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돌아간 거장들
수상작은 일단 심사위원 마음대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작품의 절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척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스 반 산트, 허우샤오시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빔 벤더스, 라스 폰 트리에는 작품의 질에 상관없이 빈손으로 돌아간 거장들의 대표가 됐다. 홍상수도 이 목록에 포함된다. <씨네 21>과 인터뷰를 한 <포지티프>의 평론가 위베르 니오그레는 비꼬면서 말한다. “심사위원인 여배우 셀마 헤이엑이 1년에 영화를 몇편이나 봤겠는가? 멕시코영화와 미국영화 외에 무엇을 더 알겠는가?”
예컨대 우리 생각에 <아이>가 범작은 아니지만, 허우샤오시엔의 <최호적시광>이나 구스 반 산트의 <라스트 데이즈>,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어떤 폭력의 역사>보다 훨씬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마 <르몽드>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영화제가 끝난 5월24일치 신문에 “올해의 특징은 ‘대가들의 이름’이었는데, 그것이 너무 많아서 심사위원들이 모두에게 존경을 표하기가 힘들었다. 구스 반 산트와 허우샤오시엔, 크로넨버그가 수상자 중에 없음은 특히 큰 공백으로 남는다”고 밝혔다. 그런 이유로 같은 지면에서 “할리우드 산업의 규칙에서 갈수록 멀어져가는 유럽적 영화 만들기의 한 가지 방식에 상을 부여”한 것이라며 이번 황금종려상 수상작 선정의 의미를 작품 자체보다는 그 작품의 산업적 제작과정의 성과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해석했다.
반응 엇갈린 <극장전>, 수상 불발
특히 이유없이 빈손으로 돌아온 감독은 홍상수다. 라인업이 모두 갖춰진 뒤에 21번째 경쟁작으로 돌연 진입하면서 수상 가능성을 높였던 <극장전>이 그냥 돌아온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5월21일 같은 날 발행되어 엇갈리는 평을 내놓은 현지 언론의 반응으로 흥미롭게 추론해볼 수는 있다. 그것은 대강 세 가지로 구분된다. ‘이해불능과 실망과 격찬.’ <르 피가로>는 “곡예 같은 고리”라는 제목을 뽑아 <극장전>을 소개했는데 기본적인 플롯을 완전히 오독하는 결과를 낳았다. 배우들의 이름을 잘못 표기하거나, 동문들이 모인 모임을 스탭들의 모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작은 정도의 오해다. 이기우와 엄지원의 영화 속 영화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여주인공이 실제로 10년 전에 겪었던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뒤 영화배우가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해석의 폭을 넓힐 경우 그런 관점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 될 수 있으나, 지금 같은 표면적 사실 전달의 차원에서 보면 주인공이 극장을 나오는 장면에서 졸았거나 내내 딴생각을 한 정도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자기들이 뽑은 제목처럼 거의 ‘곡예 같은 코미디’를 펼친 셈이다. 반면 같은 날짜 <리베라시옹>은 실망을 엿보였다. <극장전>은 둔한 액자구조를 가진 작품인데 이런 방식은 홍상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이다. 격찬을 한 것은 <르몽드>다. “다시 한번 홍상수는 우리를 사로잡았고, 반복구는 없었다.… 명확한 줄거리 전달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초상을 인상주의적인 가는 붓으로 그리면서 관객에게 스스로 퍼즐의 조각을 맞추어보도록 한다”고 썼다. <극장전>을 본 심사위원들의 반응도 아마 이와 같지 않았을까? 때문에 의중을 한곳으로 모으기 쉽지 않은 영화로 판명되었을 것이다.
걱정의 목소리 “너무 안정적이다”
빈손으로 돌아간 거장이 많았던 건, 칸에 온 거장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올해 칸영화제를 훈계하는 핵심이 되고 있다. <버라이어티>는 영화제 폐막 이틀 전인 5월20일치 마지막 데일리의 1면 큰 제목을 “회색의 손길: 오래된 대가들이 신예보다 빛나다”라고 달았다. 지난해에 마이크 리의 <베라 드레이크>(결국에는 베니스에서 상을 탄)를 거절하면서까지 구식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지향하겠다고 선언했던 칸영화제가 오히려 보수적인 방향으로 선회하여 “막연하게 안정적인 영화제”로 끝났다는 것이다. <포지티프>의 위베르 니오그레 역시 같은 표현을 써서 “너무 안정적인 선택”이었음을 지적한다. ‘너무 안정적이다.’ 대체로 이것이 올해 칸을 둘러싼 걱정의 목소리다. 영화제 직전 거장들에게 몰표를 행사한 편파적 라인업 선정이 아니냐는 비판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그들의 평을 인용하지 않아도 경쟁부문과 주목할 만한 시선의 영화들을 보고나면 확연히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대가들의 작품과 신예들의 작품이 상당한 격차를 보인 경쟁작 내에서의 수준 차도 문제지만, 특히 올해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된 작품들은 기대 이하가 대다수였다. 좀 심하게 말하면, 쓸 만한 것은 모조리 경쟁으로 올리고, 남은 작품들로 구성한 거의 버려진 부문처럼 보일 정도였다. 결국, ‘거장의 귀환’은 2003년과 2004년 ‘흉작’과 ‘오판’으로 비난받았던 티에리 프레모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후의 배수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되게 비판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티에리 프레모가 올해의 평을 귀담아 선뜻 지난해 같은 대담함을 내년에도 엿보일지는 미지수다. 먹을 것이 없으면 없는 대로 허름한 잔치라는 비판을 받고, 거한 손님이 너무 많으면 많은 대로 새 손님을 불러오지 못한 게으른 잔치로 비난받는 것이 언제나 1위 영화제를 유지하기 위해 수준있는 균형감각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칸영화제의 존재방식에 뒤따르는 딜레마인 셈이다.
발견과 안정 사이의 균형 바란다
어쩌면 이것은 구경꾼의 딜레마일 수도 있다. 가령 거장들의 좋은 영화로 꾸려져 보기도 좋고 흥도 있지만, 발견이라는 영화제 본연의 몫을 게을리한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모호한 처지의 딜레마. “티에리 프레모는 올해의 영화제를 ‘작가들의 귀환’이라는 번쩍거리는 번호판을 단 최고급 리무진처럼 운전했다. 하지만 시네아스트의 정수를 느끼는 연례적인 만남이자 세계 시네필들이 가장 열렬히 기다린다는 칸 영화제의 (올해) 부인할 수 없는 특징은 문제를 제기하도록 만든다. 그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반론 제기를 멈추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제도에 대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리베라시옹> 5월23일치)라는 모호한 뉘앙스의 결론은 그래서 도출된다. ‘대담한 발견과 현명한 고수에 대한 균형감’, 그것에 뒤따르는 딜레마를 주인과 거기에 초대받은 구경꾼이 동시에 같은 무게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다시 중요한 것은 영화제와 영화를 나누어 바라보는 시각이다. 영화제는 범주화의 모델을 제시하는 장소이다. 동시에 동시대 영화의 징후를 읽어내도록 유도하는 표본장이다. 그중에서도 칸영화제는 현재 세계 영화의 표준시를 알려주는 기준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범주화를 시도하고 징후를 읽어내는 고리를 형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진다. 왜 허우샤오시엔과 구스 반 산트와 빔 벤더스와 짐 자무시와 홍상수와 김기덕은 스스로의 영화 궤적을 복제하거나 심화하기를 자청하고 있는 것인가? 빔 벤더스와 짐 자무시의 영화에 똑같이 핵이 되는 대사 ‘I’m Your Father’는 어떻게 다른 결말을 대변하는가? 왜 왕샤오솨이와 카를로스 레이가다스는 자기의 형식적 필연성을 위해서 인물들을 희생시키는가? 왜 아모스 기타이와 아톰 에고이얀은 형식적 퇴보를 걸었는가? 차원을 이동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미국 논평이 어떻게 라스 폰 트리에의 미국 논평을 어리광으로 전락시키는가? 미카엘 하네케의 윤리와 다르덴 형제의 윤리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혹은 미카엘 하네케와 홍상수는 영화적인 장치의 한계를 어떻게 극과 극으로 사용게 된 것일까? 올해 칸에서 상영된 영화들을 대한민국 극장에서 마주할 때마다 던져야 할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들이 올해 칸영화제가 우리에게 남겨준 진짜 숙제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멀고 먼 다른 대륙에서 열리는 영화잔치가 우리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여겨진다.
빔 벤더스의 신작 <돈 컴 노킹>
<리스본 스토리> 이후 빔 벤더스 최고의 걸작
<돈 컴 노킹>은 빔 벤더스와 샘 셰퍼드가 합작하여 <파리, 텍사스>를 만든 지 21년 만에 재결합하여 완성해낸 영화이다. 3년간 걸린 시나리오 작업 역시 신별로 서로 번갈아가며 토의하면서 썼다고 빔 벤더스는 말한다. <파리, 텍사스>가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작품이었기에 이번 두 중견의 결합은 칸에서 더욱 화제였다. 게다가, 작품의 질 역시 빔 벤더스의 재기작이라 부르기에 아깝지 않을 정도다.
한물간 서부극 스타 하워드는 영화촬영 도중 도주한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망나니다. 젊은 시절 한때 인기를 얻기도 했었지만, 술과 마약과 여자문제로 위신을 상실한 지 오래됐다. 스스로도 자포자기 상태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그는 엘코에 있는 어머니 집에 몇 십년 만에 찾아간다. 한편으론 촬영 약속을 어기고 빠져나간 하워드를 잡기 위해 보험회사에서 의뢰받은 형사가 그를 쫓는다. 엘코에서도 그는 술을 먹고 난동을 피우다가 경찰에 잡혀 새벽에야 집에 들어온다. 그런 아들에게 어머니는 충격적인 말을 전한다. 하워드에게 ‘얼’이라는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말을 들은 그는 문득 몬태나로 아들을 만나기 위해 떠난다. 거기에는 한때 애인이었고, 얼의 엄마인 도린이 있다. 하워드는 도린과 얼을 만나 아옹다옹 다투면서 자신의 인생이 전환점에 이르렀음을 직감한다. 그때 또 한명의 젊은 여자가 하워드를 찾아온다. 놀랍게도 그녀는 하워드의 딸이다. 이제 주인공 하워드는 졸지에 아들과 딸을 동시에 얻게 된다.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간 하워드, 이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 같다.
서부영화 배우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이 영화는 서부극에 대한 애정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빔 벤더스는 주인공 하워드를 “집에 대한 갈망”을 지닌 “외로운 영웅”이라고 표현한다. 빔 벤더스는 <돈 컴 노킹>을 중년의 철부지가 가족을 얻어 깨달음을 얻는 로드무비의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주인공 하워드 역을 샘 셰퍼드가 직접 연기한다. 어렵게 투자를 받고 오랜 작업기간을 거치면서 빔 벤더스는 오히려 뭔가를 찾은 것 같다. <돈 컴 노킹>은 의심의 여지없이 <리스본 스토리>(1994) 이후 빔 벤더스의 최고 걸작이다.
허우샤오시엔의 신작 <최호적시광>
거장이 만든 최고의 러브스토리
허우샤오시엔의 신작 <최호적시광>은 세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1966년에 시작한다. 소제목은 ‘사랑을 위한 시간’이다. 어느 허름한 당구장에서 일을 하는 여종업원과 그곳의 젊은 단골손님이 사랑에 빠지는 간단한 이야기다. 그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둘의 감정을 잡아내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답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1911년에 시작한다. 소제목은 ‘자유를 위한 시간’이다. 유곽의 고급 매춘부와 대농장 지주의 아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이 에피소드에서 허우샤오시엔은 인물들의 대화를 무성영화식 자막으로 처리한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인물들과 양식화되어 자막처리되는 대사들이 서로 겹쳐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놀라운 실루엣을 만들어낸다. 세 번째 이야기는 2005년 현재에서 시작한다. 소제목은 ‘청춘을 위한 시간’이다. 대만을 거칠게 살아가는 젊은 남녀의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다. 허우샤오시엔은 터질 것 같은 답답함과 폭발력으로 이들의 갈증을 그려낸다.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벌어지는 세개의 사랑 이야기가 바로 <최호적시광>이다. 주연배우 장첸과 서기는 그 모두의 시간을 옮겨다니며 주인공 역을 해낸다.
<최호적시광>은 왜 허우샤오시엔이 영화의 ‘마스터’인지를 보여준다. 세개의 에피소드는 세편의 영화를 찍듯이 만들어졌고, 그것은 각각 <동년왕사> <해상화> <밀레니엄 맘보>라고 따로 불러도 의미가 상하지 않을 정도다. 에피소드마다 그 자신이 추구해온 각각 다른 스타일이 정확히 통제되어 담겨 있다. 이번 영화제에서 허우샤오시엔이 어떤 상도 받지 못했다는 건 심사위원들 스스로가 그의 시간과 감정에 대한 성찰적인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들이라고 자인한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조각난 기억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분류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들이 위대한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하간 우리 마음속에 흔들리지 않고 지어져 있는 움막입니다…. ‘최고’라는 것은 우리가 그 조각난 기억들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그것들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고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오로지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