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1]
2004-12-21
정리 : 김혜리
정리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람들이 지도를 펴 드는 것은 대부분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다. 달리는 속도도 경치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일보다 여행에서 중요하지 않다. 2004년의 대단원을 맞은 <씨네21>도 그런 마음으로 세 편집위원을 한자리에 초대했다. 상반기를 결산하는 좌담 이후 6개월 만의 자리였다. 박스오피스와 국제영화제의 어마어마한 기록들이 부추기는 연말 자축연의 공기는 아랑곳없이, 이날의 주제어는 영화와 작가와 시장이 봉착한 ‘곤경’이었다. 가장 최근에 도착한 한국영화 <역도산>에 대한 소회로부터 거슬러올라간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정성일 영화평론가, 허문영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의 대화를 옮긴다. /편집자

<역도산>: 합작 영화에 대한 우려를 극복하다

정성일 l 가장 최근에 본 영화부터, 그러니까 엊그제 본 <역도산>부터 거꾸로 올라가면서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 한해 내내 사람들이 기다린 영화이고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한국영화가 정점에 올랐다고 하기 무섭게 300만명이 마의 선처럼 여겨질 만큼 침체에 빠진 산업적 관점에서도 <역도산>은 큰 관심이다. 한편으론 지속적으로 계속돼온 역사 속 인물 다루기라는 맥에서도 정점에 이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또한 <역도산>은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가 말한 필생의 프로젝트 3편 중 두 번째이고, 그래서 한국영화 시스템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차승재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할 텐데.

김소영 l 작은 이야기부터 하겠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영웅이 된 조선인 이야기라는 시나리오로 역산해보면 조선과 일본의 이분법을 벗어나 세계화로 풀어낸 기획이 탁월하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결국 스모 선수가 되지 못하고 미국에서 프로레슬러를 배워오는 궤적을 통해 동시대 우리의 강박인 민족, 지역, 세계화의 문제를 축으로 삼은 건 굉장히 훌륭하다. 블록버스터 문화가 결국 세트 문화이고 합작의 경우 세트의 뒤죽박죽된 시대성이 우려되는데 이 영화는 세트의 정교함 등에서 이제까지의 합작에 대한 우려점 혹은 오류는 없었다. 일본 배우들의 연기도 설득력 있었다. 놀랐던 건 관객 1천만을 흡수해야 환수될 만큼의 제작비 규모로 알고 있는데 대중에게 이야기거는 장치가 지나치게 절제돼 있다는 점이다. <역도산>은 링에 올라가는 순간에 <분노의 주먹>과 겨뤄야 한다. 어쨌든 그 영화에서 땀과 피가 튀는 최정점을 봤기 때문에. 그걸 넘어서든 다른 방식으로 가든 해야 할 텐데 <역도산>은 후자를 택한 듯하다. 소격효과를 쓰다시피 역도산의 다중적 인격과 교활함, 영웅본색을, 좋은 말로 하면 절제돼 있고, 나쁜 말로 하면 심금을 울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예컨대 칸노 회장의 후원을 받기 위해 거짓 사건을 벌이면서 일본 군가를 부르는 장면처럼 눈물을 흘릴 뻔한 사건들이 의아스러울 만큼 썰렁하게 처리됐다. 역도산이 불고기 먹는 장면도 먹는다는 행위의 특별한 감각성이 있어서 울컥하게 만들 수 있는데 지속시간도 짧고 대화 내용도 감정의 선을 울리는 것과 관계가 먼 방식으로 처리됐다. 역도산이 아내와 비서 앞에서 광기를 보이는 장면도 클로즈업숏이 아니라 투숏의 미디엄으로 찍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와 다르다는 설정은 알겠는데 10만∼20만을 안으려는 아트영화가 아니라 1천만을 겨누고 있다는 점에서 이건 이해가 안 갈 정도다.

허문영 l 두 가지 점에서 <역도산>을 기대했다. 차승재의 첫 필생의 역작 <유령>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했고, 남성캐릭터의 힘에 감동받았었다. <역도산>은 <유령>의 위험한 요소, 즉 국수주의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제작방식으로는 한·일 합작을 통해서, 내용상으로는 한국과 일본을 오간 민족주의의 틀 속으로 포섭이 잘 안 되는 인물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극복될 수 있을 듯했다. 또 하나는 차승재 영화의 가장 중심되는 주제가 곤경에 빠진 남성이 자기 육체로 그 곤경을 헤쳐나가는 것인데 모든 면에서 <역도산>만큼 차승재 영화의 전형성을 잘 드러내주는 영화가 없다. 캐릭터의 완성도에서 차승재 영화의 정점을 보여줄 수도 있을 듯했다. 더불어 송해성 감독이 <파이란>에서 내팽개쳐진 남자의 이야기를 감성적으로 잘 그렸다는 점에서 거의 완벽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난 소감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고, 김 선생의 견해에 상당부분 공감한다. 왜 이 영화를 확실한 남자의 이야기로 끌고 가지 않았나 하는 불만이 있다. 물론 실존했던 인물이고 사실을 그려내야한다는 강박이 있겠으나 역도산의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기보다 21세기에 재해석된 인물로서의 역도산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미스터리도 여전히 있고. 도전적으로 창의적으로 해석해도 좋았는데 사실에 상당히 얽매여 있다. 절도 사건을 조작할 만큼 승리에 집착한 인물이었다면 자기 육체에 대한 믿음, 그리고 승리에 대한 강박증을 내면적으로 더 파고 가야 하는데 외면의 궤적 중심으로 그려지면서 이 인물의 내면을 보여줄 때마다 편집이 끊긴다. 그건 절제라기보다 내면의 불충분한 묘사가 아닌가 싶다. 또 민족주의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혹은 지역성, 세계성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모호한 태도라서 불만스럽다. 자기 입으로 조선이고 일본이고 중요하지 않고 내가 남자로 승리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애매한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가 있고, 또 그것에 대한 애매한 탈피의 모습이 있다. 만든 이들의 불충분한 해석이 있는 듯하고, 나아가 한국영화에서 민족주의의 감성에서 벗어난 남성 영웅을 그릴 때의 난관이 아직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웰메이드 블럭버스터가 인물에 매달리는 이유

정성일 l 직관적으로만 말하면 <역도산>은, 20자평으로, 실망스러웠다. 이건 결론이 아니고 위험한 가설일 수 있고 그래서 도움을 구하고자 던지는 이야기인데 지금 한국영화가 웰메이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블록버스터영화를 만들며, 김소영 선생이 6개월 전에 지적한 대로 스튜디오 시스템을 세트 안에서 만들려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그 지적을 들은 이후 그 목표가 과거 영화사 속에서 어떻게 귀결되었는가를 생각했다. 이건 할리우드 모델을 이식해서 성공하려는 산업적 욕망일 텐데 웰메이드 블록버스터를 만들려고 하는 이들이 일제히 인물에 매달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효자동 이발사>, <슈퍼스타 감사용>, 역도산과 동시대를 살았던 <바람의 파이터>, 그리고 내년에는 <청연>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영화들을 보면서 이들이 최고가 되면 어떤 영화가 될까 생각하다가 난데없이 <시민 케인>이 떠올랐다. 영화의 완성도나 미학적 문제를 제쳐두면 결국 <시민 케인>으로 가고 있는 이 모습에서 한국영화가 다다른 단계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블록버스터의 대척점에 디지털영화가 있다. <마이 제너레이션>처럼 저예산으로, 연기를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을 데리고 거리를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의 참담함을 보여주려는 노력을 수많은 디지털영화에서 보면서 한국 디지털영화의 정신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 아닌가 싶었다. 결국 <시민 케인>이라는 제도권의 궁극의 모델, 그리고 디지털영화가 안고 있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보면서 영화사적으로 한국영화가 이제 비로소 모던한 영화로 진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슬아슬한 생각을 해봤다.

김소영 l 즉각적인 비판을 한다면, 세계 영화사에 한국영화를 위치시키고 나서 서구 중심적인 연관 속에 다시 배열하는 역사기술의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또, 한국 영화사에 이미 유사한 순간이 있었다. 차승재의 움직임은 한·홍 합작과 스튜디오 시스템, <백사부인>에서 특수효과를 시도하며 60년대에 나름대로 지역화와 세계화를 꾀한 신상옥 감독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세계 영화사보다는 한국 영화사에서 거울 이미지가 있고, 그것이 반드시 발전의 개념은 아니다. 이 두 가지 비판을 제외하면 ‘시민 케인’의 문제는 흥미롭다. <시민 케인>은 미국적인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가 가지고 있는 복합성을 굉장히 정교하게 탐사한 영화인데 이런 점으로 봐서는 이 영화들의 인물탐사가 그것과 등가할 만한 것이 뭐가 있는가 싶기도 하고.

정성일 l <역도산>을 보면서 신기한 건 일본어로 진행되다 불현듯 한국말로 ‘나는 일본이고 조선이고 그런 거 신경 안 써’라는 요지로 말하는데 거기서 괄호쳐진 게 남한이었다. 사실상 <역도산>은 남한 사람들이 봐야 할 이유가 없는 영화였다. 내셔널시네마로는 완전히 괄호쳐진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차승재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남한에서 나가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민족주의이지만 이상한 민족주의다. <유령> <무사> <화산고>가 그랬다. <화산고>는 일본어로 더빙해서 유럽 관객에게 보여주면 한국영화라는 근거가 없어지는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도산>이 남성영웅신화라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민족주의적 호소는 없는 듯하다.

허문영 l <바람의 파이터> 같은 치기어린 감상적 민족주의의 잔재는 없고, 그것과 결별하려는 애타는 노력이 확실하게 보인다. 그건 진전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걸 벗어던지고 나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충분히 해석하지 못했다는 거다.

정성일 l 그걸 슬픔으로 찍은 게 <역도산>이라면, 그걸 우습게 표현한 게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다. <내 여자친구…>에서 내셔널시네마라는 아이덴티티의 철저한 부정이 보인다는 점에서 <역도산>과 연결된다.

차승재 영화의 지향점은 어디인가

김소영 l <유령> <무사> <역도산>까지 놓고보면 생각할 공간이 있다. <유령>은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중적 목소리로 하려고 했던 듯하다. 정우성이란 캐릭터를 통해서. 재밌는 장면이 정우성이 아버지를 플래시백으로 회상하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나오면서 부모의 성교장면을 훔쳐보는 아이의 시선 같은 느낌을 준다. 거기에 굉장한 살부적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렇게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데 그 비판이 굉장히 모호하고, 그 다음에 살 수 있는 상상력도 모호하다. 그래서 자폭하는 결말로 나아간다. <무사>에서 가장 납득할 수 없는 건 그들이 왜 굳이 돌아오려고 하는가였다. 그렇게 남한 관객에게 이 영화를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듯하다. 흥미롭게도 <역도산>에서 남한 관객에게 말거는 장치는 설경구라는 배우 말고는 없는데 사실 설경구는 사람들이 ‘즐겁게’ 보러가는 배우는 아니다. 강동원은 아니니까. (웃음) <유령>이 어머니라는 모국의 정박점이 있고, <무사>에선 돌아오려는 게 억지로 느껴질 만큼 무국적적이라면 <역도산>에선 남한이라는 관객 대상이 계산돼 있지 않다. 이 영화에는 민족주의 이후를 생각하는 상상적 공간이나 사유적 능력이 없다. 긍정적인 건 자본에 접근 가능한 자리가 남아 있다는 거다. 칸노 회장이 거의 시민 케인 같은 사람이고.

허문영 l 역도산보다는 칸노라는 인물이 훨씬 더 잘 잡힌다. 역도산에는 모든 사소한, 시시껄렁한 담론을 뛰어넘으려는 초월적 영웅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문제는 갈망이 있으나 초월성 자체는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성일 l 지금 역사 속 인물을 다루는 한국영화에서 나타나는 공통점 중 하나가 아들 콤플렉스인 것 같다. <역도산>에서 어머니를 떠올리는 순간이나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어머니에게 애정을 바치는 모습,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월적 존재가 되려면 아버지를 밟고 넘어가야 하는데, 없애버리고 괄호치고 가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대신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자리를 갖다놓아서 초월적 존재로 올라설 계단을 아예 치워버리는 게 아닌가, 그래서 자꾸 회귀적 인물, 퇴행적 인물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것이 우리 시대 대중이 원하는 영웅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가장 심각한 의미로 우리 시대에 불현듯 돌아온 박근혜의 회귀와 그리 먼 것 같지 않다. 그가 정치담론의 맨 윗자리에 있다는 게 한편 이들 영화의 지향점과 멀리 있지 않은 듯하다.

허문영 l 말씀하신 대로 한국의 대중영화에서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자리가 애매하거나 지워져 있고 어머니는 항상 회귀의 판타지와 결부돼 나타난다. <역도산>이 다른 대중영화와 다른 점은 적어도 여기선 어머니라는 판타지와의 긴장이 있다고 느껴진다. 그 긴장이 내러티브 전체에서 계속되지는 않지만 , 항상 감정적 고조가 필요할 때마다 인위적으로 끌어들이며 판타지를 맘껏 사용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의 판타지에 대한 긴장을 끌어들인다.

김소영 l 그것이 이 영화가 시원적인, 만능적 어머니상과 연결된 민족주의와 틈을 갖고 있는 점인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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