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씨네21>의 추석 선물세트 [5] - 보드게임 명작 6편
2004-09-25
글 : 이명석 (<여행자의 로망백서> 저자)
보드게임 명작 6편-고냐 스톱이냐, 주사위냐 카드냐

카탄(the Settlers of Catan)

보드게임계의 대명사라고 불릴 만큼 막강한 인기와 지명도를 가진 그야말로 ‘작품’이다. 카탄이라는 가상의 섬에 도착한 우리는 집과 길을 내면서, 목재, 곡물, 광물 등의 자원을 얻고 그것을 이용해 다시 집과 성을 만들어가며 정해진 점수를 먼저 얻어 승리하게 된다.

좋은 땅을 차지하고 그것을 통해 부를 넓혀가는 ‘부익부 빈익빈’ 게임의 성격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데, 부루마블이나 그 원형이 되는 모노폴리처럼 한번 발을 헛디디면 도저히 가난을 헤어날 수 없는 게임들과는 한 차원 다른 수준을 지니고 있다. 개발 카드를 통해 특수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고, 길을 넓혀가며 상대를 봉쇄하고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등의 다양한 전략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임 초반에 강자가 되었다고 절대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약자들이 연합해서 영토를 황폐화시키면 헛주사위만 굴리다 게임을 그르친다. 보드게임 중에는 카탄처럼 육각형의 타일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무라이, 카를로스 마그너스, 티칼 등 균형미를 갖춘 세련된 게임들이 대부분이다. 자연 상태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집을 건축하는 벌처럼 같은 형태의 타일로 무수히 다양한 게임을 만들어내는 신비한 기술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루미큐브(Rummikub)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한 애정측정장치, 고양이와 개가 쓸 수 있는 방독면, 냄새를 전달하는 팩시밀리…. 이 괴상한 물건들을 발명한 나라가 어디일까? 바로 중동의 알쏭달쏭한 나라 이스라엘인데, 개인적으로 이곳에서 만든 가장 쓸 만한 발명품은 바로 이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딸깍거리는 골패를 각자에게 주어진 판에 차려놓고, 정해진 룰에 따라 패를 떨어버리는 것이 게임의 목표. 게임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받는데, 트럼프 카드로 하는 훌라게임이나 홍콩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마작게임과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이 게임의 독창적인 매력은 자신의 패뿐만 아니라 상대가 내려놓은 패들을 재조합해서 일정한 규칙만 만들어놓으면 순식간에 판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게임 후반에 가면 모두가 ‘내 차례만 돌아와라’ 하고 기다리는 긴장감이 보통이 아니다.

숫자에 기반한 게임이 그렇듯이 여러 번 해도 질리지 않고, 특별한 심리전으로 마음 상하게 하는 일이 없어서 4인 가족 게임으로 아주 좋다. 다만 한 사람이 장고(長考)를 하기 시작하면 막을 방도가 없는데, 예쁜 모래 시계를 준비하거나 ‘송편 하나 먹을 때까지’ 같은 시간 제한 룰을 정해두는 게 좋다.

보난자(Bohnanza)

추석 같은 때 가족들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하기에 좋은 게임들은 아무래도 단순한 룰의 카드 게임이다. <로보 77> <피그 파일> <로코> 등의 게임은 약간의 설명으로 바로 실전에 들어갈 수 있고 뒤끝도 없다. 하지만 작은 문턱만 넘으면 좀더 큰 희열과 환희, 나아가 인생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게임이 있다. <보난자>가 그 대표자이다.

우리말로 번안하면 ‘콩 심어 콩 팔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자기 앞에 놓인 두개의 밭에 한 종류씩 콩을 심고 그 콩이 일정 숫자가 되면 시장에 내다팔아 돈을 얻는다. 이런 식이라면 그냥 운으로 게임이 끝나버릴 것 같지만, 여기에 ‘경매’라는 아주 중요한 룰이 들어간다. 여러 콩들은 희귀도에 따라 값이 다른데, 서로 필요한 콩을 상대와 교환할 수 있다. 물론 적절한 교환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아빠 나 커피콩 하나만 주면 그 남자하고 헤어질게’, ‘아들아 빨간콩이 없어서 생선전이 안 될 것 같구나’ 같은 식으로 다정, 혹은 처절한 외교전이 펼쳐질 수도 있다.

농사짓는 놀이니까 시골에 계신 부모님들도 좋아하실지 모른다. 하지만, 각 나라가 두 종류식의 곡물만 키워 서로 교역하면 된다는 식의 농업 개방론으로 연결될 소지도 있으니, 정치적인 문제는 알아서 하시길.

카르카손(Carcassonne)

여러 보드게임을 접하다 보면 특정 시대나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중세 이탈리아 가문의 권력 다툼을 다룬 <제노아의 상인>, 런던에서 여러 교통 수단을 이용해 도둑을 잡는 <스코틀랜드 야드> 등이 대표적인데, 게임을 하며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하는 느낌이 특별하다. 카르카손은 프랑스 남부에 있는 중세의 성곽 도시를 배경으로 여러 타일들을 이어붙이며 길, 수로, 성 등을 만들어 점수를 얻어가는 게임이다.

카르카손은 다른 게임들에 비해 여성 선호가 강한 편이다. 훌륭하게 그려진 그림 타일들을 이어가며 만들어가는 지형도 아름답고, 다양한 변수를 만들어내는 타일 운(運)이 게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등 게임이 덜 공격적인 것이 원인이 되는 듯하다. 그렇다고 견제나 실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몇배의 점수를 더해주는 특수한 말과 카드를 유효적절하게 쓰는 결단력이 매우 중요하다.

보통 유명 게임들은 여러 확장판이나 변형판들이 등장해 시리즈를 이룬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참여 인원 수를 늘리거나 룰을 복잡하게 만들 뿐인데, 카르카손은 오리지널에 타일이 추가된 확장판과 완전히 다른 타일들로 구성된 <석기 시대>(Hunters and Gatherers) 등이 각각의 재미를 전해준다는 점도 훌륭하다.

푸에르토 리코(Puerto Rico)

추석 연휴처럼 오랜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제대로 해보기도 어려운 게임들이 있다. 룰을 배우는 것은 까다롭지만 그만큼 고급스럽고 입체적인 게임 방식을 통해 풍성한 재미를 얻을 수 있는 <푸에르토 리코>와 같은 작품들을 정복하기에도 좋은 기회다.

배경은 앤 라이스의 소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읽으면 도움이 될까?(흡혈귀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백인들이 아메리카로 건너가 검은 노예들을 부리며, 커피와 염료 농장을 경작하고, 그 산물들을 배편에 유럽으로 보내던 시절이다.

우리는 악착같은 농장주가 되어 더 많은 경작물을 효율적으로 키워 새로운 밭과 시설을 갖추고 적정한 시점에 배에 실어 보낸다. 배편을 제때 맞추지 못하면 남은 농작물을 바다에 버려야 하는 경우도 쉽게 일어난다.

게임을 해보지 않으면 상상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이 게임은 주사위나 카드 같은 우발적인 운이 거의 작용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어떤 직업을 먼저 선택하느냐와 같은 상호적인 변수들이 게임을 만들어간다. 그만큼 실력과 경험이 작용하는데, 채석장과 같은 제한된 시설들을 먼저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하나 마음에 드는 장치는 개인 게임판을 하나씩 주기 때문에 맨땅에 이런저런 카드를 벌여놓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꿈의 공장> Traum Fabrik

영화광들을 위해 특별히 추천하는 보드게임. 당신은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가 되어 <킹콩> <밤비> 등과 같은 작품들의 감독, 배우, 촬영, 특수효과, 음악 등을 배치해 영화를 완성해간다. 장르별로 가장 먼저 영화를 완성하거나 최고의 퀄리티를 갖춘 영화를 만들면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보너스 점수를 얻기도 한다. 골든 래즈베리와 비슷한 최악의 영화상도 있는데, 이를 위해 마이너스 점수를 주는 배우를 서로 고용하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한다.

미국의 영화산업을 비판한 일리아 에렌부르크의 논픽션 <꿈의 공장>과 같은 제목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게임은 전반적으로 1930년대 이후 고착된 미국의 대형 스튜디오 영화 제작 시스템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게임을 잘 풀어가는 핵심은 중간중간에 있는 파티에서 우선권을 얻어 자신에게 필요한 칩들을 가져오는 것인데, 파티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배우’를 많이 확보해야 한다. 그래도 히치콕 같은 감독들에게 다른 어떤 요소보다 높은 점수가 책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랄까.

많은 명작 보드게임이 그렇듯이 이 게임도 독일에서 만들어져 우리가 잘 모르는 영화나 감독들도 많이 등장한다. 미리 약간의 공부를 해두면 게임을 하면서 자신의 해박한 영화 지식을 뽐낼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