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기덕과 <빈 집>에 관한 모든 것 [1]
2004-10-06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사진 : 이혜정
정리 : 김도훈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받은 <빈 집>에 관해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쓴 서문

세상을 살아가는 ‘유령연습’

“사람들은 내가 일에 미쳤다고 하죠. 한편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영화에 들어가고 결국 많은 작품을 찍어냈으니까요. 그러나 세트에서 난 휴식을 취합니다. 나에게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 해야 할 것만을 하고는 집으로 가죠. 그리고 쉽니다. 그 다음날 다시 시작하고요. 절대 스트레스는 없습니다. 전 차분한 성격이거든요.”

해외 언론들엔 김기덕은 괴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제6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폐막식 직후 열린 기자회견. 올해 베를린과 베니스의 감독상을 독식한 이 놀라운 감독의 지치지 않는 먹성에 질문이 집중됐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은 “촬영현장은 내게 사무실이나 다름없다”는 태연한 답변으로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부추겼다. <빈 집>에 대한 질문에도 김기덕 감독은 짧은 답변으로만 응수했다. 어디 해외 언론들뿐이었을까.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쥔 김기덕 감독과 <빈 집>에 대한 관심은 국내에서도 못지않았고, 결국 해당 영화사쪽에서는 시사회 요청을 받아들여 8월14일 오전 서울 강남의 한 극장에서 김기덕 감독의 11번째 영화 <빈 집>을 공개했다. 10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빈 집>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미리 풀어주기 위해 <씨네21>은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에게 영화평과 김기덕 감독의 인터뷰를 부탁했다. / 편집자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나는 김기덕의 열한 번째 영화 <빈 집>의 첫 장면을 보면서 홍상수의 다섯 번째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빈 집>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미처 찍지 않은 그 다음날 아침에 시작한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헌준은 (인왕산이 보이지 않는) 평창동에 살고 있는 문호의 집에 찾아가서 둘이 함께 부천에 살고 있는 선화를 만나러 간다. 그들은 하릴없는 하룻밤을 보낸 다음 덧없이 다시 거기서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날 밤 문호는 그의 평창동 집에 돌아가려고 애를 쓰면서 부천의 밤거리에서 하염없이 택시를 기다리며 끝난다. 그 다음날 아침 문호가 돌아오지 못한 (인왕산이 저기 보이는) 그 평창동 주택가에 한 남자가 전단지를 돌리면서 <빈 집>은 시작한다. 홍상수의 등장인물들이 그 동네에 살고 있는 동안, 혹은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동안, 김기덕의 주인공은 그 동네를 떠돌면서 그가 잠시 머물 빈집을 찾는다.

그 두 사람은 그만큼 가까이 있고, 또 그만큼 서로 멀리 있다. 이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나는 심각하게 생각해보았다. 왜냐하면 그 둘은, 혹은 이 두편의 영화는 그만큼 다른 방식으로 환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환상을 다룬다는 말은 실재를 마주보지 않기 위해 피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여튼’ 이미 던져진 세상이라는 한계 안에 들어가 그 안의 결여가 만들어내는 은유적 효과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그냥 유머를 빌려 말하자면 환상의 이쪽, 그러니까 도착증에 머물러 있는 홍상수의 주인공들은 희생을 거부하고, 환상의 저쪽, 그러니까 착란증에 빠져드는 김기덕의 주인공들은 말을 잃어버린다. 그것이 그들이 환상을 횡단하는 아슬아슬한 기술이다.

주인공들 말을 잃고 환상을 횡단하다

(이 글은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한 당신을 위한 서문이다. 그러므로 말 그대로 이 글은 그렇게 읽혀야 한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빈 집>이 ‘빈집’을 찾아다니면서 잠시 그 집의 주인들이 집을 비운 동안 그 집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라고 알고 있으면 사실 이 영화는 완전히 잘못 알려진 셈이다. 물론 이 영화의 표면적 통일성은 그렇게 되어 있다. 남자는 ‘빈집’으로 잘못 알았던 집에서 한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와 함께 사진작가의 ‘독신’ 아파트, 권투선수의 ‘스위트 홈’ 아파트, 평온한 전통 한옥가옥, 그리고 쓸쓸히 혼자 죽어가는 독거노인의 허름한 아파트를 차례로 방문한다. 그러나 그렇게 따라가는 동안 어느 순간 갑자기 이야기는 균열을 일으키고, 따라오는 당신을 따돌린다. 이것은 그 반대로 집주인이 자기 집을 떠나기 위해서 꿈꾸는 그 어떤 환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가 살고 있는 그 집은 아주 커다란 집이다. 그녀의 남편에게 매일 맞고 지내는 그녀는, 그래서 오늘도 눈자위가 퍼렇게 멍이 들고 입술이 터져버린 그녀는, 이 집에서 자기를 데리고 나갈 사람을 간절히 기다린다. 거기에 한 남자가 도착한다. 그리고…(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실재가 기다리는 환상의 영화이다. 그런데 김기덕은 그것을 반대 방향에서 생각한다. 이 영화는 환상이 실재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이야기와 영화 사이의 물구나무서기!). 그렇게 다시 서술하는 것은 김기덕이 이 견딜 수 없는 실재를 뒤집어 세워서 부정태와 함께 머물러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을 견딜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환상을 통해서 같은 이야기의 다른 구조를 만들어내려는 왜상(歪像)효과이다.

집은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내면

만일 이 사실을 놓치게 되면 이 영화의 절반 이후, 그러니까 남자가 감옥에 가고 여자가 다시 집에 돌아갔을 때, 그래서 그 남자가 감옥에서 새가 되고 그림자가 되고, 결국에는 그 스스로 시선이 되어버리고자 손바닥에 눈동자를 그려넣었을 때, 그 순간 감옥에서 나오자 그가 비존재의 존재로 화면 안에 비가시적 존재가 되어 머물 때, 당신은 아무런 배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일시적으로 하여튼 세상을 정지시키고, 거기서 나와서 자기가 나온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집을 나서서 빈집을 전전할 때, 그 집들은 비로소 물신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집들은 사실상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내면의 외재화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그 집들은 자기들의 주인의 마음의 실내화이며, 삶의 환유이자, 그들 자신의 작은 세계이다. 집은 세상에 떠 있는 작은 섬들이다. 그러므로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을 찾아 그들이 잠시 머물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여자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잉여지식과의 동거이다. 혹은 <빈 집>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김기덕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유령연습”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대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빈 집>은 일종의 무성영화이지만, 그러나 그가 무성영화의 미학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사운드트랙이 있는 대신 대사가 지워진 영화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당신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혹은 그 여자에게서 단 두 마디의 대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여행은 그런 의미에서 그 여자의 여행에 덧붙여진 그 남자의 여행이다. 그 남자는 거기에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유령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다. 그 여행이 그 남자와 그 여자가 방문한 네 번째 집, 그러니까 허름한 아파트에서 죽어가는 노인의 시체와 마주했을 때 끝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유령은 자기의 죽음을 지켜보고, 그 자신을 염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을 깨닫고, 그가 발딛고 서 있는 상상의 카오스에서 물러나야 한다. 말하자면 거기가 벼랑이다. 혹은 사실상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 것이다. 여자는 ‘빈집’으로 돌아가고, 남자는 상징적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감옥에 갇힌다.

△ <악어>를 찍었던 한강대교 한복판 아래 중지도에서 진행된 <빈 집> 촬영현장(왼쪽). 일산세트장에서 찍은 취조실 장면(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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