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기덕과 <빈 집>에 관한 모든 것 [2]
2004-10-06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그 집들은 자기들의 주인의 마음의 실내화이며, 삶의 환유이자, 그들 자신의 작은 세계이다. 집은 세상에 떠 있는 작은 섬들이다. 그러므로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을 찾아 그들이 잠시 머물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여자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잉여지식과의 동거이다. 혹은 <빈 집>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유령연습”이다.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뒤집어서 견뎌내다

그러나 <빈 집>은 여기서부터가 핵심이다. 혹은 다시 시작한다(이것은 이제 김기덕 영화에서 하나의 패턴이 되었다. 그는 영화를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중단하고 다시 시작한다. 이를테면 <나쁜 남자>의 마지막 장면, 혹은 <사마리아>의 세 번째 에피소드). 이제 그 (유령과 같은, 혹은 유령인) 남자는 자기의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한다. 여기서 그 남자는 연습한다. 혹은 그것은 다시 태어나려는 노력이다. 거기에는 김기덕의 영화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초인에의 간절한 소망이자, 숭고한 영혼에로의 다가감이 있다. 이를테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 험난한 언덕을 ‘기어이’ 올라가려는 그 안간힘을 생각해보라. 아무 대가도 없는 목적을 향하여 ‘하여튼’ 그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거기에는 소망도 없고, 바람도 없다. 그것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안간힘이다. 그 연습은 다시 한번 반복된다. 그래서 닫힌 감옥 안에서 그 모든 육신에게 부여한 한계, 그러니까 180도로 설정되어 앞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끊임없이 뒤집어서보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한다. 여기서 육신은 덧없는 것이 되고, 혹은 그림자와 비슷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남자가 깨닫는 것은 자기 자신을 누구에겐가 기대야 한다는 배움이다. 그가 다시 찾는 것은 그 여자이다. 혹은 그 여자는 끊임없이 그 남자를 다시 한번 부르는 것이다. 그 남자는 추억의 끈을 찾아, 먼길을 우회해서 그 여자의 집에 이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여자는 떠나지 않는다. 혹은 그 남자는 비로소 떠돌지 않고 머물고자 한다. 그 남자는 그 여자의 그림자, 혹은 그 여자의 남편 곁에서 함께 있을 것이다. 그 남자는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섹스를 할 것이다. 그들은 비로소 모두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것은 이인삼각의 게임이다. 이제 그 여자의 그 집은 더이상 빈집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해피엔딩일까? 그렇지 않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이러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장자의 말이다. 그것은 환상 위에 환상을 덧씌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남자와 그 여자가 함께 체중계에 올라섰을 때 그들이 함께한 무게는 제로가 되는 것이다. 거기서 더이상 현실의 무게는 무의미해진다. 혹은 거기 더이상 실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이 비로소 해방된 것인지, 혹은 그것이 결국 자살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지금 제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해피엔딩이야말로 김기덕의 영화에서 가장 절망적인 소멸을 맞이한 순간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나쁜 것을 피하기 위해서 더 나쁜 것을 택한 것이다. 그의 다음 영화는 총이 주인공이라고 한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빈 집>에 대한 외신 반응

‘침묵’속에 기적적인 리듬이 있다!

‘침묵’에 대한 호응은 놀라웠다. 대부분의 외신들은 인물들에게서 대사를 뺏는 대신 그 자리에 침묵으로 빚은 새로운 영화적 리듬을 불어넣었다는 내용으로 김기덕의 <빈 집>에 대해 극찬을 내놓았다. 영화제 폐막식을 전후로 베니스 현지에서 나온 <빈 집>에 관한 아래 해외 언론들의 코멘트 중 <할리우드 리포터>만이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서 다소 아쉽다는 평을 실었다.

“두 주인공의 대화의 부재 위에 강력한 유머가 흩뿌려져 있는 이 영화 안에 기적적인 리듬이 있다. 특히 인물들의 침묵과 눈빛은 도발적인 아이러니들로 가득한 시적 유머 중에서도 보석과도 같은 것이다.”(이탈리아 일간지 <일 가제티노>)

“한국의 이단아는 침묵으로 일관된 영화를 갖고서 우리에게 새로운 색채의 영화를 보여주었다. <빈 집>은 김기덕이 내면에서 우러나는 이야기를 만화적인 언어로 표현한 듯한 느낌이다.”(이탈리아 일간지 <라 누오바>)

“<빈 집>은 마법 같은 영화이다. 한번쯤 있을 법한 기묘한 이야기를 영화가 그릴 수 있는 한계 안에서 표현하고 있다… (중략)… 특히 마지막 10분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상기하게끔 한다. 그 장면은 피날레로 치닫는 순간의 감정의 상승을 멋지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훅 불어온 바람에 날리는 깃털을 보는 듯하다.”(이탈리아 영화잡지 <필름업>)

“<빈 집>은 춤곡인 미뉴에트 같다. 가볍고 고귀한 송가이다. 소리없는 영화로 만든 함축의 시(詩)다. 보이지 않는 기하학의 기교이며, 말하고 보여지는 메커니즘의 최대 산물이다.”(이탈리아 잡지 <인테르나치오날레>)

“소음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말없는 두 남녀가 불명(不明)의 그림자처럼 선(Zen) 수련이라도 하듯 지내는 영화의 중반까지는 분명 보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두 사람이 경찰에 결국 잡히는 순간부터 내러티브는 기운을 잃고, 젊은 남자가 감옥에 갇히면서 영화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 이동한다. 변증법의 전개를 지향하는 영화의 결론은 정연하며 전작 <사마리아>보다 좀더 희망적이지만, 하나의 철학적 주장으로서 볼 때만 만족스러울 뿐이다.”(<할리우드 리포터>)

“대부분의 관객은 (감독의) 암시와 (인물의) 외양에서 태석이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 교육을 잘 받은 젊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웃사이더이고 사회적인 룰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고, 무엇보다 마조히즘이 느껴지는 깊은 분노를 품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태석은 여전히 김기덕의 히어로다. 다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주인공과 달리 태석은 원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영화 또한 슬픔 보다는 희망적인 결말을 갖는다.”(<버라이어티>)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