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의 집과 감옥을 교차편집한 이유?
정성일 l 감옥과 선화의 집을 교차편집하고 있습니다. 감독님의 방식은 미장센 영화가 아니라 몽타주 형식인데. 선화의 집을 감옥으로 만들기도 하면서 동시에 계속되고 있는 가정폭력의 이미지를 중첩시키고 있습니다. 태석이 새 흉내를 낼 때 선화는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한옥가옥을 찾아가서 낮잠을 잡니다. 이것은 두 장소의 몽타주인 동시에 지적인 몽타주 방식이기도 한데. 더 중요한 것은 교차편집의 방식이 감옥 전체를 초현실적인 상황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사가 없기는 하지만 사실주의적이었던 영화에서 별안간 판타지로 탈바꿈을 해버리는데, 탈바꿈의 의도는 무엇을 목표로 한 것입니까.
김기덕 l 위대한 해석입니다(웃음). 일차적으로 저는 그것이 꼭 교차편집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백과 이해의 공백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변해가는 것에 똑같이 보조를 맞추어주어야만 했습니다. 선화는 남편이 때리면 맞받아치기도 하고, 손빨래를 하기도 하면서 서서히 변해갑니다. 그리고 태석은 180도 뒤에 완벽하게 숨는 것을 연습해나갑니다. 둘은 감옥과 집에 따로 있는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서로 치밀하게 마지막까지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성일 l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는 손바닥의 눈입니다.
김기덕 l 그 눈은 그림자 연습을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 눈을 피하는 연습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숨고 싶어하는 경지에 서서히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눈은 다양한 뉘앙스를 가지고 인식되어왔으니까요. 마음의 눈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정성일 l 감옥에서 나온 태석은 그림자가 되어 그가 선화와 들렀던 집을 차례로 방문합니다. 그러나 선화를 한번에 찾아가지 못하고 우회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김기덕 l 그것은 선화의 집에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한 일종의 훈련과정입니다.
정성일 l 마침내 태석은 선화의 집에 옵니다. 영화는 여기서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에 가깝습니다. 혹은 선화가 일종의 정신착란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태석의 그림자를 보고, 그 다음에는 거울에 비친 태석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 다음 선화의 첫 번째 대사가 나옵니다. “사랑해요 여보.” 그런데 그 말은 사실 태석에게 한 말입니다. 안겨서 키스하는 것은 남편이 아니라 태석이고. 다음날 아침의 두 번째 대사 “식사하세요”도 역시 태석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테마음악이라 할 노래가 흐르면, 태석은 여자 뒤에 그림자처럼 나타나고, 둘은 체중계에 올라가서 몸무게가 제로 상태가 된 것을 봅니다. 사실 저에게 이 장면은 순간적으로 선화의 자살처럼 보였습니다. 우리가 중력 제로가 될 때는 체중계 위에 목을 매거나 아니면 더이상 영혼이 없는 시체가 되어 그것이 무의미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납니다.
김기덕 l 그것은 정성일 선생님의 깊이 연구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것인데. (웃음) 고마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자를 본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느낌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죠. 느낌만 존재한다는 것은 있으나 없으나 결국엔 ‘있는’ 것입니다. 그를 물리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선화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태석을 거울로 유도하는 것입니다. 선화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느낌만 감지하지 존재는 인지하지 못합니다. 느낌이라는 것은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가장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물리적으로 그런 존재를 설득한 것뿐이지 사실 추상적 공간입니다. 태석은 선화 의식 속의 판타지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쨌든 너무 훌륭하게 해석을 해주셔서 고마운 반면…. (일동 웃음)
여전히 종교적 색채가?
정성일 l 저는 여전히 감독님의 영화가 종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난 다음에도 그 견해를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감독님 영화의 방점은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악어>에서 그것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란 대문> 이후 감독님 영화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후에는 구원으로 방점을 이동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에서도 그러하고 <빈 집>에서도 그러합니다. 구원이라는 테마에 매달리게 된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김기덕 l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죄의식과 구원이 아닌 관계들이 과연 일상에 존재하는가요? 그것은 종교적으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그런 것들이 끝임없이 충돌하는 것이 아닐까요. 구체적인 언어로 내 영화가 지나치게 해석되길 바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죄가 있어서 내가 기도를 하는지 죄가 앞으로 있을까봐 기도하는지… 내게는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성일 l <빈 집>의 마지막 자막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넣어서 우리에게 어떤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키길 바란 것입니까? 사실 이 말은 영화에 정확한 대구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혹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김기덕 l 마지막 장면. 그것은 이 영화가 끝날 시간까지만의 결말입니다. 이어서 영화를 만든다면 거기서는 태석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지요. 남편을 주인공으로 한다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될 수도 있을 테고. 이후의 이야기는 영화가 끝남으로써 차단된 것이고, 앞으로도 보여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 자막은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는 제 의지입니다. 삶이라는 것 자체가 판타지만으로도 또 현실만으로도 봐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그 사이의 혼란기를 끊임없이 지고 사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다음 영화는 총이 주인공?
정성일 l 다음 작품으로 구상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김기덕 l <나는 살인을 위해 태어났다>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권총이 다섯쌍의 남녀를 거치면서 자신을 소유한 인간들이 왜 복수를 해야 하고 감정을 폭발시켜야 하는지 고민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권총에서는 인간의 숨소리가 납니다. 권총은 러시아말로 이야기를 하고,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려 합니다. 이 권총은 처음에 맹세를 합니다. 나는 나쁜 사람만 죽이는 권총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권총이 감정을 가지기 시작하지요. 주인이 쏴도 자신의 의지로 총알이 안 나가게 한다든지. 이것도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권총이란 화자가 공간들, 빈집들을 이동하는 영화입니다. <빈 집>도 초고를 완성했을 때는 이게 과연 영화가 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 해야 할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었습니다. <사마리아>도 역시 제가 한번은 지나가야 할 역이라고 생각했었고. <나는 살인을 위해 태어났다>도 만들어진다면 내 영화인생의 한 역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