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인디포럼 10년, 독립영화 10년 [3] - 영화집단&영화제
2005-05-31
글 : 문석
글 : 김수경
사진 : 정진환
사진 : 오계옥

키워드 5; 영화집단

독립영화 발전의 동력, 지금은 재충전중

김정구 감독 <샴 하드 로맨스>

“그동안 독립영화의 역사는 영화집단의 역사였다.” 원승환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의 이야기처럼 영화집단은 독립영화 탄생의 맹아였으며 발전의 동력이었다. 1980년대 서울영화집단, 장산곶매, 바리터, 노동자뉴스제작단 등의 성과는 1990년대 들어 영화제작소 청년(김용균, 정지우, 박찬옥, 임필성, 이두만, 장희선 등), 푸른영상(김동원, 김태일, 오정훈 등), 기록영화제작소 보임(변영주, 장호준 등), 젊은영화(이송희일, 김성숙, 채기, 고은기, 박경목 등), 파적(김정구, 윤영호, 김설우, 유하 등), 영화제작소 몽(박지원, 김희진 등)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 신생 영화집단은 이념적 지향을 공유(청년, 푸른영상, 보임)하기도 했지만, 영화적 지향을 함께하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띠어나갔다. 이에 따라 독립영화의 지평은 급속하게 확장됐다. 1995년 독립영화협의회 워크숍 멤버들이 만들었던 젊은영화 또한 사정은 다르지 않다. “모두 영화를 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었는데 뭉치면 힘이 될 것 같았다. 극영화 집단인 청년과 다큐멘터리 집단을 모델로 삼았다.”(채기) 이들은 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창립하는 데 있어 주축 역할을 하기도 했다.

채기 감독 <애절한 운동>

하지만 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영화집단들은 해체 또는 약화의 길을 걷는다. “액티비즘이 퇴조했고, 디지털비디오와 프리미어 편집기가 보급됐으며, 지향점이 아마추어리즘에서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전환”(원승환)됨과 동시에 “구성원들이 영화를 해나가면서 서로의 색깔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채기)하면서 집단은 퇴조했다. 또 홍효숙 부산영화제 와이드앵글 프로그래머는 “독립영화의 배급통로가 영화제라는 단일통로로 수렴되면서 팀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진단한다. 이와 관련해 김노경 시네마테크협의회 사무국장은 “독립영화에 대해 충무로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라고 바라보는 오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독자적인 배급시스템이 필요한데, 개인화된 감독들은 집단적인 힘을 모으는 대신 영화제 투어나 충무로행을 선택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영화집단이 주축이었던 한국독립영화협회의 위상이 흔들린다”는 원승환 국장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고 보지만, 뜻있는 감독들이 중심이 된 구심체가 필요한 것도 사실”(김노경)이라는 지적처럼, 독립영화계는 새로운 형태의 ‘영화집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

‘파적’의 멤버, <샴 하드 로맨스>의 김정구 감독

“작품을 놓고 개인을 구속하진 않았다”

‘지하창작집단 파적’이라는 이름은 ‘파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어머니 옆에서 아들이 남자친구와 오럴섹스를 벌이는 등 파격적인 장면으로 가득한 첫 작품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1997)의 효과가 워낙 대단했던 탓이다. 파격성만이 파적의 전부는 아니었다. 파적은 실험성과 전위성이라는, 이전 독립영화의 촉수가 닿지 않았던 지평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면서 20여편의 영화목록을 축적하고 있다. 윤영호, 김설우, 유하 감독과 함께 파적을 이끌어간 김정구 감독을 만났다.

-파적은 어떻게 결성됐나.

=1997년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를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당시 스탭은 학교 안팎에서 영화를 만들던 친구들이었는데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실험적이고 파격적이며 진보적인 극영화를 만들자는 뜻이 모아졌다. 결국 <엄마의…> 스탭이 파적의 구성원으로 이어진 셈이다.

-굳이 집단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나.

=집단이라곤 해도 집단이 작품을 놓고 개인을 구속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자는 뜻이 모인 것뿐이다. 모든 작업을 품앗이로 해결했다. 연출자들인데도 촬영을 잘하는 편이었는지 다른 데서 촬영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파적의 현황은.

=이전만큼 활발하진 않지만 여전히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예전처럼 활기차게 계속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긴 하다.

-다른 집단처럼 개인화를 겪고 있다는 얘기인가.

=나만 해도 예전엔 팀을 우선시했다. 요즘에는 개인이 잘돼야 팀도 잘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자본, 시스템, 배급 등 독립영화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 집단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오히려 개인적 돌파가 성공한다면 집단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작업은.

=2003년부터 시작한 디지털 장편 <역진화론>이 후반작업 마무리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맴돌고 있다. 지금은 신생 영화사와 장편영화를 논의 중이다. 이번엔 상업영화니까 대중과 호흡하기 위해 신경쓰고 있다.

키워드 4; 영화제

신예 발굴의 장이자 유일한 소통의 장

이경순·최하동하 감독 <애국자게임>

한국청소년영화제의 맥을 잇는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인디포럼작가회의를 모태로 한 인디포럼, 장르단편영화제로 자리잡은 미쟝센단편영화제, 여성영화제, 인권영화제, 인디다큐페스티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지난해 생긴 CJ아시아인디영화제. 국제영화제와 더불어 최근 독립영화 감독들의 발굴이 이루어지는 주요 영화제들이다. 영화제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출품작들이 겹치는 사례도 빈번해지고 있다. 이중에서도 1997년에 생긴 인디포럼은 서독제와 더불어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작가회의’라는 초기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창작자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영화제이다. 인디포럼의 김노경 프로그래머는 이제까지 인디포럼에서 관객에게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가로 이경순·최하동하 감독을 꼽았다. 2001년 상영된 <애국자 게임>를 연출했던 이들을 <송환>의 김동원 감독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신예”로 지목한다. <레드헌트>의 조성봉 감독은 이경순 감독을 언급하며 “나는 죽어도 빨간 경순 감독처럼 재밌게 만들 자신은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2001년 올해의 독립영화로 선정된 <애국자 게임>은 2001년 인디포럼에서 초연될 당시 관객과의 대화(이하 GV)를 일체 거부해서 화제가 되었다. 출품도 인디포럼에만 했고, 나머지는 공식 초청에 의해 참가했을 따름이다. 이는 그들의 전작 <민들레>에서 경험했던 GV가 영화감상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최하동하 감독은 “영화제에 참여하고 매체와 접하는 것은 사실 적과의 동침이다”라고 말한다. 그해 인디포럼에서 <애국자 게임>은 유일한 상인 관객상을 가져갔다.

<민들레>

최 감독의 말처럼 아직도 독립영화가 관객과 소통하는 가장 유력한 경로는 영화제이다. 인디포럼의 김노경 프로그래머는 “관객은 예술영화건 독립영화건 영화제를 통해서만 만나려고 한다. 이것이 독립영화와 영화제 사이에 놓인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영화제와 지원기관의 제작지원 방식의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히 제작기간을 한정짓기 어려운 다큐멘터리의 경우가 이 때문에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고. 인터뷰를 포함해 제작기간 3년, 편집기간에만 1년이 걸린 <애국자 게임>이 “만약 제작지원을 받아 만든 작품이었다면 현재와는 다른 컨셉의 풍부하지 못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라고 이경순 감독은 말했다. 이 감독은 현재 두곳의 지원으로 신작 <쇼킹패밀리>를 준비 중이다. 일련의 영화제들이 통로에서 광장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애국자 게임> 공동연출한 이경순·최하동하 감독

“온라인 상영이 소통에 도움이 되더라”

한쪽에는 빼곡하게 DV테이프가 꽂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동안 수확한 각종 영화제의 트로피들. 고양이 두 마리가 사뿐히 걸어다니는 홍익대의 빨간눈사람 사무실에서 털털하고 사람 좋은 이경순 감독과 시니컬하고 재미난 독설가 최하동하 감독을 만났다. 영화제를 싫어하는 영화제의 스타들에게 듣는 독립영화가 영화제에서 살아가는 법.

-2001년 당시 상영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면.

=최하동하 | 인디포럼 전에 메이데이에 온라인 상영을 시작했다. 24시간 틀어놓을 테니까. 구체적인 반응이 온 것은 인디포럼이고 이후에 극장 개봉이 안 되겠다 싶어서 온라인으로 올렸다.

=이경순 | 가능하면 영화제는 적극적으로 내지 말자. 관객과의 대화가 정석인 것처럼 굳어지는 게 싫었다. 그거 안 한다고 욕 많이 먹었다. 억지로 하다보면 자꾸 말을 만들어내게 된다.

=최하동하 | 영화 끝나자마자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민들레> 때 실감했다. 딴지일보에서 한달 정도 온라인 상영을 했는데. 딴지일보 게시판에 올라왔던 반응들이 기억에 남는다. 과반수가 개떼처럼 달려들어 싫다며 씹고 공격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소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우리가 영화를 만드는 데 기존 시장에서 영화제와 매체는 우리의 적이니까, 적과의 동침이 되는 거다.

-공동연출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최하동하 | 촬영은 누가, 섭외는 누가, 이런 식의 역할분담은 별로 없었다. 시간되는 사람이 하는 거지. 아르바이트 안 하는 사람이 일하는 방식으로. (웃음)

-영화제 말고 상영의 대안이 있다면.

=최하동하 |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야 하니까 미약해도 온라인을 포기할 수는 없다.

-각자 차기작인 <택시블루스>와 <쇼킹패밀리>는 영화제에서 펀딩을 받았고, 그 기간에 맞춰야 할 텐데.

=최하동하 | 영화제작의 출발과 마무리가 영화제에 묶여 있다는 것이 탐탁지 않다. 다큐멘터리는 더욱 그렇다.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나는지는 내 마음인 거다. 여건만 받쳐주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이경순 | 그게 가능하겠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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