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3]
2004-12-21
정리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정리 : 김혜리

박찬욱, 혼란스런 작가주의의 좌표

정성일 l 한국영화의 작가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중의적인 의미로 김기덕과 연관지어서 표현하자면 김기덕이 있기 때문에 홍상수가 덜 외롭고 박찬욱이 자기 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다. 올해 단편영화를 심사하고, 영화아카데미 입학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느낀 건 박찬욱의 영향력이었다. 많은 차세대 영화지망생들이 박찬욱의 자장권 안에서 장면을 카피하고 영감을 받고 있다. 작가주의 담론을 논하기 위해선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 옆에 그를 놓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칸이 주는 상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올드보이>는 공감하기 힘든 영화였다. 그냥 재미있는 상업영화였다. 그것도 많은 결함을 갖고 있는. 그런데 이제 그 영화가 많은 비평담론들에서 예술적으로 나아갈 좌표처럼 이야기되고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영화처럼 이야기될 때 대중성과 B급영화들이 가져야 할 자리와 예술성의 문제가 혼돈스러운 자리로 떨어져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 문제를 정리하지 않는다면 난 이 담론이 웰메이드를 만들려는 제작자의 욕망과 뒤엉키면서 사실상 작가의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많은 시도들을 어렵게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김소영 l 작가영화라는 배열로 홍상수, 김기덕을 갖고 있을 때는 <귀여워> <여자, 정혜>라는 영화들이 창백해 보이지 않는다. 그 집합에 가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기 세계를 가꿀 수 있는 영화로 보인다. <올드보이>는 무정부적인 <복수는 나의 것>이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기에 지그재그로 전략을 짜는 영화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가치가 더 있는 영화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판을 다시 짜면서 다른 영화를 창백하게 보이게 하는 것은 문제고 최근 젊은 감독들이 제출하는 시나리오에서 누구나 박찬욱의 상상력을 좇아가려는 상황은 우려할 만하다. B급 상상력은 카피하는 순간 F급으로 떨어진다. 자본과 만났을 때 가장 안 좋은 결과가 <쓰리 몬스터>의 에피소드다. 세트는 럭셔리로 지어놓고 들어와서 계급을 말하는 건 파탄, 재앙인 것 같다. 굉장한 돈을 갖고 정치도 말하고 B급적인 드라큘라도 만들 수 있고….

허문영 l 개인적으로 박찬욱이라는 한 감독이 보여주는 영화의 행로는 나름대로 흥미롭다. 한국영화에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패턴이 있다. 주류영화와 비주류 예술영화로 쉽게 양분시켜 볼 수 있는데 한국에는 유난히 이 양쪽에 포함되지 않는 한국적 장르의 길이 있다. 그 대표자가 차승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영화 르네상스라고 말할 때 주력군이 제3의 길에 속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김성수, 봉준호, 박찬욱 등이 지속적으로 작품 자체에 관한 비평적 주목과 함게 대중의 호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면 국내외적으로 동시에 이만큼 주목받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지금 시점에 이르러서는 제3의 한국적 장르의 길이 지나치게 다른 담론, 다른 길을 왜소하게 만들거나 흡수하고 있기 때문에 우려스럽다. 차승재는 영화를 만들 때 작품상 받는 데 관심없고 의미있는 영화를 만들어 소통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 노선으로 만들던 사람들이 비평적 찬사까지 걸머지면서 일정한 수 이하의 관객과 내밀한 소통을 이뤘던 작가주의 비주류 감독들이 설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더불어 그것들이 공존을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지금은 영화학도들에게조차도 그것이 감독이 되는 가장 스탠더드한 길인 것처럼 보인다. 어디서나 제3의 길이 최상의 길인 것처럼 얘기되는. 최근 영화제의 상을 독식하는 현상은 지금까지 비교적 잘 이뤄져왔던 세 길의 공존과 균형을 무너뜨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걱정이 된다. 그 점에서는 비평계의 게으름이 굉장히 문제다. 각각의 영화들이 놓인 자리를 명료히 밝혀내고 그것이 어디쯤에 위치한 영화인지를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소영 l 평론가가 박스오피스랑 동일한 행보를 걷는 건 확실히 게으른 것이다.

정성일 l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한국영화의 미학적 판단기준이 되는 순간 또 하나의 아쉬움은 <하류인생> 같은 영화는 정말 설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미 임권택의 영화세계는 저예산으로 찍을 수 없는 스튜디오 시스템을 요구하고, 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인물과 시간이 만나게 하는 요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을 받아들일 비평담론들조차도 거기에 외면하고 눈멀어 있다.

홍상수, 상승일로의 매너리즘

허문영 l 한국 영화계가 한번도 안정적으로 보인 적은 없다. 늘 불안하다가 불쑥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고 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거쳐왔는데, 지금이 가장 불안정한 시기 같다. <하류인생>이란 영화가 가진 몇 가지 텍스트적인 결함여부를 떠나서 한 노장감독이 보여준 중요한 여정의 일부- 그 나이에 새롭게 서론을 쓰려는 도박이자 모험인- 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한국 영화산업이 이 거장의 행로를 포용할 수 있는지 굉장히 불안하다. 이런 감독의 이런 미학적 여정을 표현할 수 없다면 그건 한국 영화계의 큰 결함이다.

정성일 l 사실 이 과정에서 굉장히 이상한 자리에 서버린 건 홍상수가 아닌가 싶다. 셋 중에서 홍상수에게 가장 큰 공감을 갖고 있고 곁에서 근심을 가진 허문영씨의 생각이 궁금하다.

허문영 l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자체에 대해선 덧붙일 말이 따로 없고, 지속적으로 홍 감독이 데뷔작을 만들 때부터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다’라는 것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드러날까, 그것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제일 궁금했다. 기묘하게도 그의 영화에는 탁월한 미학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잘 보이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의 경우, 자기 제작사를 차려서 프로덕션을 진행하는 등 홍 감독으로선 실험적인 방식을 택했고 또 극장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대답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김소영 l 신인감독들의 작품이 많이 나오는데 96년에 홍상수의 데뷔작을 능가할 만한 영화를 찾기 어렵다는 측면에서도 계속 기대하게 하는 것 같다. 근데 김기덕과 달리 홍상수는 발견 이후 계속 상승세를 탔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추락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너리즘의 미학 속으로 빠져든다는 느낌이다. 사람들의 매너에 대한 영화이면서 매너리즘에 대한 영화. 홍상수는 신화적으로 보면 일종의 상승의 영웅인데 그 사람이 계속 추락을 이야기하다보니까 긴장감이 없는 듯하다. 추락하지 못하는 삶 속에서 추락을 이야기하는 것이.

한국영화는 왜 소년의 성장담인가?

정성일 l 성장담 영화로 들어가보자. 허문영씨가 <씨네21>에 한국 영화사를 소년의 성장사로 바라본 글을 썼는데 갑자기 그 문제를 던진 이유가 있을 듯한데.

허문영 l 한국 관객이 좋아하는 대중영화와 보통 국제적으로 관객이 좋아하는 대중영화가 너무 다르다는 데서 출발한 거였다. 생각해보니 답이 단순하더라. 일반적으로 대중영화의 영웅은 그가 어른이든 소년이든 어른의 역할을 짊어진 자, 문제해결의 사명을 짊어진 자들의 이야기였는데 한국에선 주인공들이 짐을 짊어지지 않는다. 자기의 처지를 고통스러워하면서 유사형제, 유사가족을 찾아다닌다. 공동체의 짐을 짊어진 본래 의미의 영웅은 없고 소년들의 울부짖음만 많이 들려왔다. 도대체 이게 어디서 온 걸까, 어떻게 패턴화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그 글을 쓴 이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연령대로 봐서는 나이가 올라갔는데, <바람의 파이터> <역도산> <효자동 이발사> 등, 여전히 공동체와는 절연된 상태에서 단독자로서의 고뇌에 빠져 있다. 한국 장르영화는 이런 면에서 인디영화의 감수성에 좀더 가까이 있다. 한국 영화계가 지속적으로 소년의 울부짖음을 소재화하다가 올해 들어와 발견한 출구가 역사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 남성을 끌어들인 건데 새롭게 소년의 울부짖음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는 일부 소녀 성장담을 빼놓고는 남성 액션영화, 단독자로서 생존하고 승리하는 패턴의 액션영화가 아닌가 한다.

김소영 l 다른 스펙트럼의 이야기를 하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는 소년들의 곤경이 아니라 소녀가 작가이면서 수많은 팬을 거느린 인터넷 소녀가 나타났는데.

정성일 l 인터넷에는 소년작가는 없고 신기하게도 다 소녀작가인데, 공통점은 공주병이다. 올해 네편의 소녀작가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영화도 흥행도 다 실패했다. <늑대의 유혹>의 관객은 사실 강동원을 보러간 것이고. 인터넷 독자, 소녀, 영화관객의 교집합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소영 l 허문영씨의 글에서 인상적인 건 <태극기…>가 결국 소년의 시점으로 끝난다는 것, 어른들이 전쟁를 하는 데 그걸 끝내는 건 소년들이라는 것이었다.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 권상우와 한가인은 똑같이 소년, 소녀로 지내다가 소녀는 얼른 가출하고 어른이 되는 데 비해 소년은 여전히 어리벙벙한 채 남아 있다. 그런데 소년들의 성장담으로 한국 영화사를 읽는 불편함은 소년과 남성을 이야기할 때 이런 식이어서 다른 상상과 글쓰기를 막을 수도 있다는 거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칭찬한 게 소년의 성장담으로 보이면서도 어느 정도 공생의 이야기여서다. <말죽거리…>처럼 소녀만 빨리 늙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대로이면서 비슷한 행보를 겪고 나중에 공존하는 방식으로.

허문영 l <아라한…>도 어떤 곤경의 산물이라는 생각이다. 성장을 하기 위해서 공동체와 만나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소년들이 공동체와 만날 수 있는 영화적 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한국영화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공동체가 이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무조건 서술하는 것으로 영화가 되지는 않으니까. 액션이라면 그걸 어떤 영화적 도상으로 끌여들여야 하는데 아직 그런 게 없다. <아라한…>의 경우는 그 길을 전승무예라고 하는 요소를 끌어들여 찾아낸다. 거기서 액션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써 주인공이 세상과 만나는 길을 열어주는. 타이의 <옹박>이 아주 중요한 영화로 느껴진 게 한국보다 영화적으로 후진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장르적으로는 훨씬 더 정상에 가까운 완성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옹박>은 현존하는 자기의 민속적 도상을 영화적 도상으로 바로 끌어들여 공동체의 문제와 통하는 길을 발견한다. 무에타이는 개인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무예일 뿐 아니라 공동선으로 나아가는 정신적 당위가 드리워져 있다. 그러면서 이 인물은 공동체의 영웅이 되고 안정적인 내러티브가 짜여진다.

김소영 l <옹박>과의 비교는 적절하다. <아라한…>에서 징후적인 건 수련을 하는데 다 못한 상태에서 싸움터으로 끌려나간다는 거다. 본인도 수련이 다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아는데 나가서 싸워야 한다. 미국영화의 액션은 재난을 만들어내는 게 목표인데 <옹박>에서는 시장에서 사람들의 일상을 다치지 않게 피해나가면서 최고의 무예를 증명해내는 장면이 감동적이었다. 반면 <아라한…>에선 미처 수련을 끝내기도 전에 끌려나간다. <아라한…>의 소년은 시라소니나 김두한이 식민지 시대의 거리에서 파이터가 된 이래 두 번째 영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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