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2]
2004-12-21
정리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정리 : 김혜리

김기덕 영화의 진화를 말한다

정성일 l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산업적으로 대중적으로 가장 기대된 영화가 <역도산>이라면, 올해의 감독은 누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걸로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김소영 l 한국영화에서 여자를 때리는 폭력적 남성은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부분적 현상이었지만, 일관된 주제는 주변화된 남성성이었고 그게 힘없는 아버지로, 또 그를 바라보는 아들로 나타났다. 문제는 주변화된 남성성이 자기 연민과 자기 구원을 위해 여성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게 한국 문화의 장치라는 점이다. 그 정점이 <서편제>였다. 여자의 눈, 딸의 눈을 멀게 하고 거기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는 장면이 민족적 미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 생긴 관심이 주변적 남성성이 여성을 학대, 착취하지 않고 어떻게 주체성을 확보해나가느냐였다. 액션영화에 대한 관심도 여기에 있었다. 남성성의 곤경이기도 하고 젠더의 곤경이기도 한 봉쇄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는가. 그걸 트라우마라고 본다면 김기덕의 <나쁜 남자>는 젠더 트라우마의 문제를 극점에서 보여줬고, 그게 한국영화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트라우마 같아서 그 이후 김기덕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좌담을 위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보고 굉장히 감동받았다. 특히 <빈 집>은 주변화된 남성성의 문제를 여성을 착취, 학대하지 않고 돌파한 영화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영화사적으로가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돌파했다. 홍콩의 액션영화에는 항상 사부에게 훈련받는 장면이 있는데 한국 액션에선 훈련장면이 없다. 말하자면 액션은 없고 리액션만 있는 셈이다. 그런데 <빈 집>의 주인공은 감옥에서 자기 연마를 한 뒤 그림자 훈련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그림자까지 또 감추는 이중의 훈련을 한다. 이건 인식론적으로 굉장한 성취다.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았다는 건 여자의 어법이었는데 <빈 집>에서 그림자로 살면서 자기 그림자를 또 감추는 남자의 삶이라는 건 굉장한 알레고리이고 어떤 개념을 돌파하는 것이다. <나쁜 남자>의 극악무도함에서 정진해 누구의 그림자로 사는 게 아니라 그 그림자로 자기의 다른 삶을 만들어낸다는 것. 공허한 남성성의 성기로 환원되거나 성녀로 환원되는 게 아니라. 김기덕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게 너무나 좋았을 정도다. 한국영화의 중요한 토픽인 상처받은 남성이 어떻게 정진해서 다른 주체가 되는가를 보여준 <빈 집>의 상상의 공간은 개념적 세계의 최고봉이라고 봤다.

허문영 l 그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그전까지는 김기덕 영화가 꽝이었고 이번에 기적적으로 정진하는 영화라는 평가다. <빈 집>을 봤을 때 오히려 데뷔작 <악어>처럼 김기덕의 초기로 돌아가 더 풍부해진 게 아닐까 싶었다. 김기덕 영화는 주변화된 남성이 주변 세계에서 생존하는 방식의 이야기인데 놀라웠던 건 그의 인물이 개념적으로 포섭되는 패턴의 남성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들은 아웃사이더, 하층민, 십대 청춘 등 사회학적으로 포섭되는 마이너리티가 아닌 영혼 자체가 세계의 질서와 기본적으로 어울릴 수 없는 색깔의 사람이다. 끊임없이 세상에 나아가서 잘될 수 있을 거라고, 돈을 벌거나 좋은 여자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어처구니없는 희망을 가지고 있고, 그 희망은 지속적으로 실패한다. <악어>에서 <빈 집>에 이르기까지 김기덕의 영화는 많은 여행을 했다. 다리 아래에서 다리 위로 올라와 여행을 하다가 그 여행이 실패했다고 느낀 <악어>의 주인공이 다시 다리 아래로 내려와 자살하려고 했던 그 여인을 다시 만났다고 할까. <악어>에선 그 여자를 착취하는 방법밖에 모르지만 <빈 집>에서 그녀가 비로소 자기와 같은 처지의 인간이라는 걸 느끼고 공존하려는 걸 깨닫는다.

<빈 집>은 한국영화사에서 매우 희귀한 순간

김소영 l 여성관객으로서 김기덕의 <나쁜 남자>가 극단적으로 트라우마와 마주치게 하니까 목불인견의 분노를 느꼈었다. 페미니스트 평론가로 그를 분석하지 않은 건 너무나 예측 가능한 것에 대한 비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내 연구의 작은 길이 김기덕 영화에서 해결됐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근대사의 젠더체계의 문제에서 글로 쓰고 싶더라.

정성일 l <빈 집>을 보면서 주인공이 그림자 훈련을 시작할 때 이제부터가 진짜구나 느꼈다. 매혹적인데 왜 이게 매혹적인지는 잘 몰랐는데 액션영화의 트레이닝에 대한 김 선생의 말씀이 놀라운 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난 김기덕 영화의 기본적인 정서는 멜로드라마라는 생각을 줄기차게 해왔다. 이것이 홍상수와 가장 다른 점이다. 멜로는 멜로인데 김기덕의 하소연은 매우 간단한 거다. 날 좀 죽여주세요다. 김기덕 영화에 지속적으로 반복된 제일 큰 힘은 소멸의 의지, 자멸의 의지다. 내가 생각하는 연속성은 그의 영화에서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는 대사다. <봄 여름…>에서 가장 놀라운 건, 미숙한 감독에게는 가장 힘든 장면과 편집만으로 버티는 일을 20분 지점까지 해냈다는 것이었다. <사마리아>는 2/3 까지는 미쳤나 싶었다. 그런데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말없는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 이 영화가 진짜로 시작되는구나 싶더라. 대사가 사라진 걸 보고 이 사람이 더이상 우릴 설득하려 들지 않는구나,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빈 집>에 와선 단 두 마디를 하는 여자와 아예 침묵하는 남자를 통해서 구체적 세상과 떨어져나온 그러나 바로 그 곁에 있는 자기의 버추얼 월드로 넘어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김기덕이라는 연출자를 사회가 고립시켜가는 것에 대한 대응으로 보여서 무척 슬펐다. 또, 김기덕이 소통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싶었다.

김소영 l <빈 집>이나 <나쁜 남자>를 보면 성과 계급의 위계가 섞여 있다. 여자는 부자이나 성적으로 하위다. 남자는 가난하지만 성적으로는 주도자다. <빈 집>의 여자도 굉장히 부자로 살고 있는데 친정을 위해 남자와 살아야 하는 처지다. “집 나간 동안 친정에 돈 보내줬다”고 하지 않나. 막 구르다가도 도를 깨치는 것도 하층 남성이지만 이건 남성으로서 특권이다. 여자는 길 밖에 나가면 끝이다. 그렇다고 남자라고 누구나 그런 성취를 이루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빈 집>은 한국영화에서 굉장히 희귀한 순간이었다. 악순환에도 빠져들지 않고.

정성일 l 김기덕이라는 존재를 굉장히 도식적으로 설명하겠다. 그의 존재는 우파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싫은 사람이다. 교양도 없고 제도도 따르지 못했고 자기 계급에 걸맞은 노동도 하지 않고 예술을 하고 있고. 좌파 이데올로기도 그 존재를 무시해버렸다. 그런 존재가 마치 안 보인다는 듯이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즉 양쪽 어디에도 설 수 없는 존재가 한국에서는 종교에 귀의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이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사회를 변혁할 수도 없고 날 좀 받아달라고 호소할 수도 없으니 영화를 통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종교 담론에의 귀의로 되는 순간. 그래서 난 이 사람의 영화가 한편으로는 지식인들에게 맹렬한 반성을 촉구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필요한 건 공격이 아니라 위로이고 포옹이다. 그래서 이 에너지를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며 함께 토론할 수 있는 담론으로 끌어가야 할 텐데, 계속 침묵으로 밀어가고 있다. 그는 제스처를 통해서 계속 소멸을 이야기한다.

김소영 l 아니, <빈 집>에선 더 나아간다. 그림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과 공존할 수 있게 하는 형상을 발견한 거다. 어찌 보면 김기덕의 경우는 역도산의 삶과도 비교할 수 있는데 세계화가 없었으면 그러니까 영화제와 유럽의 호평이 없었으면 그는 한국사회에서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한편으로 이 사람은 김기영 감독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비평의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 같다. 그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빈집 같은 것을. 유럽에서는 그의 성취가 오리엔탈리즘이나 원시적 열정 같은 것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더욱.

허문영 l 그러나 김기덕이 지금 지식인, 평론계에서 거부된다고는 할 수 없다. 딱 까놓고 얘기해서 한국에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사람에 대해서 쉽게 보진 않는다. 최근 미디어에서 다뤄진 양만 봐도 임권택, 홍상수 못지않다. 그래서 지금 그를 사회계급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시기가 조금 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대사가 점점 없어지고 스스로를 좀더 많이 지워나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게 더 유용하지 않을까. <나쁜 남자> <해안선> <사마리아>에서 어쨌건 사회적 관계로 편입된 인물의 분투였는데 <빈 집>에 와서는 그림자의 삶이 된다. 처음부터 없는 존재였고 나중엔 자기 그림자마저 지워버린다. 그것은 제가 보기엔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한데 김 선생 말씀대로 그림자조차 지워버리면서도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와 공존 방법을 찾은 것도 있고 그림자마저 지우는 것 외에는 어떤 존재방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비통한 고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자칫하면 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빈 집>은 개념적으로 완벽한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준까지 나아가고 나면 그 다음에 과연 어떤 얘기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김기덕은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김소영 l 맞다. 그러면서도 절망스럽지 않은 것은 형사가 딸을 위해서 돌에다 노란 페인트 칠을 하는 장면에서다. <봄 여름…>에서도 그림 그리고 문자 새기는 식으로 노동이 창작이 되는 과정이 영화에 그대로 드러난다. 세상에 대한 그런 보시의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안토니오니가 <붉은 사막>에서 배경을 빨갛게 칠한 것과 다르다. 김기덕의 노란 돌은 배경이 아니라 쓸모있는 운전연습장이 된다. 김기덕의 그런 세계가 앞으로 더 펼쳐지지 않을까. <빈 집>에서 열쇠를 따고 체중계를 고치고 하는 그런 거. 여기에 비해 <마이 제너레이션> 같은 디지털 장편은 일상은 디지털카메라로 보고 있지만 그것을 변형시킬 어떤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 너무 인색하다. 생산방식도 저예산이지만 마음도 저예산이다. (웃음)

허문영 l 김기덕은 한국영화 컨텍스트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인물이다. 그가 가진 탈지역성, 탈국적성이 보편적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충격적인 것은 관객이 김기덕으로부터 떠나고 있다는 거다. <나쁜 남자>를 70만명이 봤는데 <빈 집>은 3만명도 안 들었다. 베니스에서 감독상도 탔고 광고예산도 많이 썼는데 왜 보지 않는가. 김기덕이 느끼는 고립감은 한국 지식인 사회로부터라기보다 한국 관객과 소통이 가능할 것인가에서가 아닐까. 나의 삶이 더이상 한국사회에서 대중적 소통이 불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김소영 l 그렇다면 차이밍량 같은?

허문영 l 차이밍량은 자기가 표 팔고 지방 배급업자들에게 잡초 같은 놈이라는 말까지 듣는데 아직 그런 단계까지는 안 갔다고 보지만,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긴 했다. <빈 집>처럼 순수하게 재미있는 영화가, 탄탄하고 빈틈이 없는 영화가, 많이 알려진 영화가 외면당하는구나. 도대체 감독들이 무슨 영화를 만들란 말인가. <하류인생>도 그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그보다 나았지만, 전반적으로 한국 관객이 작가주의와 점점 멀어지고 있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있다. 재미로 치면 <하류인생>과 <취화선> 중에 뭐가 재미있는가. 2년 전 <취화선>은 70만, 80만명이 봤는데 <하류인생>이 17만명인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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