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감당도 생각해 보셨나요?
이 영화의 아쉬움 - 상상과 다른 현실이 걱정된다너무 오랜만에 본 까닭일까요? 그는 그야말로 아저씨가 되었더군요.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소개로 만나서 얼마쯤 만나다가 지금은 가끔 안부전화를 묻는 사이가 된, 다소 어정쩡한 관계쯤으로 해두는 게 좋겠습니다. 스스로도 부끄럽다 싶었는지 결혼하고 나서 10kg쯤 살이 쪘다고, 요즘 살을 빼기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고 시키지도 않은 변명을 해댔습니다.
흐르는 세월을 어쩌지 못하기는 잘난 배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9년이 지난 뒤에 만난 에단 호크는 참 볼품없어 보였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건 그의 옆모습이었습니다. 청춘의 치기와 감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반듯한 이마와 사람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드는 그의 모습은 이미 간데없었고 그를 바라보는 제 마음까지도 무너져버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하시겠죠.
마르고, 초췌하고, 제시의 모습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제시의 파리 나들이는 작가로서 ‘독자와의 만남’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9년 전 하루 동안의 사랑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던 겁니다.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바쁘게 돌아서는 그를 유심히 지켜보는 이들 가운데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셀린느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 연인은 9년간의 시간을 뒤로하고 아름답고 아프게 재회했습니다.
현실적인 시간은 이번에도 짧았습니다. 제시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까지 단 몇 시간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확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6개월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왜 지켜지지 않았는지 버선목 뒤집어보듯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둘 다 서로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시는 또 6개월 동안 열심히 비용을 모아 그녀를 만나러 왔지만 셀린느는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연락처 하나 나누지 않고 헤어졌던 건 무슨 객기였을까요? 아마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곧 시들해지는 감정의 유희를 떨쳐버리고 싶었던 젊은 영혼들의 소신이라고 해둡시다. 현실적인 장치를 배제하고 운명을 믿었던 게지요. 그리고 9년이 흘렀습니다. 그들도 여느 연인들처럼 하나씩 얘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제시는 이미 결혼해 아이가 둘이나 있고 셀린느는 종군 사진기자로 일하는 애인이 있었습니다. 제시의 결혼생활은 권태롭기 짝이 없고 셀린느 역시 애인과 완전한 교감을 이루지 못해 마음의 겨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여전히 조심스럽습니다. 예전처럼 솔직해질 수 없는 조건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그립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영화의 분위기를 따라가는 건 여기까지. 이번엔 달리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그들이 6개월 뒤에 다시 만나 결혼했다고 한들 지금까지 그렇게 영혼의 교감을 느끼며 살고 있었을까요? 아내는 남편의 침묵에 남편은 아내의 잔소리에 무뎌져 말이 안 통하는 부부가 되어 있지는 않았을까요. 섬세한 그의 마음에 감동해 결혼한 그녀는 이제 그의 자상함이 성가시고 그녀의 당당함에 반한 그는 사사건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그녀에게 질려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현실적이지 못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해주리라 믿었던 그가 허풍선이 남작의 후예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실망해버렸을지도.
낭만적인 환상을 키워온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에 대한 좋은 기억들만 가지고 있더군요. 그는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더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녀와 결혼했다고 하더군요. 친구들도 그의 선택을 좀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가 좋아하는 전형적인 스타일은 아니었나 봅니다. “정민씨랑 결혼했으면 좀 달랐을 텐데. 아직도 정민씨 앞에서는 밥을 잘 못 먹겠네”라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고통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나는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안타까움, 또 한 가지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는데 막상 그것이 자신이 예상한 것과 다른 것일 때 얻는 괴로움. 두 사람이 꼭 같은 마음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힘들게 얻은 서로가 소소한 일상 속에서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때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 건지. 혹시 답을 알고 계시면 좀 알려주시겠어요?
황정민 / KBS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