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비포 선셋> 5인5색 감상문 - 그리고 삶은 ‘구차하게’ 계속된다
2004-11-02

그리고 삶은 ‘구차하게’ 계속된다

이 영화의 신화- 통속의 공포를 피하는 잔인한 위로

사랑이 늙으면 통속이 된다. <비포 선라이즈>의 속편이 <비포 선셋>이라는 이름으로 개봉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두려웠다. 1995년은 오래전에 지나가고 이제는 2004년이었다. 어떤 청춘도 결국 소멸하고 만다는 것을, 그 시간들은 내게 담담히 가르쳐주었다. 스물세살, 순수한 유목민이던 제시와 셀린느가 서른두살이 된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나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제도의 안도 밖도 아닌 곳에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있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머물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한 채, 얇은 사과 껍질처럼 무감한 생을 견디고 있으리라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삼십대 초반에 다시 만난 그들은 한순간도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 경쟁하듯 삶에 대한 불만을 과장하고, 자조 섞인 냉소를 허공에 날린다. 9년 전 그 하룻밤에 대한 추억은 종종 엇갈린다. 콘돔 상표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제시의 말에 셀린느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시치미를 뗀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맨홀로 미끄러져 들어갔으며, 미래의 나날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시간은, 제시의 이마 한가운데 흉터 모양의 얕은 주름을 흔적으로 남기고 침묵할 뿐이다.

제시가 ‘보육원을 차린 수도승’ 같은 결혼생활을 토로하면서 아이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할 때, 나는 셀린느 못지않게 당황했다. 뻔한 통속의 레퍼토리를 뱉어내는 그의 눈빛에 진정성이 담겨 있었기에, 그만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강파르게 야윈 얼굴만큼이나 냉소적으로 변한 셀린느가 “그해 여름엔 희망이 넘쳤는데, 지금은…”이라며 말꼬리를 흐릴 때, 그리고 그날 밤의 섹스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내숭이었음을 고백할 때는, 바보처럼 조금 눈물이 났다.

시간의 파괴력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비포 선셋>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떠올리게 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보고 나오는 길에 아마 나는 소주를 마시러 갔을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인간존재가 다만 생래적인 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까발려 드러낸다. 잔혹하지만, 잃어버린 낙원이 없으므로 아플 것도 없다. 그러나 <비포 선셋>은 다르다. 이 영화는 인생의 어느 한 시절, 너도 ‘괴물’이 아닌 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극장을 나와, 술을 마시는 대신 나는 거리를 오래 걸었다. 바람이 반대쪽으로 불었다. 자동차들은 하나둘 전조등을 밝혔다. 익숙한 도시의 길들이 미로처럼 느껴졌다. 너무 멀리 떠나와버렸다는 자각보다 더 뼈아픈 것은, 아직은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헛된 희망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둘이 함께, 셀린느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낡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밤의 비엔나와 낮의 파리를 거쳐 그들은 마침내 생활의 공간에 당도하였다. 뉴욕으로 돌아가야 하는 출발시각이 얼마 남지 않은 채로, 제시는 셀린느의 소파에 편안히 파묻혀 있다. 영화는 거기서 갑자기 끝난다. 제시는 곧 일어나 공항으로 갔을 수도 있고, 셀린느의 방에 그냥 머물렀을 수도 있다. 재회한 뒤 입맞춤조차 하지 않았던 그들이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변치 않은 사랑을 확인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되었을까? 삶은 구차하게 지속되는 것. 여기는 더이상 1995년의 세계가 아니고, 나는 스물세살이 아니다. 결말을 유예시킬 수는 있지만 머지않아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 환희의 순간도 시간의 유한성 앞에 조롱당한다. 해피엔드의 찰나 너머 겹겹의 층위로 도사리고 있는 현실의 덫. 제시의 네살짜리 아들과 종군 사진기자로 전쟁터에 간 셀린느의 애인 때문만은 아니다. 각자 귀환해야 할 일상은 동굴 같은 입을 벌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시간은 미완으로 끝나지만, 그러므로 오히려 사랑은 통속의 공포를 피해 더욱 아련한 신화로 봉인되었다. 그 매혹적인 기만은, 현실의 시간을 잔인하게 위무한다.

정이현 / 소설가·<낭만적 사랑과 사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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