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의 페이지
2004-12-03
글 : 정이현 (소설가)
자신의 꿈을 가꾸고 왕실을 박차고 나오는‥아! 신데렐라는 진화한다

신데렐라도 진화한다. 지금은 21세기. 반반한 얼굴 하나 앞세워 킹카 왕자님을 낚아챈 재투성이 아가씨의 신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제 손에 아무 패도 쥐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을 선사해줄 남자를 기다리는 소녀는 한심하다기보다 차라리 애처로워 보인다. 더구나 신분상승을 목적으로 ‘계획적인’ 접근을 꾀한다면? 세상물정 모르는 왕자님은 혹시 넘어갈지 몰라도, 여자들 사이에서는 바로 왕따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무도회에서 왕자님이랑 눈 맞았다는 신데렐라 얘기 들었니?” “흥. 그 계집애. 일부러 유리구두 한 짝 흘리고 왔다고 소문이 자자하잖아. 솔직히 지가 예뻐 봤자, 어차피 왕자님 눈에 콩깍지 벗겨지면 끝장이잖아.” “하긴 친정도 별 볼 일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왕궁에 들어가면 뭐하겠어? 평생 좌불안석일 텐데.”

여배우 줄리아 스타일스의 팬들께는 미안한 얘기지만,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의 여 주인공 페이지는 눈에 띄게 예쁜 소녀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은 계속 진짜 주인공은 언제 나오는 거냐고 의아해 할 만큼 ‘씩씩한’ 외모를 가진 페이지. 덴마크 왕실의 적통 후계자인 에디의 열렬한 사랑을 받기에 그는 너무 수수해 보인다. 존스홉킨스 의대에 진학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공부하는 졸업반 여대생 페이지는, ‘미모’ 대신 ‘꿈’으로 무장한 아가씨다. 내 인생을 통째로 떠넘길 만한 멋진 남자를 물색하는 대신 두터운 안경을 걸치고 실험에 몰두한다. 그렇다고 공부만 들입다 파는 ‘똘똘이 스머프’도 아니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학교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또래의 여자친구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페이지의 모습은 ‘2004, 바람직한 여대생 뽑기 대회’에의 출전을 권유하고 싶을 정도로 가히 모범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 페이지는, 남자 하나 잡아 팔자 고쳐 보려는 허황되고 골빈 여자애가 아니다. ‘예쁜 바보’는 가라. 이제 바야흐로 ‘능력녀’의 시대가 도래 했나니. 죄가 있다면 다만 ‘모르고’ 사랑했을 뿐, ‘알고 보니’ 왕자님이라는데 어쩔 것인가! 이 새로운 신데렐라는 또한,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대해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마냥 즐거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꿈을 접고 왕실의 인형으로 살아야하는 삶에 회의를 품고, 과감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줄도 안다. 결국 삼척동자도 예상할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의 결말답게, 졸업식에 나타난 왕자님은 학사모를 쓴 페이지를 뜨겁게 껴안으며 속삭인다. “나와 국민들은 너를 기다릴 거야.”

사랑과 커리어. 현대 여성들의 영원한 골칫거리인 이 두 마리 토끼를 페이지는 한번에 거머쥐었다. 사랑도 어렵고, 성공도 어려운 세상. 이 시대 젊은 여성들에게 ‘불가능한 대리만족’의 즐거움을 전파했다는 점에서, 페이지는 새로운 신데렐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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