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이것이 코미디다! <뜨거운 것이 좋아>
2000-03-28
글 : 육상효 (영화감독)

코미디란 무엇인가. 나의 미국행 화두는 이런 것이었다. 수오 마사유키의 <함께 춤추실까요>나 작가 리처드 커티스의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등의 영국 코미디, 혹은 리안의 데뷔작 <결혼피로연> 등에 달아오른, 한번도 장편영화을 만들어보지 못한 감독 지망생의 경쟁심에 미국행은 크게 기인했다. 우리도 우리식의 우아한 코미디를 만들어볼 수 없을까라는 고민의 시작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쯤 거의 나당연합군을 물리치러 황산벌에 나가던 계백의 그것처럼 내딴에는 거의 역사적 사명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미국에 와서도 아무도 코미디는 이것이다라고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른다섯이라는 나이에 누구에게 크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기대는 없었으나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누군가 던져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업시간마다 서툰 영어로 훌륭한 코미디를 만드는 게 꿈이다라고 아주장해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았다. 공부가 고독한 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학교도서관과 마을도서관, 그리고 이런저런 비디오가게를 찾아다니며 나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가 별게 있겠는가. 코미디를 보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비교우위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채플린은 한국에서도 많이 봤고, 버스터 키튼과 해럴드 로이드는 신나는 발견이었다. 자크 타티의 예술적 코미디에 막스 브러더스나 보브 호프의 초기 코미디, 그리고 프레스톤 스터지스의 사회적 코미디까지 섭렵했다. 그래도 코미디가 뭔지는 확실하게 잡히지 않았다.

그런 코미디 관람의 거의 마지막 선택이 <뜨거운 것이 좋아>였다. 한국에서도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한번 본 적이 있던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냥 평범한 대중 코미디였다. 아마 마을도서관에서 그때 더이상 볼 코미디 영화가 남아 있지 않았을 거다. 무심히, 아주 무심히 그냥 비디오데크에 걸었던 이 영화는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캘리포니아의 기나긴 여름이 이 영화를 보면서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적어도 그때 이 영화 속에는 내가 코미디에 대해 고민하던 모든 것들의 해답이 있었다. 코미디 영화의 구조, 코믹 캐릭터가 어떻게 리얼리티와 관계하는가. 한 장면 안에서의 코미디적 긴장, 코믹 효과의 극대치를 위해서 영화적 정보를 조정하는 방법, 그리고 유기적(Organic) 연출과 코미디와의 관계, 익살을 잃지 않으면서도 우아할 수 있는 대사, 그리고 그것과 긴장하는 시각적 코미디.

빌리 와일더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그때까지 내게 <선셋대로> <이중배상>을 만든 필름누아르 감독의 이름이었다. 그해의 나머지는 빌리 와일더의 영화를 보는 것에 바쳐졌다. 심지어 학교수업도 빼먹어가면서. <아파트먼트> <포춘 쿠키> <7년만의 외출> <구멍 속의 에이스> <키스해줘 얼간아> 등등. 심지어 그의 필름누아르들도 다시 보았고, 그의 필름누아르들조차 얼마나 그의 코믹 센스에 영향받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코미디는 인간은 어차피 비루하고 결점투성이일 수밖에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코믹 인물들은 <뜨거운 것이 좋아>의 마릴린 먼로처럼 “색소폰 주자와 사랑에 빠져” 인생을 망치거나 <아파트먼트>의 셜리 매클레인처럼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언젠나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시나리오를 직접 쓴 그의 대사는 항상 코미디적인 함의들이 반복을 통해서 절묘하게 영화 속에서 기능한다. 그는 늘 사람의 눈처럼 인공적인 것이 없는 카메라 앵글을 좋아한다. 그런 자연스런 앵글 속을, 내 의견으로는 유성영화시대의 최고의 코미디 배우 잭 레먼이 누빈다. 그의 코미디 연기는 언제나 주체할 수 없는 익살과 슬픔이 절묘하게 혼합돼 있다.

이것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는 <아파트먼트>에서 사랑하는 여자가 직장 상사와 자신의 아파트에서 밀회를 즐기는 동안 극장 앞에서 커다란 화장지 박스를 주머니에 넣고 코를 풀면서 그 여자를 기다리는 잭 레먼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영화사가들이 흔히 언급하는 <뜨거운 것이 좋아>의 명장면은 두개이다. 첫째는 마릴린 먼로가 이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기차역 장면에서 증기기관차의 수증기가 마릴린 먼로의 엉덩이로 뿜어지는 장면과 “누구도 완전하지 않아”로 끝나는 이 영화의 기가 막힌 엔딩. 전자는 간단한 시각적 악센트로 여주인공의 육감적인 캐릭터를 절묘하게 강조해낸 실례이고(이보다 더 유명한 장면은 <7년만의 외출>의 지하철 환풍구 장면이다), 단언하건대 이 끝장면은 드라마적 긴장이 어떻게 간단한 코믹 대사로 완벽하게 종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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