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씨네21>의 추석 선물세트 [3] - 베스트 데뷔앨범 8편
2004-09-25
글 : 이용우 (대중음악평론가)
음악계의 한 획을 그은 베스트 데뷔앨범 8-첫 만남, 그 참을 수 없는 짜릿함

비틀스 <Please Please Me> 팔로폰/EMI,1963

이 음반은 비틀스의 이른바 4대 명반이 아니다. 그렇다고 위대한 팝/록밴드로서 비틀스를 예우한 결과도 아니다. 사실 당시 비틀스는 풋내기였다. 프로듀서 조지 마틴은 링고 스타의 드럼 실력을 신뢰하지 못해 스튜디오에 세션 드러머를 ‘5분 대기’시켜놓을 정도였다. 팝과 록을 예술적 경지에 올려놓았다는 비틀스 신화에 ‘눈먼’ 이에게 이 음반은 그저 화려한 맹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비틀스는 ‘될성부른 떡잎’ 이상이었다. “1! 2! 3! 4!” 하는 외침을 신호로 시종 거칠고 단순하게 전개되는 <I Saw Her Standing There>로 시작해 <Love Me Do>와 <Please Please Me>를 거쳐 존 레넌의 숨넘어갈 듯한 절규가 생생한 <Twist and Shout>로 끝나는 이 음반은 당대 청(소)년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바로 그 음악이었다. 이 4인조 비트 그룹이 수년 동안 고향 리버풀과 독일 함부르크의 ‘지하에서 박박 기면서’ 체득한 것은 ‘거두절미’와 ‘단도직입’의 음악이었다. 비록 자신들은 이런 미학, 아니 반미학에서 점점 멀어져갔지만. 단 ‘하루’ 만에 녹음된 이 거칠고 솔직하며 단순한 14곡, 32분3초의 로큰롤은 팝의 역사를 단숨에 바꾸었다. 노래, 악기 연주, 작사·작곡을 자체 소화한 비틀스는 ‘가수는 노래, 연주는 악단, 송라이팅은 전업 작사·작곡가’라는 주류의 관행을 정면돌파하며 수많은 후예들을 낳았고 청(소)년들에겐 ‘세대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에 비하면 이 음반이 30주간 영국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며 향후 ‘비틀스 현상’을 예비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사소하다.

섹스 피스톨스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워너브러더스 ,1977

히피 반문화의 꿈이 일장춘몽처럼 사라진 1970년대 중반, 이미 ‘성년’의 나이가 된 록(큰롤)은 온누리에 빛나고 있었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있었다. 이런 기성 록음악을 ‘엿먹이는’ 런던발 급보가 타전되었다. 그 이름부터 조야한 섹스 피스톨스의 데뷔작이었다. 록음악, 섹스, 가족, 왕실, 자본주의 등 거의 전방위적으로 씹어대는 가사, 되는 대로 토해내는 보컬, 기교라곤 귀씻고 찾아도 들리지 않는 연주, 거칠고 시끄럽고 단순하게 직진하는 사운드가 음반 전체에 ‘차갑게’ 불을 뿜었다. <Anarchy in the U.K.> <God Save the Queen>은 대표적인 트랙. 본디 악기를 거의 다룰 줄 모르는 불평불만분자이자 ‘양아치들’이었던 섹스 피스톨스와 ‘예술은 실천’이란 생각을 갖고 있는 상황주의 운동가이자 ‘접시돌리기 선수’인 매니저 맬컴 맥라렌의 합작품인 이 무정부주의적 부정은 다들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음악이야말로 진정한 록음악이란 미몽에 빠져 있던 시대에 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No Future”라는 외침대로 섹스 피스톨스는 이 음반만을 남기고 사라졌지만 이를 계기로 록 음반의 상업성의 부재증명(alibi)과 심오한 예술성이 최고의 상업적 광고문 겸 성공요인이 되던 시대는 뒤안길로 접어들었고, 프로페셔널리즘이 당연시되던 록 음악계는 ‘코드 세개면 충분하다’(Anyone can do it)는 문턱 파괴 아마추어리즘과 ‘스스로 하라’(D.I.Y.)는 자발성을 공히 전염시키는 펑크(punk)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펫 숍 보이즈 <Please> 팔로폰/EMI ,1986

댄스음악은 대개 상업적으론 짭짤한 재미를 보기 쉬울지 몰라도 비평적 찬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록 마니아에겐 폄하 혹은 경멸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이런 경향은 록 마니아에게 함정 같은 늪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호의를 모두 성취한 영국의 댄스 팝 듀오 펫 숍 보이스는 예외에 속한다. ‘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밝히는 이들의 데뷔음반 <Please>는 이들에게 ‘포스트모던 아이러니스트’, ‘댄스 그룹 그 이상의 댄스 그룹’이란 호평을 부여하기 시작한 계기이자 시발점에 해당한다. 영국과 미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차트 1위를 차지한 <West End Girls>를 비롯해 <Suburbia> <Opportunities> 등 주요 히트곡들을 살펴보면, 닐 테넌트의 가늘고 냉정한 보컬과 크리스 로의 적재적소 신시사이저가 독특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댄스플로어에서의 순수한 쾌락과 침실에서의 지적 호기심은 병행될 수 있을까. 언뜻 듣기에 순전히 ‘댄스플로어용’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이 음반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닐 테넌트의 무표정한 보컬과 상징적인 가사는 크리스 로의 밝고 경쾌한 신시사이저 라인이나 드럼머신과 모순적이지만 완벽에 가깝게 어울린다. 이는 현재까지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다.

닥터 드레 <The Chronic> 데스 로,1992

1990년대 이후 전세계 청(소)년들의 음악문화를 이끌고 있는 랩/힙합의 근거지는 오랫동안 이스트코스트, 그중에서도 뉴욕이었다. 그렇지만 1980년대 말 웨스트코스트에서 갱스터 랩이 등장하면서 이스트코스트의 독주 체제에 균열이 일어났는데 그 과정에서 시금석 같은 역할을 한 것이 N.W.A., 그리고 여기서 독립한 닥터 드레였다. 닥터 드레의 이 솔로 데뷔음반은 갱스터 랩의 신경향을 확고한 트렌드로 자리매김했다. DJ로 경력을 시작해 프로듀서로서 명성을 날린 닥터 드레는 여기서 자신의 경력과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지-훵크(G-funk)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조지 클린턴(의 팔러먼트 및 훵커델릭)의 영향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미드템포의 베이스 라인과 그루브, 음산한 고음의 신시사이저, 솔풀한 여성 백코러스가 빚어내는 독특한 무드는 랩/힙합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었다. 여기에 폭력과 갱스터의 삶에 대한 찬양, 여성 혐오, 호모 혐오를 삼위일체로, 살벌하고 상스럽게 쏟아내는 랩은(스눕 독의 공이 크지만) 수많은 비보이(b-boy)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힙합 클래식의 자리를 예약한 <Nuthin’ but a “G” Thang> 한곡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비록 랩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사운드를 빚어내고 포장하는 데 있어 닥터 드레의 능력엔 이견이 없다. 앞으로도 역사적인 힙합음반으로 손꼽힐 음반.

펄 시스터즈 <펄 씨스더 특선집> 킹/대지 ,1968

1969년 12월2일, 서울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MBC 10대 가수 청백전은 풋내기 신인 듀엣이 가수왕을 수상하는 이변으로 막을 내렸다. 대미를 장식한 주인공은 펄 시스터즈. 미8군 쇼 무대 출신의 이 자매 듀엣을 데뷔 1년여 만에 단숨에 정상의 자리에 올린 것은 바로 <님아> <커피 한잔> <떠나야 할 그 사람>이 실린 데뷔음반 <펄 씨스더 특선집>이었다. 잔잔하면서 긴장감 있게 전개되는 어쿠스틱 기타 반주로 시작해 점층적으로 스트링과 오르간이 가세하여 마침내 “님아∼”란 클라이맥스로 끝맺는 <님아>는 새로운 감성의 청(소)년 음악의 출현을 알린 1969년 최대 히트곡이었다. 섹시한 외모를 겸비한 이들이 TV에 나와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충격이기도 했고. 다시 말해 이들의 데뷔는 ‘비디오형’ 가수의 출현을 알린 사건이기도 했다. 펄 시스터즈의 성공을 음악적으로 직조한 인물이 신중현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싱, 가창 지도, 기타 연주, 밴드 지휘). 통기타 포크와 함께 1970년대 청년문화의 한축을 이끈 이른바 ‘솔 & 사이키’의 첫 스타트를 끊은 음반이자, 당대를 풍미한 이른바 ‘신중현사단’의 화려한 시작을 알린 음반. 참고로 수록곡의 절반은 인기 팝송의 번안곡이다.

김민기 <아하 누가 그렇게/길> 대도음반 ,1971

발매된 지 1년도 안 돼 판매금지되었고, 십수년을 고가의 희귀음반이나 복사한 카세트 테이프로만 은밀히 떠돌다 1987년과 1990년 두 차례 LP로 재발매되었을 뿐인 김민기의 유일한 정규음반이자 역사적인 음반 <아하 누가 그렇게/길>을 제대로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국 모던 포크의 ‘클래식’이라고 할 만한 수록곡들은 ‘들어보지 않아도’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악보를 통해 듣고 불렀던 곡들이다. 이 오리지널 레코딩의 절반가량은 섬세한 코드 진행과 주법으로 클래식 기타, 피아노, 스트링이 어우러진다(<친구> <꽃피우는 아이> <아침이슬>). 나머지 절반쯤은 정성조 쿼텟의 재즈풍 편곡과 연주를 외투로 걸치고 있는데 이 오리지널 버전들을 처음 듣는 이들에겐 놀랍고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길> <종이연>). 유럽과 미국의 대중음악을 받아들였으나 한국어와 한국적 정서의 고갱이를 잃지 않았던 김민기의 곡들이 15년간 ‘불온’의 딱지를 달고 금지되었던 것은 1970∼80년대 군사독재정권의 ‘정체성’을 방증한다. 한국 모던 포크의 기념비적 음반이자 이 땅의 현실에 대한 사려와 번민을 뛰어난 예술적 형상화로 갈무리한 음반이다. 대학가와 노래운동 단체들에 원형이자 극복대상이기도 했던.

서태지와 아이들 <SeoTaiJi Boys> 반도음반 ,1992

설명이 필요없는, 현재의 대중음악 판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음반. <난 알아요>는 최초의 랩 가요가 아니지만 한국어와는 조화되지 않을 것으로 간주된 랩을 한국화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랩 가요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이 음반의 폭발적인 반응은 무엇보다 랩을 ‘댄스’라는 뇌관과 결합함으로써 가능했다. 분방하고 산문적인 언어에 신체적 자극을 동반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 댄스음악은 발라드와 록음악을 적절히 가미하고 진지한 문제의식을 곁들이면서 지지자의 숫자를 승수화할 수 있었다. 음반은 절충적인 <난 알아요>부터 현재의 모습에 대한 통렬한 자성을 유도하는 <환상 속의 그대>, 달콤한 연가 <너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메탈과 댄스를 뒤섞은 <Rock ’n’ Roll Dance>까지 상이한 스펙트럼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철저히 주류적인 구성방식이었지만 뒤에 수없이 쏟아져나온 유사 ‘아이들’(의 음반)과 구분되었던 것은 서태지라는 출중한 송라이터이자 전략가가 멤버였다는 점이다. 이 음반은 다소 어설프고 수록곡들 사이에 편차도 있으며 사운드 역시 조야한 수준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른바 ‘신세대’의 감수성을 정확하게 파고들며 대중음악 신을 ‘판갈이’한 1990년대의 가장 중요한 음반이자 가요의 적극적 수용자를 10대 초반까지 끌어내린 음반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의견은 엇갈리겠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을 통틀어 가장 알토란 같은 음반이기도 하다.

삐삐밴드 <문화혁명> 송 스튜디오/DMR,1995

‘골 빈 여자애’처럼 보이는 여자애가 “안녕하세요”, “식사하셨어요”, “딸기가 좋아” 같은 시답잖은 걸 노래랍시고 하고, 그녀보다 열살은 많아 보이는 아저씨 둘은 시늉인지 진짜 연주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무성의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문화혁명’이란 음반제목과 펑크(punk)라는 홍보문구를 보곤 차라리 웃는 이들이 많았다. 뭐야 이건! 이 말을 짜증이 아니라 쌍수든 환영의 의미로 쓴 이들도 반대편에 있었다. 1995년 가요계 ‘사고뭉치’ 삐삐밴드의 등장은 표면적으로 그랬다. 베테랑 록 뮤지션 강기영과 박현준의 삐삐밴드는 엄숙주의와 프로페셔널리즘으로 굳건하던 가요계에 ‘발랄한 똥침’을 날렸고 이는 ‘똥꼬 깊숙이’ 꽂혔다. 유치하고 만만해 ‘보이는’ 삐삐밴드와 이들의 음악을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들끓었지만 처음부터 이들의 계산된 의도를 읽어낸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펑크를 특정 ‘록 스타일’이 아니라 기성 시스템에 대한 부정 전략으로 구사한 삐삐밴드는 뒤이어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으로 더욱 가벼워졌고, 끝내는 삐삐롱스타킹으로 이름을 바꾸고 TV에 나와 카메라에 침을 뱉는 사건으로 ‘장렬히 전사’했다. 이후 ‘심각한 기예 같았던’ 한국 록에 유머와 재미가 소생한 점, 통념과 상식을 넘어 좀더 분방한 음악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점, 여성을 보컬로 앞세운 이른바 모던 록 밴드도 줄을 이은 점은 삐삐밴드의 똥침의 후일담이다. 뭐, 그게 다 이들 때문이란 건 아니고 그저 얼마간의 거름은 되지 않았냐는 정도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