 자신의 환한 가랑이를 끊임없이 들이밀 것이다. 그러니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미안하게도 이 세계에서 더이상, 건성건성 매달린 모조 성기는 사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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