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영화로 이어진 힘
조선희 l 무엇이 이창동 감독을 작가로 만들었을까요.
이창동 l 아, 이건 어려운 단답형 질문이다. 외로움 같아. 외로움. 십대 초반에 이미, 나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했거든. 그때 소설도 썼어요. <삼국지>도 썼고. 촉나라 오나라 위나라 그림도 그려가면서 내 나름대로 쓴 거예요. 누구한테 보여준 적은 없지만 내가 그 무엇과 통신하는 방법이야. 외로우니까, 현실하고 소통이 안 되니까 그랬던 거 같아요. 지금도 그 정서나 심리상태가 거의 변하지 않은 거 같아요.
조선희 l 소설 쓰다가, 아 이거 못해먹겠다 해서 딴 데로 간 게 또 다른 작가의 길이었잖아요.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소설로, 영화로 끌고 온 힘이 뭘까요.
이창동 l 글쎄요, 힘이 있었나? 그냥 흘러오다보니까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데. 조선희씨가 잘 알겠지만 그건 있었어요. 이른바 80년대에 내가 글을 썼잖아. 우린 20대 때엔 인문학적 감수성이었거든. 그런데 80년대는 인문학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였어요. 과학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예요. 나 개인으로는 글 쓰는 쾌감이랄까, 즐거움이랄까, 글에 대한 도취, 그런 게 문창 초기엔 굉장히 강했거든요. 근데 정작 작가가 되고부터는 그게 완전히 휘발돼버렸어요. 의무감만 남은 거예요. 자기검열을 하게 되고부터 글쓰기가 힘들어진 거죠. 벽에 머리를 찧으면서 고민은 하는데 정작 글은 쓰지 못하는. 그런데 90년대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고. 포스트모던이니 신세대, 이런 것들이 화두가 되었잖아요. 굉장히 허탈했지요. 우리가 고민했던 가치들이 유효기간을 지난 것도 아니고 한국사회가 그런 문제를 해결한 것도 아니야. 근데 갑자기 유통기한 지난 의제들처럼 되는 분위기였죠. 그래서 글쓰기가 싫어졌던 거야. 나 자신에 대한 것도 많았어요. 내가 지겨워졌다고 할까. 그러면서 핑계를 찾은 거죠. 글쓰지 않을 핑계를. 그러다 우연찮게 영화판까지 오게 됐죠. 그때 <그 섬에 가고 싶다> 촬영장에서 만났잖아. 그때 어떤 기자가 그렇게 썼는데, 꼭 수행자 같았다고. 실제로 그냥, 혼자 고생을 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영화를 하게 된 건 주변에서 떠밀어서 한 측면도 있어요. 나 혼자, 다른 영화감독 지망생처럼 시나리오 들고 왔다갔다하라 그랬으면 못했을 거예요.
조선희 l 처음에 시나리오만 쓸 생각이었어요?
이창동 l 시나리오도 아주 우연히 하게 됐죠. 박광수 감독이 전화해서 임철우 소설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영화화하고 싶은데 원작자를 만나게 해달라기에 만나게 하고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시나리오 한번 써볼래? 그래서 그러면, 나를 조감독으로 받아줄래? (웃음) 거래가 이루어진 거죠.
조선희 l 그런 우연이 없었다면 뭘 하고 있었을 거 같아요?
이창동 l 별 의지가 없었어요. 조감독 하면서도 연재소설 쓰고 있었거든. 밥벌이로. 가족들 데리고 파리로 가려고 했어요. 농담처럼. 장정일이 그렇게 떠났는데 실은 내가 먼저예요. 근데 농담을 계속하면 진짜가 되거든. 아파트 전세 놓고 전세금으로 1∼2년 파리에 가려 한 거예요. 왜 파리냐. 이유도 없어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의 파리, 그런 파리 있잖아. 그래서 박광수한테 상의를 했죠. 파리에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 백수로 지내면 생활비도 많이 들고, 학생 신분이 좋은데 뭐 공부할래? 영화공부가 좋겠다. 그럼 그러자. 그랬더니 박광수가 무작정 영화공부하러 가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영화에 대해서 뭘 알아야지 뭐가 공부가 되는지 알 거 아니냐. 충무로 경험을 해라, 그래서 이야기가 얽힌 거예요.
조선희 l 자신의 내부에는 어떤 실마리도 없었어요? 영화에 대한.
이창동 l 그렇지는 않죠. 한국사회의 변화하고 관련있는 이야기인데,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변화 중에 탈근대의 화두가 있잖아요? 그중 하나가 영화에 대한 거지. 실제로 근대의 중심은 활자거든. 활자의 의미, 관념 이게 근대를 지배했잖아. 근대를 끌고 왔지. 그런데 탈근대는 영상이 또 다른 어떤 세계를 구성하는 거야. 조선희씨가 <씨네21> 편집장을 한 것도 그렇지. 작가들도 모이면 영화얘기를 했어. 영화감독 하겠다는 친구들도 꽤 있었고. 난 상상도 못했어요. 그저 농담이었지. 근데 농담이 진담이 되어버린 거지. 소설에서 영화로 넘어가는 건너뛰기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그런 배경이 있었던 거예요. 돌이켜보면 그게 내 운명이었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릴 때 형 때문에 비록 지방도시였지만 연극을 늘 봐왔고 연극이란 장르는 나한테 굉장히 친숙하거든. 그리고 또 열몇살 때 이미 화가였고, 물감 살 돈이 없어서 포기했지만. (웃음) 그러그러한 씨앗들을 내가 품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흘러간 것처럼 느껴지지만 따지고보면 예정돼 있었던 거 같기도 해요.
조선희 l 93년에 <그 섬에 가고 싶다>가 나왔잖아요. 그리고 97년 <초록물고기>인데, 그때까지가 말하자면 영화감독으로서의 수업기라 볼 수 있는 거네요. 93년부터 4년 정도. 그 기간이 좀 지루하지 않으셨어요?
이창동 l 일단 수업기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떤 목표를 갖고 있어야 지루할 텐데 나한테는 목표의식이 없었어요. 꼭 해야지 하는 건 없었어요.
조선희 l 어쨌든 그러다가 <초록물고기>를 찍게 된 계기는 뭐죠? 낭트영화제를 보고 영화하기로 결심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창동 l 결심은 아니고, 베낭여행을 가다가 낭트에 들렀어요. 근데 굉장히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야. 그게 나한테는 놀라움이었어요. 보편성이라는 것에 대해 실감한 계기가 됐죠. 국경을 넘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는 문학보다 영화가 훨씬 쉬운 매체라는 걸 느꼈다는 뜻이에요. 문학은 오래 걸리잖아요. 번역의 문제도 있고, 또 세월의 무게, 시간의 무게를 이겨야 돼요. 영화처럼 금방금방 평가받지 않잖아요. 그게 조금은 영향을 줬을 거예요.
작가로서의 분열과 싸움
조선희 l 여하튼, 신인 시절에….
이창동 l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용해. (웃음)
조선희 l 어떤 기업인 전기를 써주다가 노트북 파일이 날아간 적 있었잖아요. 그게 언제였죠?
이창동 l 95년이었어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시나리오 쓰는 동안이었죠. 그건 거의 사고를 당한 충격이었어요. 왜 잃어버린 게 더 아깝잖아. 더 훌륭하고. 어떤 기업인 전기소설은 이미 다 썼던 거고 고료도 받았었고. 노트북에 있다 날아간 건 그때 작업하던 장편소설, 중편 등등이었죠.
조선희 l 제가 지금 신인작가잖아요. 근데 정말 신인작가라는 건 정신분열의 다른 이름인 거 같아요. 사회적 냉대, 시스템의 냉대에 시달리다보면, 끊임없이 내가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 그걸 사회에 납득시키기 전에 내 자신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책무가 있잖아요. 그 내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든 거 같아요. 또 내가 소설 쓸 재능은 없을지라도 이유는 있다는 걸 자신한테 납득시켜야 하는데, 가장 절망적일 때는 그 이유가 생각이 안 날 때예요. 선배는 그런 신인작가 시절을, 소설가로서, 영화감독으로서 무려 두번이나 했잖아요. 이 신인작가에게 뭔가 용기를 주는 얘기 해주실 거 없어요?
이창동 l 전혀 도움이 안 되지. 어떤 누구의 경험도 도움이 안 돼요. 혼자서 해결해야지. 절망을 좀더해야 해. 가혹하게 이야기하면, 절망을 아직 덜 했구먼.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설득한다고 했잖아. 무가치한 존재라는 걸 받아들여야 돼.
조선희 l 그것까지 받아들이고 나면 쓸 기력이 없잖아요.
이창동 l 절망을 하고 나면 할 일이 쓰는 거밖에 없게 돼요. 베스트셀러를 쓰려고 하니까 그렇지. 무인도에서 구원의 글귀 한 구절을 써가지고 병에 집어넣어서 코르크 마개를 닫고 바다에 던지는 심정이 돼야 해. 누구 하나라도 이걸 주워서 봐줬으면 좋겠다, 에서 시작하는 거 아닌가? 무인도에서 베스트셀러작가가 되는 걸, 이 체험을 수기로 써서 베스트셀러가 돼서 비단옷 입고 진주목걸이 하고 그런 거 상상하면 미치지.
조선희 l 신인작가가 자기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려다보면 조급해지잖아요. 그런데 <초록물고기>는 데뷔작으로서 그렇게 조급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건 뭘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이창동 l 무슨 이야긴지 정확히 이해하겠는데, 한 가지 납득이 안 되는 건, 지금 조선희씨 이야기 중에, 뭐라 그럴까, 세속적 잣대의 용어가 섞여 있어. 작가는 작가지, 신인작가라는 말은 없어. 그건 저널리즘 용어라고. 난 열두살에 이미 작가였다고. 그전엔 화가였고. 내가 글을 쓰면 이미 작가예요. 신인작가, 추천작가, 무슨 수상작가. 이건 그야말로 세속적인 거라고. 또 시스템으로부터의 냉대, 인정 이런 것들도 세속적 가치라고. 요즘 예술가를 찾기가 어렵다는 말들 하잖아요. 세속적인 가치가 아닌 자기 내적 충동, 내적 가치로 창작을 하는 예술가를 만나는 게 어렵다는 얘기 같아. 보면 알거든. 예술가의 폼을 내는지. 진짜 예술가인지. <초록물고기> 때? 말할 나위가 없죠. 그때 경험했던 냉대와 쪽팔림이라는 거. 나이도 사십이 넘어서. 그런 외로움은 내가 열두살 때 이면지에다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쓸 때나 큰 차이가 없거든. 그게 힘 아닌가. 영화 촬영할 때 어떤 장면 찍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와 이 장면 하나 몇만이다, 이런 얘길 덕담처럼 하는 경우 있어요. 그럼 난 즉각적으로 의심을 해요. 이거, 없애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보여지는 것엔 뭔가 위험한 요소가 있다는 거지. 소통 자체를 거부하는 건 아니에요. 교감하는 게 좋지. 그런데 그 방식이 중요한 거지.
조선희 l 자기 재능에 절망한 적은 없어요?
이창동 l 그걸 나에게 물어선 안 되지. 조선희씨 왜 절망하는데? 뭐 땜에 절망해? 스팀이 잘 안 들어와서 절망해, 볼펜이 잘 안 들어와서 절망해,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어서 절망해? (웃음) 결국은 자기 욕망과 그 욕망으로부터 동떨어진 재능과의 싸움이지. 피흘리는 싸움. 그게 운명이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군.
조선희 l 그런데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 절망과 싸움이 늘 반복되나요?
이창동 l 그렇지. 그럼 술술 나오나? 안나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