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기덕과 <빈 집>에 관한 모든 것 [4]
2004-10-06
사진 : 이혜정
정리 : 김도훈

태석은 선화가 만들어낸 판타지?

정성일 l 혹시 태석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은 아닙니까. 그러니까 태석은 선화가 만들어낸 일종의 판타지인 것입니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두 사람의 여행이지만, 사실 그것은 혼자만의 여행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사는 원래부터 성립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감독님은 프로덕션 노트에서 ‘우리는 모두 빈집이다. 굳게 잠긴 내 자물쇠를 누군가 열고 들어와 나를 해방시켜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그러던 어느 날, 유령 같은 한 남자가 나타나 나의 자물쇠를 열고 나를 데려간다. 오늘, 난 무작정 그 남자를 믿고 따라간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나’는 태석이 아니라 선화입니다.

김기덕 l (웃음) 등골이 짜르르한 게 너무나 정확하게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선화의 판타지입니다. 선화에게는 한국의 주부들이 생각하는 불만이 모두 들어 있지요. 박탈당한 경제권, 언제나 집안에 갇힌 식물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 그런 것들을 스스로의 의지로는 파괴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의 한국의 여성들입니다. 그들이 늘 꿈꾸는 것은 누군가 찾아와주는 것이 아닐까요. 선화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므로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겁니다. 이 시나리오를 보고 이승연은 “이것은 선화의 꿈인 것 같아요”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정확하게 본 것이었고 그래서 그를 캐스팅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것은 태석의 꿈일 수도 있습니다. 빈집에 아무도 없는 것이 너무나도 허전하기 때문에 누군가 피폐하게 갇혀 있는 사람의 구원자가 되고 싶은 스스로의 욕망. 양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성일 l 도대체 태석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화를 보면 태석은 가족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혹은 가족 사이로 스며들고 싶어합니다. 가족 사진 앞에서 자기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습니다. 카메라로 유사가족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우리가 태석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경찰서에서 들을 수 있는 한마디, “공부도 할 만큼 한 놈이…”가 전부예요. 공부도 할 만큼 한 태석이 빈집을 찾아 떠도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입니까.

김기덕 l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이른바 어느 정도 행세하는 사람들의 여백이라고 생각해요. 역설적으로 태석은 빈집에 들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빈집을 드러내는 겁니다. 거기에다 자신의 부재한 가족, 혈통적 가족이 아니라 사회적 가족을 불러들이는 것이 어쩌면 태석의 목적입니다. 거기에 구체적으로 선화라는 가족이 들어서면서 가족이라는 형태를 복원해나가는 것입니다. 나는 적어도 그가 돈이 없어서, 또는 자기의 피폐한 현실 때문에 부잣집을 드나드는 것으로 관객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성일 l 영화에서는 한번도 이름이 불리지는 않지만, 이승연의 영화 속 이름은 다시 선화입니다. 선화는 <나쁜 남자>의 여주인공 이름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연이겠지만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도 여주인공 이름도 선화입니다.

김기덕 l 제가 정한 이름이 아닙니다. 대본을 쓸 때는 그저 ‘그녀’라고 했고 ‘남자’라고 했어요. 그런데 연출부에서 선화로 부르더라구요. 이름이 있어야 연출부에서 일하기 쉬워지니까. 태석은 연출부 중 한명의 이름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이름들을 거부하지 않았으니까요. 한자로 해석해도 좋은 이름이지요. 글자 그대로 선할 선과 화난 화. 상반된 두 가지가 충돌하는 이름이기도 하고.

정성일 l 그러니까 동명이인이군요. (웃음) 알다시피 이승연씨는 위안부 누드 사진집으로 사회에서 폭력적으로 매장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 영화에서 누드 사진 모델이자 남편에게 매맞는 아내로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이승연이라는 배우의 또 다른 사건과 중첩적으로 읽힙니다. 이런 사실이 불편하지 않은가요. 아니면 이 영화에 그런 복합적인 의미를 주기 위해 그의 스타 이미지를 사용할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까.

김기덕 l 영화 속에는 이승연씨의 누드 사진을 서서히 복원해가는 과정이 있지요. 그것은 우리가 오해한 무언가를 다시 복원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선화 캐릭터가 배우로 설정되어 있었지만, 승연씨가 “내가 배우이므로 사람들이 이승연을 지나치게 연상할 것이다”라고 해서 일리가 있다 싶어 모델로 바꾼 것입니다. 한 배우를 무대에 다시 회복시키려는 의도 같은 것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빈 집>이 개봉하고 나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지 매우 궁금하고, 여전히 반응이 극도로 냉정하다면 한국사회가 아주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재인식하게 되겠지요.

차이밍량의 <애정만세>가 떠오른다?

정성일 l 이 질문에 오해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시 차이밍량의 <애정만세>를 보셨는지요. 영화의 도입부는 저에게 차이밍량의 <애정만세>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물론 선화의 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지만, 처음 빈집에 들어가 태석이 하는 대부분의 행위들은 이강생이 <애정만세>에서 했던 것들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 이야기는 감독님에게 하고 싶었습니다.

김기덕 l 솔직히 <애정만세>에서는 마지막에 여자가 공원에 앉아서 우는 장면밖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지금 들으니까 이강생의 에피소드들도 기억이 나는데. 제 영화들이 저의 전작들이나 다른 누군가의 영화들의 이미지와 중첩이 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누구나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정성일 l 하지만 영화공부하는 사람들은 <빈 집>의 첫 5분을 보고서 <애정만세>를 떠올릴 겁니다. 지금부터 시작될 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 계속 그 질문에 부딪힐 수도 있을 테고. 그럴 땐 그냥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김기덕 l 그런 질문들은 상관없습니다.

정성일 l 그렇지가 않은 것이 영화 이미지들의 역사 속에서 그런 것들을 인용해서 해석하는 것은 비평계에서 피할 수가 없는 일이거든요.

김기덕 l 차이밍량이 잘 알려진 유럽에서도 <빈 집>의 이미지들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l 빈 아파트에서 할 수 있는 많은 행위들이 있을 겁니다만 태석이 빨래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세탁기를 두고서 구태여 손빨래를 선택했는데. 그것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적 효과가 있습니까?

김기덕 l 노동을 동원한 손빨래는 기계를 이용한 세탁과 달리 인간미를 전달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그런 인간미를 좀더 정감있게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해보면, 빈집에 들어가서 마땅하게 할 만한 것이 없어요. 영화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손빨래 외에 캐릭터에게 마땅히 시킬 만한 일이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웃음)

정성일 l 처음으로 들어간 아파트가 주는 첫 번째 인상은 스위트 홈입니다. 이 아파트는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라는 유명한 클리셰를 보여줍니다.

김기덕 l 그것은 제가 사는 아파트입니다.

정성일 l 아. 그렇습니까? 중요한 포인트네요. 그런 뒤에, 여행에서 돌아온 가족들을 통해 감독님은 스위트 홈의 이미지가 위장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감독님은 단 하나의 예외인 한옥집만을 남겨놓고, 스위트 홈이 위선적이거나 허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는 당신의 견해입니까.

김기덕 l 그렇습니다. 굳이 한옥집을 예외로 둔 것은 고유하다고 하는 우리 정서를 되찾고 싶다는 유치한 보물찾기이기도 합니다. 그 집은 유일하게 두 주인공이 발 섹스를 시작하는 곳이고, 나중에 선화는 이 집에 들러 의자에 누워서 쉬었다 갑니다. 주인을 무시하고 내 집처럼 들어가지만, 주인 역시도 그녀를 침입자로 여기지 않지요. 이 장면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집이라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밀도이며, 그 밀도가 가장 완벽한 곳은 한옥입니다. 꽉 찬 듯하지만 공기가 살아 있고 숨쉴 수 있는 공간입니다.

정성일 l 다시 첫 아파트로 돌아가서, 감독님은 이 가족에게 마치 벌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태석이 장난감 총을 고쳐놓고 그 집을 떠났는데, 남편과 싸우던 엄마를 향해 아이가 방아쇠를 당깁니다. 아마도 그녀는 눈을 잃었을 겁니다. <수취인불명>을 연상시키는 장면인데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요. 게다가 그 벌을 남편이 아닌 아내에게 내릴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까.

김기덕 l 첫 번째 집은 태석이라는 인물의 위험성까지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석이 꼭 우호적인 사람만은 아니라는 사실. 한 가족을 재성립하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치명적인 위험성을 초래해놓고도 그냥 가버리는 것이지요.

정성일 l 태희는 두 번째 집에서 선화를 만납니다. 매맞는 아내는 우리 사회의 매우 뿌리깊고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그런데 선화를 중산층으로 설정하지 않고 부잣집에 갇혀 있는 것으로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었습니까? 부르주아 가정의 느낌이 커서 폭력적인 모습들이 현실적이 아닌 계급적인 상징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감독님은 이 영화가 매맞는 아내의, 가족으로부터의 탈출 욕망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 것은 아닙니까.

김기덕 l 부잣집이든 아니든 어느 집이나 그런 모델들이 있습니다. 선화는 그 계급에 올라서기 위해 일련의 과정들을 겪은 다음에 그 집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런데도 구타를 수용하고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그 계급이라는 것마저 비참해지는 현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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