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요 안 돼요… 돼요 돼요!”
이 영화의 정체- 유부남과 노처녀의 짜릿한 연애담궁금하긴 한데 그들의 재회를 들여다보는 게 두려웠다. 안 보기도 뭐하고 보기도 뭐한 이런 심정, 비단 나만이 아니었을 거다. 피천득의 <인연>을 떠올리며 불안(?)해한 사람 역시 나만이 아니었을 거다. 그만큼 9년 전 그들의 만남은 영화를 본 사람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로 전이됐기 때문이다(혹은 제발 자기이야기가 되길 간절히 바랐거나…). 하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난 개인적으로 스무살 짝사랑 오빠를 다시 만나 실망했을 때도 인생이 뭐 별거 있나 했고 죽을 듯이 사랑했던 전 애인을 봐도 그저 무덤덤했던 내 자신의 실체(?)를 생각하고 그냥 보기로 했다. 해 뜨기 전 상태(Before Sunrise)라면 밤이니 환상을 얘기한 것이고 해 지기 전 상태(Before Sunset)라면 낮이니 현실을 얘기했겠거니 했다. 밤에 쓴 편지는 아침에 꼭 다시 읽어보고 보내야 하는 법이니까
동양인에 비해 노화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제시과 셀린느는 9년 새 많이 늙어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사랑 말고도 중요한 게 너무나 많아졌다. 반갑고 설레는 만큼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그들의 재회는 보는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했지만 환경운동을 하는 투사가 된 셀린느의 정신없는 수다로 인해 이들의 재회는 일단은 평온(?)해진다. 9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얘길 두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퍼부을라니 그녀의 입은 쉬질 않았다. 인류에 대해 섹스에 대해 공산주의에 대해 마치 토론회에라도 나온 듯이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9년이 아닌 9일 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활기차긴 했지만 ‘핵심’을 애써 비껴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9년 전 하룻밤 사랑? 그런 꿈이라도 없으면 인생이 너무 퍽퍽하니까 간직할 뿐이지 절대사랑이 어디 있겠어. 게다가 어렸을 때 품은 사랑이란 얼마나 유치한가.
한데 이 영화, 내 기대를 저버리고 슬슬 수상해지기 시작한다. 늙은 관광객이나 타는 유람선을 타지 않았다면 그들의 핵심은 센강에 유기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가로 성공하고 잘난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이 있는 제시는 사랑없이 그저 의무감으로 살아가는 결혼생활 때문에 불행했고 종군 사진기자와 사귀고 있는 노처녀 셀린느는 일년에 반을 혼자 지내기에 외롭다. 그 둘은 9년 전, 6개월 뒤의 재회가 불발된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드러낸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하게 나간 제시에 비해 셀린느는 내숭을 떨고 앙탈을 부리고 신경질을 내는 수법으로 그의 진심을 알아낸다. 급기야 제시는 공항으로 데려다주는 택시기사에게 팁도 주지 않은 채 바래다만 주겠다 하고 셀린느의 집 안으로까지 들어가고 셀린느는 그가 비행기 놓칠 것을 계속 염려하면서도 차를 내어주고 그의 이름을 넣어 직접 만든 애절한 사랑노래까지 불러준다. 이미 “안 돼요돼요돼요”수준에 이른 그녀의 ‘교태’에 제시는 ‘뻑’ 가 있었는데 그녀는 니나 시몬의 공연흉내를 내면서 제시 가슴 안에 자신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즐기면서 영화는 끝난다.
결과는 하나도 모호하지 않다. 비행기를 타고 안 타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갔다가 도로 오면 그만이고 누가 봐도 그들은 서로의 운명적인 사랑에 뿅 가 있었으니까. 작은 설렘만 깔아주고 그저 서로 살아가는 얘길 나눈 뒤 쿨하게 헤어지길 바랐다. 절대사랑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하룻밤 사랑은 아무 연락없이 9년을 버티기에는 서로에 대한 정보와 신뢰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로 이 영화는 그들이 ‘다시’ 만난 것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유부남 소설가와 애인 있는 전문직 노처녀와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질투라고? 천만에.
그나저나 역시 남녀의 사랑의 줄다리기에서 헤게모니는 여자에게 있다는 진실이 확인됐다. 남자들은 자신이 ‘대시’해서 ‘쟁취’한다고 믿고 있겠지만 대시할 ‘거리’를 제공하고 쟁취를 했다고 믿게끔 하는 주최는 여자임을 셀린느가 여지없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만약 마지막 장면 뒤 그들이 재회기념(?) 섹스를 했다면 그건 삽입섹스가 아니라 ‘흡입’섹스로 불려야 할 것이다.
스포일러라고? 환상을 갖지 말라니깐!
오지혜 /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