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는 생강차, 귀성길에는 만화책이다. 대한민국 명절 공식 종목 고스톱에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아랫목 체질들에게 명절음식을 쌓아둔 채 만화책을 보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을 터. 일본 만화 <올드보이>의 한국영화로의 변신합체는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나꿔채는 대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브라운관에서는 원수연의 <풀하우스>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바람의 파이터>의 성공과 함께 준비되고 있는 대작 후속타들도 즐비하다. <블루엔젤> <아일랜드> <오디션> 등등. 만화는 한국영화라는 두레박의 또 다른 우물로 깊어간다. 그리하여 영화 속 캐릭터나 스타일 혹은 이야기 방식 등에서 왠지 만화방에서 한세월 보냈을 듯한 감독 8명에게 열독만화를 물어봤다. 단순히 추천만화라면 심심할 것 같아 추천자들의 직업적 특성을 발휘하여 ‘영화로 만들고 싶은’이라는 단서도 달았다. 그들이 추천하는 스크린으로 옮기고 싶은 만화, 그리고 그리운 그 책장을 넘기던 이야기를 우리가 듣고 적어내려간다.
<20세기 소년> 우라사와 나오키 작 l 학산문화사 펴냄
봉준호 감독 l <살인의 추억> <플란다스의 개><20세기 소년>은 감독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만화일 것이다. 70년대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 동안 ‘친구’라는 세력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려는 주인공들의 열정을 그리는 이 만화는 사소한 디테일에서부터 거대한 상상력까지 오밀조밀 어우러져 있는 플롯이 절묘하다. 또 만화 초반부 70년대 일본 소도시의 변두리 풍경은 우리의 그것과 비슷해, 한국에서 영화로 제작한다 해도 특별히 설정을 바꾸지 않아도 될 정도다. 나오키는 장면 전환의 천재다. 훌륭한 영화의 콘티 같은 그의 만화 속 장면 전환은 〈20세기 소년〉에서도 빛을 발한다. 특히 과거 과학실의 암흑 속에서 벌어진 사건의 미스터리를 묘사하는 대목은 뛰어나다 할밖에. 최근 나온 16권까지 그는 이 사건의 진실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채 아주 조금씩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존 슐레진저의 <마라톤 맨>처럼 〈20세기 소년〉의 이야기는 앞으로 크게 점프했다가 다시 그 과정에서 생략된 무언가를 다시 보여주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과연 영화화할 수 있을까. 이야기가 이리저리 가지를 뻗치다가 다시 뭉치고 하는 특유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장편영화보다는 24부작 미니시리즈 같은 형식이 더 어울리지는 않을까.
<아시안> l 이유정 작 l 서울미디어랜드 펴냄
김성수 감독 l <무사> <태양은 없다> <비트>내 영화 <비트>가 허영만 원작 만화라는 점에서 눈치챌 수 있듯, 나는 꽤 만화를 좋아한다. <아시안>을 처음 본 것은 5∼6년 전쯤 되는데, 당시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통합된 아시아가 백인 블록에 점령되자 게토라는 공간에 머무는 ‘불순분자’들이 이에 격렬히 저항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것은 아시아의 경제 블록화 같은 현실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화에서 묘사되는 서양인들의 침공은 이라크전이나 베트남전, 나아가 한국전쟁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었고, 이 작품이 다루는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는 꽤 깊이가 있었다. 사실 나도 <블레이드 러너> 같은 SF영화를 좋아하는데, 다 보고 나면 항상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란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아시안>은 우리의 현실에 기반한 미래를 진지하게 상상하는 작품이었기에 무언가 절실히 와닿는 게 있었다. 게다가 사건의 주배경이 황량한 대지이기 때문에 뤽 베송의 <마지막 전투>처럼 값싸게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 SF영화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이 작품을 꼭 봐야 한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오! 한강> l 허영만 작 l 세주문화사 펴냄
김용균 감독 l <와니와 준하> 데뷔작과 현재 준비 중인 작품만을 갖고 나를 판단하는 사람에겐 의외겠지만, 난 장기적으로 대하드라마, 서사극 이런 데 관심이 있다. 그중에서도 허영만의 <오! 한강>은 영화로 만들고 싶은 의욕을 느끼게 한다. 이강토라는 허영만의 페르소나를 내세워 해방 직전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의 이데올리기 대립을 정면으로 다루는 이 만화는 우선 그 용감함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동안 해방 이후의 혼란한 시절이 구체적으로 영화화된 사례도 적은 것 같고, 또 당시의 이 혼란이 현재의 국가보안법 논란에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좌우대립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한번 다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사실, 이 만화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이강토가 여인네들과 벌이는 로맨스도 담고 있으니까. 물론 그런 장면도 재밌었지만, 더욱 인상 깊었던 장면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야기다. 오늘은 우파가 득세하고, 다음날은 좌파가 득세하는 식의 아귀다툼 속에서 자고 일어나 보니 한 포로의 다리가 잘렸다는 등 처절한 상황. 그건 지금에도 유효한 어떤 상징으로도 보인다.
<네가 세상을 부수고 싶다면> l 가오루 후지와라 작 l 학산문화사 펴냄
모지은 감독 l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옛날부터 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 만화방에 있는 만화는 더이상 볼 만한 게 없을 지경이다. 그러다보니 절판된 것이나 귀한 걸 구해본다. <네가 세상을 부수고 싶다면>은 절판된 순정만화, 그리고 뱀파이어 이야기다. 그림체와 내용이 모두 철학적이고 환상과 깊이 관련돼 있다. 대강의 줄거리는 아르바이트하는 여자아이가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는 내용.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사람들이 다 죽고 여주인공만 살아남는다. 죽어가던 엄마가 지나가는 남자에게 아이를 살려달라고 부탁해서 그 남자애가 이 아이를 뱀파이어로 만든다. 전체적인 갈등구조가 좋다. 두 사람의 운명이 <맨 인 블랙>처럼 누군가의 장난이었다라는 전환도 흥미롭다. 영화감독들에게 뱀파이어물은 한번쯤 도전하고 싶은 장르다. 이 작품의 매력은 멜로드라마로 뱀파이어물을 풀어낸다는 것이다. 만화에서 뱀파이어라는 소재는 대체로 이야기가 복잡해지기 쉽다. 독자 입장에서는 더 긴 호흡으로 갔으면 했는데 3권으로 딱 끝내버린다. 이러한 야무진 구성은 평범한 고등학생이 뱀파이어가 되는 학원물을 지적인 멜로물로 변화시킨다. 나른한 분위기도 마음에 든다. 만화틱하기보다는 나른하고 칙칙하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주인공들이 피를 빠는 장면이나 형사를 묘사하는 장면은 흡사 영화의 그것이다.
<굿바이 미스터 블랙> l 황미나 작 l 서울문화사 펴냄
이언희 감독 l <…ing>중학교 때부터 영화화하고 싶었던 작품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유치할지도 모르지만 황미나 작품 <굿바이 미스터 블랙>이다. 한창 철없던 시절 영화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워낙 할리우드영화밖에 못 보던 시절이니까. 아버지와 <E.T.> 같은 걸 보면서 막연하게 영화란 저런 거라고 생각했다. 만화도 마찬가지고. <굿바이 미스터 블랙>은 일종의 대하 로망이다. 그래서 뭔가 영화란 스케일이 크고 선이 굵어야 한다는 생각을 충족시켰던 것 같다. 사극을 좋아한다는 취향도 작용했다. 지금도 사극은 한번 찍어보고 싶으니까. 통념적인 방송사 사극 말고 <순수의 시대> 같은 걸로. <굿바이 미스터 블랙>은 지금 보면 고증이 안 됐거나 지적할 만한 대목이 꽤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당시에는 영국에서 호주로 죄수를 보내던 시절의 이야기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복수극이며 비극적인 사랑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영화로 만들면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스터 블랙이 긴 머리를 휘날리는 걸 좋아했던 건 고등학교 때 키아누 리브스를 좋아했던 기억과 비슷하다. 지금이야 왜 그랬나 싶지만. 만화의 구체적인 장면이나 디테일은 떠오르지 않지만 귀족의 아들이 호주로 유배를 간 것, 복수를 한 뒤 슬픈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은 생각난다. 아련한 느낌을 줘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당시에는 읽으면서 펑펑 울었다. 생각해보면 감수성이 영화하는 지금보다 좋았던 것 같다. 솔직했고.
<몬스터> l 우라사와 나오키 작 l 세주문화사 펴냄
조민호 감독 l <정글쥬스>어린 시절 나는 만화광이었다.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에 투고를 할 정도로 줄기차게 만화를 그려댔다. 박찬욱 감독이 영화화한 <올드보이>도 5년 전쯤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과 결합해 시나리오를 써보려고 했다. <몬스터>는 엽기적이고 무시무시한 액션물인데도 유머가 있고 삶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전체를 영화화하기는 부담스럽지만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 주인공인 의사가 살린 환자가 악마 혹은 몬스터로 변하고, 그를 추적하는 과정으로 몰아가는 부분이 일종의 성장영화를 연상하게 한다. 이야기 구조가 매우 드라마틱하게 전환된다. 자기가 살린 아이를 다시 죽여야 한다는 운명과 그것을 둘러싼 페이소스가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는 수련을 받고 카페를 경영하는 킬러다. 그가 원래 킬러였다가 그 일을 그만두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다. 어느 날 그는 총구를 겨눈 대상이 커피에 설탕 세 스푼을 넣는 걸 바라본다. 자기도 커피를 마실 때면 똑같이 세 스푼을 넣는다는 게 문제였다. 처음으로 살해대상을 자신과 동일한 인간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쿨하면서도 다층적이고 유머를 지닌 시선으로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맘에 든다. 캐릭터의 보고(寶庫) 같은 만화다.
<진배> l 아다치 미쓰루 작 l 아마코믹스 펴냄
장규성 l <재밌는 영화> <선생 김봉두>감독이 된 뒤에는 그다지 못 봤지만 조감독 때만 해도 데뷔작 아이템을 찾으면서 엄청나게 만화방을 들락거렸다. 대체로 일본 만화가 재밌는 게 많더라. 그래서 영화 아이템도 일본 만화에서 찾는 경우가 흔했다. 아다치 미쓰루의 <진배>는 1권짜리 짧은 이야기지만 영화적인 코드가 가득하다. 나이 차가 많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설정은 가족 내 관계의 미묘함을 드러내는 간격으로 작용한다. 이야기의 얼개를 이루는 잔잔하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이라는 시련이 두 주인공에게 던져진다. 남겨진 부녀는 사랑이라는 공통분모로 겹쳐지지만 한편으로는 그것 때문에 서로를 할퀴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대로 영화화한다면 재미없겠지만 생략과 배치를 거친다면 좋은 영화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딸이 목욕하고 나오자 아버지 진배가 그녀를 나무라는 장면이다. 딸은 부녀간에 뭐가 이상하냐고 외려 반발한다. 딸의 남자친구에 대해 아버지가 은근히 경쟁심을 느끼는 구도는 불량스럽거나 억지스럽기보다는 애틋하게 느껴진다.
<로봇 찌빠> l 신문수 작 l 바다출판사 펴냄
윤제균 감독 l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낭만자객> 우리는 이현세 세대다. 개인적으로도 이현세 작가 팬이라서 그의 만화는 거의 다 봤다. 그러나 예전부터 영화화를 생각했던 만화는 조금 다른 것이다. <로봇 찌빠>. 신문수 화백이 그렸다. 당시에는 <둘리> 정도로 히트쳤던 작품이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장르가 SF인데 우리나라에서 SF를 어떤 방식으로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을 자주 했다. 할리우드에서 많이 보여준 무게잡는 방식으로 하면 한계가 명확할 것 같았다. 그래서 복고 SF 느낌이 나도록 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 찌빠는 신 작가님이 창조한 오리지널이고, 비주얼은 오래된 명랑만화라서 좀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영화로 만들면 그림은 충분히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복고 SF라면 재밌게도 그릴 수 있을 테고 <바이센테니얼 맨>이나 <A.I.> 같은 정서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로봇이라면 태권브이, 마징가, 그랜다이저 같은 완벽함이나 꿈의 대리만족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로봇 찌빠는 태권브이의 깡통로봇처럼 시쳇말로 약간 ‘하자’ 있는 로봇이다. 그는 번번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머리에 달린 프로펠러도 작고 빈약하다. 그런 점이 도리어 인간적이고 옆집 친구처럼 느껴진다. 만약 미래에 할리우드영화에서처럼 멋있는 로봇들만 득실거린다면 오히려 이런 불량품에 인간미나 공감을 느끼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상은 로보트 태권브이를 지향하지만 감성은 로봇 찌빠에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