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그야말로 폼이지”
조선희 l 지난해에 <오아시스>가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돼서 칸에 가셨죠? 그 기사 보면서 ‘딴지일보’식으로 ‘아, 쓰바, 저거 너무 폼나는 거 아니야’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장관이 다른 나라 방문할 수도 있고 감독이 초청받을 수도 있는데, 장관이 감독 자격으로 칸영화제에 간다는 건, 진짜 폼나 보이더라고요.
이창동 l 그렇게 폼나진 않아요, 실제로 그 폼을 취하고 있으면. 근데 실은 일이 있어서 갔던 거예요. 해외문화원장회의라는 게 있어요. 그게 파리에서 있었고, 또 프랑스 문화부 장관하고 만나게 돼 있었어요. 문화분야에서는 프랑스와의 국제적 유대가 굉장히 중요하죠. 미국은 문화에 대한 개념이 없는 나라예요. 근데 어쨌든 우연인지 그쪽에서 기획을 한 건지는 모르겠어요. <오아시스>는 베니스에 나갔던 작품이라 칸에선 안 받아야 하는 거였거든.
조선희 l 전에 한길사 사옥 오픈하면서 단재상 시상식 할 때 정도상이 상받는다고 오라고 해서 갔죠. 근데 거기 이창동 선배가 온 거야. 헐렁한 옷 입고 앞자리에 앉아서, 출판단지 대표, 심사위원장, 그렇게 장황하게 연설들을 하는데 끝까지 그냥 앉았다 가는 거야. 그래서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장관한테 인사를 시켜야지 싶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누구한테 물어봤더니, 본인이 그거 안 하는 조건으로 갔다고 그래요. 그런데 식이 끝나고 나니까 사람들이 이창동 감독한테 사인받으러 몰려드는 거야. 한도 끝도 없이 사인하시대. 왜 장관 초기에,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엄청 퍼부어댔는데, 끝나니까 한나라당 의원이 와가지고 우리 애가 당신 팬인데 사인해달라 그랬다 했잖아요. ‘너무 폼나는 인생이네’ 싶더라고요. 작품성과 흥행성을 다 갖춘 인생이라고 할까. 사회적 냉대를 받으며 고독한 예술가의 길을 가야 정상인데 이 사람은 예술의 길을 가면서 현실세계에서의 보상, 권력까지 갖다 떠안기니까.
이창동 l 예술가가 아닌 거지. 가짜지. 그걸 알기 때문에 내가 불편한 거예요. 자격지심도 있는 거고. 이를테면 대중의 관심, 일부 호의 또는 애정이더라도 그게 일시적인 거고, 나 스스로도 가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폼이지. 폼을 끊임없이 취해야 하니까 피곤하지. 밀착되는 감정은 아니에요. 내가 밖에 있을 때 고위 공무원들이 문화행사에 와서 재미없는 연설할 때 되게 싫었거든. 그래서 일부러 문화예술쪽 행사에는 그런 조건을 얘기하죠. 부천영화제, 전주영화제 갔을 때도 그랬어요. 가긴 가는데, 소개도 하지 마라, 시상도 안 하는 조건으로.
조선희 l 권력으로 간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조건을 내걸잖아요. 축사 순서를 제일 첫 번째 줄 것, 맨 앞자리를 줄 것. 가령, 사람들에게 권력에의 의지라는 게 있는데, 물론 정치권력은 그 권력의 일부죠. 집안에서 가부장도 하나의 권력이라서 여성문제가 진도가 잘 안 나가는데. 여하튼 정치권력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걸 씹는 재미에 살잖아요.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맛에 취하고 길들여지는 거, 그걸 경멸하고 형편없이 생각하는 재미에 살잖아요. 가령 문화계쪽 사람 중에도 민족시인 민중시인이란 사람이 국회의원 됐을 때 그런 의전적인 걸 주장하다가, 흔히 말해서 거들먹거리다가 사람 우스워지는 걸 봤거든요. 그런데 이창동 선배는 그런 의전을 거부하고 권력의 맛에 길들여지지 않겠다고 버티니까 우리 입장에서 좀 짜증이 나고, 질투를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망가지면 좀 욕도 하고 그러겠는데.
이창동 l 그럴 틈을 안 줘야지. 농담이고. 의전에 신경쓸 때도 많아요. 내가 의전을 제대로 못 취하면, 정부 전체의 위상이 문제가 될 땐. 근데 문화판 같은 데서 정치권력을 과시하려고 하면 안 되죠. 문화부 장관이 가장 존중해줘야지. 단재상에 모인 분들 보면 하나하나 문화권력을 갖고 계신 분들이에요. 근데 장관이 나가서, 문단에서도 후배고, 문화예술계에선 미미한 존재가 대중적 인기 좀 누린다고 폼잡는 건 더 이상한 거죠.
조선희 l 가령 우린 운전기사 딸린 차 타보는 게 소원이거든요. 그런 차 타고 다니는 거 좋지 않아요? 편하고 효율적이기도 하고.
이창동 l 근데 나는 내가 차 모는 게 더 편해요. 우선 뒷자리에 앉아 있으면 불편해. 조는 거 외에는 할 게 없어. 차에서 움직이면서 서류를 볼 때가 굉장히 많거든요. 행사장 갈 때, 원고 같은 거 대개 차 안에서 보는데, 사실 머리에 잘 안 들어와. 차 모는 게 제일 편하지. 음악 틀어놓고 따라부르고 욕도 하면서. 근데 내가 차 몰고 출퇴근하기가 쉽지 않아요. 아침부터 회의, 행사, 그런 게 죽 있다보면 대책이 안 서거든. 지하주차장에서 주차시키느라 헤매고. 그럴 땐 관용차를 탔지. 그런데 그거 말이야, 별 거 아닌 거 같아….
경험의 폭만큼 작품세계도 달라지지 않을까
조선희 l 이창동 감독의 삶은 드라마틱해요. 워낙 전쟁도 없고 평화시대인데다 더구나 지식인 사회에서 대충대충 노는 사람들 중에선. 근데 드라마틱한 인생을 사는 사람을 옆에서 보는 건 재밌는데, 본인은 좀 어지럽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창동 l 별로 안 어지러워요. 드라마는 아닐 거야. 드라마는 추락이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지금 이야기하는, 바깥에서 보는 내 인생엔 추락이 없잖아요. 그냥 운이 좋아가지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인생이지. 근데 내 내면으로 보면 나는 이미 예전에 추락해 있기 때문에 그냥 그 상태에 있는 거 같아요. 올라가야 어지럽지.
조선희 l 사람들이 내심 다 이창동은 이 시대 최고의 러키가이다, 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면, 그걸 내면으로 안 받아들이겠다는 걸 알겠어요. 자기를 러키가이로 생각 안 하는 태도, 자의식이 들어 있는 거 같거든요. 하지만 전업을 할 때마다 신인에서 다시 시작하고, 그런 게 다 드라마죠. 꼭 마지막에 추락이 있어야 하나요?
이창동 l 아니 내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잘 나가는 것같이 보이는데, 올라가본 적이 없어요. 그걸 못 믿는 거죠? 장관 맡기 전에 그런 고민은 했었어요. 장관이란 말, 벌써 하고 그만뒀는데도 아직도 어색해요. (웃음) 이게 내가 앞으로 뭘 하건, 글을 쓰건 영화를 만들건, 내 발언을 하는 데 있어선 상당한 장애가 되겠다. 그게 나한테 제일 큰 공포였어. 지금까지는 무슨 소리든 다 했단 말이에요. 근데 이제 내가 다른 것을 비판하기 힘들어지는 거죠. 그 고민은 정말 심각한 것이었고 그게 가능한 한 안 받고 싶었던 제일 큰 이유였어요. 그런 점에서 나한테, 내 내면에 깊은 변질이 가해졌죠. 그 정도예요. 비행기 탔냐 안 탔냐는 아닌 거 같아. 비행기 얘기 해볼까요? 내가 나이 마흔에 비행기를 처음 타봤거든요?
조선희 l 그게 언제인데요?
이창동 l 박광수 감독이 <이재수의 난> 헌팅 갈 때 제주도에 따라갔죠. ‘비행기 처음 탄다’ 그랬더니, 박광수가 ‘앞으로 많이 타게 될 거야’ 그랬어요. 농담처럼. 그 친구는 직관력이 있거든. 그래서 속으로 은근히 그 직관력이 맞기를 바랐지. 그래서 비행기 많이 타게 됐어요. 별거 아니에요. 문제는 내면의 풍경인데, 오히려 상처입거나 변질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하죠. 우리, 전에 북한산에 올라가면서 그런 얘길 했잖아요. 산에 오르기 전엔 산 정상에 있으면 대단한 게 있을 거 같지. 올라가봐, 대단한 거 없어. 올라가지 않은 사람들이 거기 대단한 게 있다고 생각하지.
조선희 l 그래도 좀 뭐 있지 않아요? 예전에 안 봤던 거.
이창동 l 있죠. 장관 정도 되면 상당한 고급정보 접하고 관리하고 그러죠. 또는 어떤, 굉장히 책임의 하중이 무거운 일을 한다든지. 그런 정도지. 그게 책상에 앉아서 글 쓰는 거나 큰 차이가 없어요.
조선희 l 장관 하고나서는 경험의 폭도 달라지고 하니까 작품세계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렇게들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게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닌 거 같아요. 약간의 우려, 그러면서 한편으론 약간의 기대도 있는 거거든요? 이 사람이 지금까진 철저히 비주류, 박탈당한 사람들 편에 서서, 주류에서 비껴난 시선을 갖고 있었는데, 앞으로 뭔가 세계가 달라져도 재밌지 않을까, 하고.
이창동 l 그런데 그 세계는 전혀 재미없더라고. 크게 영향을 주는 거 같지 않아요.
조선희 l 그런 경험에 일년을 투자할 정도는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요? 선배는 술 마셔도 취하지 않죠? 권력에 못 취하는 거 보면. 자기가 취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으니까.
이창동 l 술에는 안 취하지. 하지만 딴 것에 취하지. 감정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담배에 취하고.
조선희 l 감정에 취한 순간, 판타스틱한 경험, 근래에 그런 기억 있어요?
이창동 l 별로 없었던 거 같은데? … 얼마 전에, 모 여배우하고 모 남자배우하고 술을 먹었는데, 근데 노래방에서, 두 사람은 막 울고 있고, 나는 노래하고 있었다니까. 그러니까 잘 안 취하는 스타일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