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한 남자의 지친 내면의 발걸음, <영원과 하루>
2004-11-16
글 : 홍성남 (평론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공인된 걸작’이지만 앙겔로풀로스의 닫힌 세계 안에서는 그 위치를 한번쯤 의심해볼 만한 영화. 여하튼 한 남자의 지친 내면의 발걸음을 따라 고독, 죽음, 기억을 진지하게 사유하려는 아름답고 슬픈 영화인 건 분명하다.

앞에 놓인 건 그저 가느다란 선일 뿐이지만 그것을 넘는 순간 혹 세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을 지도, 그럼으로 해서 운명 자체가 단숨에 바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선 앞에 선 사람은 한쪽 다리를 들고는 앞으로 내디딜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는 듯한 미결정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학의 멈춰진 발걸음>(1991)에서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하나의 세상과 다른 세상을 가르는 경계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그처럼 마치 학이 한쪽 다리를 들고는 움직임을 멈추고 걸음을 유예하고 있는 듯한 자세로 비유한 바 있다. 앙겔로풀로스의 98년작 <영원과 하루>에서 우리는, 그와 같이 경계를 마주하고서 서성거리는 또 다른 인물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인물의 경우에 그 앞에 놓여 있는 경계란 얼른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커다란 두려움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과 내일을 나누는 경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언젠가 맞을 수밖에 없는 갈림길, 즉 삶과 죽음 사이의 구분이 불투명해졌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인 것이다.

내일이란 단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관련된 미지의 시간으로 다가온다면 초로의 시인인 알렉산더(브루노 간츠)에게 같은 단어의 용법은 그 반대일 것이다. 내일이 되면 그는 병원으로 갈 것이다. 아마도 중병에 걸린 듯한 그에게 이건 단지 거주하는 공간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알렉산더에게 오늘은 삶의 끝자락에 위치한 날인 것인데, 바로 이날을 그는 그간의 삶을 돌아보고 또 삶의 의미를 반추하는 발걸음을 옮기며 보낸다. 이미 이 세상을 뜬 아내가 30여년 전에 그에게 쓴 애틋한 편지와 길에서 만난 알바니아 난민 소년을 동행 삼아.

얼마 전에 개봉했던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비키퍼>(1986)는 사랑을 잃은 주인공 스피로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비교하자면, <영원과 하루>는 <비키퍼>의 그 마지막 순간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영화로 볼 수 있다. 죽음과 마주한 알렉산더가 떼는 지친 발걸음이란 어떻게든 죽음을 견뎌내고 초월해보고자 하는 하루 동안의 간절한 몸부림이다. 그는 불멸의 상징으로 시어(詩語)를 찾아 거리를 헤맨다. 그는 삶에서의 행복한 기억을 찾아서 과거의 하루로 여행한다. 또 그는 난민 소년을 집에 데려다주고자 찬바람이 부는 국경에까지 간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의 시인과 만나고 아내와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가 하면 초현실적이게 살풍경한 국경지대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알렉산더의 여정이란 시간을 통과할 뿐만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시간의 흐름을 잠시 멈춰놓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영화 속에서 우리가 따라가는 것은 알렉산더의 상상과 의식을 동력 삼아 흐르는 시간과 정지된 시간 사이를 왕복하는 여정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는 지금 알렉산더의 내면의 여정, 혹은 내적 갈등의 여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 여정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리고 알렉산더 자신이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속했어야 할 공간과 ‘관계’를 맺지 못했고 그것에 진정으로 속해 있지는 않았던, 유령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잘못된 기억일지 모르는 아내와의 행복한 하루, 딸과의 소원한 관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의 상태 같은, 여정의 결과 드러난 흔적들은 그런 사실의 증거처럼 보인다. 어머니에게 “왜 저는 망명의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라고 묻는 알렉산더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또 집으로부터 망명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이 경계에 위태롭게 선 망명자는 또 다른 망명자인 알바니아인 소년을 만난다. 이 소년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알렉산더는 그간 오랫동안 ‘침묵’으로 둘러싸여 있던 삶에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을 경험하지만(소년은 ‘내적인 망명자’ 알렉산더와 대비해 앙겔로풀로스의 화폭에 뉘앙스를 좀더 풍부히 해줄 ‘정치적’ 망명자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자전거를 탄 노란 옷의 사람들을 연상케 하듯 이 노란 점퍼를 입은 소년은 알렉산더에게 한 줄기 빛을 주기 위해서 실재하지 않는 그 어떤 곳에서 온 어린 천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아무리 알렉산더가 삶의 마지막 나날들 안에서 무언가 인식에 도달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의 삶 전체를 바꿔놓진 못한다. 그렇게 영화는 결코 털어낼 수 없는 삶의 회한을 고상함과 센티멘털함이 섞인 톤으로 이야기한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영원을 경험하는 것이란 꽤 고고한 주제를 다루는 이 영화는 긴 호흡 안에서 유영하듯 움직이는 카메라와 아름다운 선율 덕에 한층 더 심오해 보일 수 있다. 앙겔로풀로스는 스스로 말하듯 자신의 명상을 시적인 표현으로 만드는 (듯한) 재능이 있음을 <영원과 하루>에서도 또 한번 입증해 보인다. 확실히 이것은 아름다운 영화이고 슬픈 영화다. 그리고 우아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 감동은 그리 폭이 넓은 것도 또 아주 오래가는 것도 아닐 것 같다. 이를테면,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들을 어느 정도 보아온 사람들에게 이것은 주제, 모티브, 스타일 등에서 그의 거듭되는 자기 복제를 보여주는 듯해 질식감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영화에서 다루는 고독, 시간, 기억, 죽음 등의 주제들이 얼마나 깊숙이까지 들여다보이는가에 대해서도 한번 더 숙고해볼 만하다. 이제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는 영화 자체의 ‘경계’에 대해서도 물어보라고 우리에게 권유한다. 걸작인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사이의 미묘한 경계에 대해서도 말이다.

:: 영화 속 시인의 초상과 시어

언어를 통해 세상을 보다

앙겔로풀로스 감독 자신이 자주 인용하는 말 가운데 하이데거가 했다는, 언어야말로 우리의 진짜 신분증명서라는 것이 있다. <영원과 하루>에서 그는 하이데거의 바로 그 명제를 믿는 사람, 즉 언어를 통해 집을 찾으려 하고 언어를 통해 세상으로 난 새로운 창을 열려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알렉산더는 19세기의 시인인 디오니소스 솔로모스가 결국 완성하지 못했던 시를 대신 완결시키려 애쓰는 인물이다. 알렉산더의 상상의 여행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솔로모스는 실존했던 그리스 시인으로, 그리스가 당시 발칸반도의 맹주로 군림하던 터키에 저항하던 때에 혁명시를 썼으며 그리스어의 통일에 큰 힘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로모스는 어려서 이탈리아에 건너가 공부했기 때문에 스물두살 때 그리스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탈리아어로 시를 쓸 정도였으나 모국어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마을을 돌아다니면 사람들로부터 예전에 듣지 못했던 단어들을 수집했다. 영화 속에서는 솔로모스를 흉내내 알렉산더가 소년으로부터 단어를 ‘사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렇게 단어를 산다는 것은 순전히 앙겔로풀로스가 지어낸 것이다. 소년은 알렉산더에게 세개의 단어를 가져다주는데, 이 단어들은 영화의 스토리와 주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소년이 이야기하는 첫 번째 단어인 ‘코르풀라무’(korfulamu)는 엄마 품에서 잘들 때 아이가 갖는 감정을 표현하는 말로, 사랑이나 친밀감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알렉산더가 소년으로부터 사는 단어는 ‘제니티스’(xenitis)인데, 영혼의 상태와 관계가 있다. 이방인, 그것도 어느 곳에서나 이방인인 사람이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이다. 마지막 단어는 알렉산더와 소년이 헤어질 때 나온다. 영화의 중요한 주제와 관련되는 ‘아르가티니’(argathini)는 원래 “매우 늦은 밤에”라는 뜻으로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세개의 단어는 알렉산더가 영화 속에서 던지는 중요한 세개의 질문들과 관련된다고 봐도 좋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을까?”, “왜 나는 망명의 삶을 살았을까?”, “내일은 얼마나 지속되는 걸까?” 앙겔로풀로스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영원과 하루>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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