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 사람들 만나면 편해져, 좀 숨쉴 만해”
이창동 감독을 12월1일 오후 일산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잘 빗지도 감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장발, 우중충한 배색의 후줄근한 옷차림, 느릿느릿한 말투, 농담까지, 모든 게 예전 그대로였다. 늘 자기 내부를 향하는 감시의 안테나도 여전히 성능 좋게 작동하고 있었고, 자학에 가깝게 자신을 엄격하게 다루는 결벽증 증세도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작가의 정체성도 그대로인데, 그것은 작가주의 감독의 태도로 또 다른 현장을 지휘하다 돌아왔다는 뜻일 수도 있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의 관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대로, 그에게서, 권력의 맛을 보았거나 신분적으로 수직상승한 흔적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 특유의 여독 같은 게 짙게 느껴졌다. 그 여독을 푸는 게 당분간 그의 숙제처럼 보였다.
그는 장관 취임 초기 인터뷰에 응한 뒤 1년 반 만에 <씨네21>과 재회한 셈이다. 그는 2003년 3월부터 2004년 7월까지 1년5개월 동안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장관이라는 단어는 애써 피하고 싶은 듯 ‘공무원’, ‘공직’이라는 표현을 주로 쓰는 그가 ‘공익근무’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지 만 4개월 만에 갖는 첫 인터뷰다. 인터뷰를 기피하는 데는 대중에게서 빨리 얼굴이 잊혀지고 싶다는 소망도 있다. TV <9시뉴스>를 통해 시골 구석구석 알려진 얼굴이 잊혀지는 속도만큼 그가 한국사회에서 작가의 편안한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 때문에 밀양에 한번 가봤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더라고.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써봤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더 알아봐. 얼굴이 넓어서 잘 안 가려지니까.”
고등학교 교사-소설가-영화감독이라는 구불구불한 이력에 장관이라는 특이한 경력 하나가 추가되면서 그의 라이프스토리는 점점 복잡해진다. 인터뷰에서는, 점점 드라마적 구성을 취해가는 그의 삶 전체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영화계로 돌아온 기분이 어떠냐”는 첫 질문에 그가 “아직 복귀 안 했다”고 대답했을 때 그저 직답을 피하려는 허사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한 진짜 이유를 그는 인터뷰의 맨 마지막에 가서야 밝혔다. 그는 조금은 뜻밖의 작업에 몰두해 있는 중이었다.
글 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
조선희ㅣ 그동안 뭐하고 지내셨어요.
이창동ㅣ 당분간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는 게 목표였는데 쓸데없는 일들이 많아요. 뭐, 사람 만나고, 외국에 갔다오고,
조선희ㅣ 그만두고 나서 바로 파리로 가셨다는 기사를 봤거든요. 왜 가셨었어요?
이창동ㅣ 그냥… 가고 싶어서. (웃음). 아무것도 안 하려고 갔죠. 젊은 여자 화가가 살던 집인데, 아주 조그만 집이에요. 다락방 수준의. 근데 그 친구가 미국에 휴가를 떠나면서 세를 놓고 갔어요. 거기서 보름 지냈죠.
조선희ㅣ 혼자?
이창동ㅣ 친구하고. 만날 햇반, 김치하고 라면 끓여먹었어요. 몽파르나스, 그 근방에 묘지가 있어요. 거기서 좀 시간을 보내다가, 한 30분 걸어 다운타운까지 가서 조그마한 극장에서 영화 보고. 테라스에 앉아서 지나가는 여자들 보고. 여자들만! 둘이 약간의 심사평도 하면서. 그러고 보냈죠.
조선희ㅣ 모레 인도네시아 가신다고요? 그건 어떤 거예요?
이창동ㅣ 자카르타에서 하는 영화제가 있어요. 한국 영화산업이 어떻게 발전하게 됐나를 이야기 좀 하라고 해서. 그런 거 안 하려고 했는데 영진위에서 하도 하라 그래서…. 애프터서비스로 생각하고 하는 거지요.
조선희ㅣ 일본도 갔다오셨죠?
이창동ㅣ 도쿄영화제 갔죠. 심사하러. 도쿄영화제가 올해 들어 리노베이션이라고, 새로 시작하려는 분위기가 있어요. 아마 한국 영화산업에 자극을 좀 받았나봐.
조선희ㅣ 도쿄영화제가 옛날엔 꽤 괜찮았는데. 92년이었던가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이 그랑프리를 받았을 때만 해도 도쿄영화제에서 상받았다 그러면 엄청난 거였잖아요. 근데 영화제도 영화산업하고 같이 가는 거 같아요. 영화산업이 기울면 영화제도 시들해지고.
이창동ㅣ 도쿄영화제는, 공은 많이 들인 것 같던데 성공할 수 있을지는… 글쎄요.
조선희ㅣ 여행 다닌 것 말고 보통 뭐 하세요?
이창동ㅣ 이것저것 많아요.
조선희ㅣ 일단은 영상원 강의가 있으시겠고. 세 학기 쉬고 복직하신 거예요?
이창동ㅣ 예. 그거 말고는 보통 백수의 일과라고 생각하세요.
조선희ㅣ 뭐, 백수도 다양한 종류의 백수가 존재하죠. 최근 어느 자리에서 백수 얘기가 나왔는데 김정환 시인이 말하기를 백수도 자기 경지쯤 되면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동쪽으로 가면 잘 먹을 수 있겠다’ 그런 감이 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잘못 걸리면 소주 한병 얻어먹으면서 두시간 설교 듣는 수도 있대요. 근데 이창동 감독이야 자립 능력도 있을 테고, 좀 다르지 않겠어요?
이창동ㅣ 백수 초보자들이 쓸데없이 바쁜 거거든. 남의 일에 신경쓰고, 일들이 늘 이리저리 연결돼 있고 그렇지. 김정환 같은 경우는 뭔가 공기의 냄새를 맡잖아. 그러면서 시국을 점치고…. (웃음)
조선희ㅣ 영화감독이라는 직업 자체가 백수 하다가 2년에 한번씩 계절노동자 하다가 어차피 또 백수 되고 그런 것 아닌가요.
이창동ㅣ 그렇죠. 백수 하기 딱 좋은 직업이지. 그래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어요. 아웃되는 데 대한 공포가 있고, 남의 돈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고. 사기꾼들인데, 늘 바쁜 이유는 그런 공포 때문 아니겠어요.
조선희ㅣ 나라를 훔치면 왕이 되고 남의 물건을 훔치면 도둑이 되는 것처럼 사기를 잘 치면 위대한 작가가 되고 잘못 치면 얼치기, 정신병자가 되는 거고.
이창동ㅣ 영화판이 그런 점에선 심하죠. 판결이 빨리 나잖아. 그리고 되게 중형이야. 세헤라자데의 운명이긴 마찬가지지만 소설가는 자기 혼자 버티잖아. 근데 감독은 그렇지 않죠.
조선희ㅣ 돈 대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그 날로 작가 생명도 끝이니까.
이창동ㅣ 난 안 당해봤지만 상상할 수 있거든. 아마 눈길이 다를 거야. 그걸 피부로 느낄 거야. 아웃됐는데 들어와서 어슬렁거리는 느낌 있잖아.
조선희ㅣ 설마 지금 그렇다는 건 아니죠?
이창동ㅣ 그렇게 될 거라고. 나는 앞으로 두어편 더 사기를 칠 수 있지 않을까. 두편은 봐줄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