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8회 칸영화제 최종 결산 [6] - <극장전> 리뷰
2005-06-07
글 : 장 미셸 프로동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
사진 : 오계옥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이 본 <극장전>

억지로 기적을 만들지 않는 기적

무엇이 됐건 홍상수 감독이 분명 상을 탈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수상 소감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게 좋을지 짬짬이 크루아제트 인파 속을 헤매며 떠올려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극장전>에 관한 흥미로운 평을 써줄 만한 필자는 누구일지도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떠오른 것이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 장 미셸 프로동이었다. 지난해에 한국에서 그를 인터뷰했을 때 프로동은 특히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인광을 빛냈다. 하지만 과연 응하기는 할까? 칸과 특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카이에 뒤 시네마>, 그 잡지의 편집장이 매일 낮밤으로 계속되는 파티 속에서 영화를 보고 글을 쓸 시간이 있기는 한 걸까? 그런데 장 미셸 프로동은 흔쾌히 청탁에 응했다. 그러고나서 며칠이 지났다. <극장전>은 수상작 어디에도 있지 않다. 때문에 이 글은 이제 ‘축사’가 아니라 ‘변호’의 의미를 갖게 됐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프로동은 홍상수를 최상의 시네아스트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건 2005년 칸에 초청받은 한국영화의 시네아스트들 중 최상의 한명에 대한 심층적인 감상평이다. 이번에 칸에 온 전체 한국영화에 대한 총평은 다음 장에 이어질 <포지티프>의 편집위원 위베르 니오그레가 맡는다. 정한석


지금부터 십여년 전, 도쿄에서였다. 사람 좋은 이치야마 쇼조(Ichiyama Shojo)가 아직 도쿄영화제 뉴 아시아 커런츠(New Asia Currents) 섹션의 프로그래밍을 맡고 있을 때다. 이상한 제목의 그 영화는 어느 무명 감독의 첫 작품이었고, 그는 우리 서구의 시네필들이 <세계 영화지도>(<카이에 뒤 시네마>는 매년 <세계영화지도>라는 제목으로 세계 영화작가의 현주소를 알아보는 연간 별책부록을 만들고 있다- 편집자)에 막 이름을 적어넣기 시작하던 나라, 한국 출신이었다. 홍상수라는 감독이 만든 그 영화의 제목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별볼일 없는 삶을 사는 네명의 인물들의 행적이 뒤얽히는 그 기묘한 이야기를 보고 난 뒤에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해도 두 가지 사실은 확실해 보였다.

먼저, 아름답고 경쾌하며 우아한 연출, 가장 진부한 상황으로부터 감정이 솟아나오게 하는 능력, 사소한 일을 거대한 비극으로 폭발시키는 재능이 거기 있었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은 진짜 시네아스트였다. 다음으로, 단번에 극소수의 탁월한 연출가의 자리에 오르게 된 그의 방법은 다른 감독들과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공간과 시간, 인간의 몸과 그것이 움직인 흔적, 침묵과 충동을 함께 작용하게 하여 일관성 있는 영화의 재료를 만들어내고, 시대나 지역적 배경, 논리나 인물의 심리에 종속되지 않고 이 재료를 조각해내는 그의 방식은 다른 누구도 갖지 못한 것이었다.

아름답고 힘있는 기적 <극장전>

2005년 5월19일, 칸에서였다. 뤼미에르 대극장에 막 불이 다시 들어오고, 극장 안의 관객은 홍상수와 배우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다시 한번 기적이 이루어졌다. 그 기적이 더욱 아름답고 힘있는 까닭은 거기에 어떤 스펙터클도, 억지로 기적을 만들어내려는 점도 없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여섯 번째 장편인 <극장전>은 하나의 진정한 작품 세계의 여섯 번째 단계이다. 그의 영화들은 그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탐구를 통해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는 진정한 작품 세계를 이루고 있다. 홍상수의 모든 영화를 보고 나면(그리고 여러 번 다시 보게 되면) 그의 여러 영화 속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모티브나 순환방식, 기준이 되는 신들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홍상수는 의도적으로 표현 수단의 수를 줄이고, 거기에서 감정을 새로이 끌어내는데, 이 감정들은 은밀한 미스터리를 향해 열려 있다.

이번 영화에서는, <생활의 발견>에서 중심이 되었던 감독이라는 인물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영화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강원도의 힘>에서 두 이야기를 거울처럼 마주보게 해놓았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화는 차례로 등장하는 두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개의 비슷한 이야기는 결국 같은 무엇인가에 이른다. 무엇에? 여기서 이 영화의 재기와 아름다움, 그리고 미스터리가 시작된다. 영화의 첫 번째 부분은 두 젊은이의 사랑 이야기로, 멜랑콜리와 인간관계의 서투름으로 인해 그들의 이야기는 로맨틱한 자살을 향해 진행된다. 영화의 두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이 첫 번째 부분이 실은 영화였고, 영화감독 지망생인 어떤 남자가 이 영화를 막 보고 나왔음을 알게 된다. 극장에서 나오며, 이 남자는 영화의 여배우를 발견한다. 이 남자와 여배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첫 번째 부분의 영화 속 남녀관계와 어느 정도는 닮아 있다.

엄지원은 당연히 사랑에 빠진 여자와 배우라는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연기한다. 따라서 같은 이야기가 차례로 같은 사람의 몸을 통해 나타나지만, 그 몸은 ‘영화 속 영화’의 아주 젊은 여자와 두 번째 부분의 그보다는 나이가 든 배우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자격으로 나타난다. 같은 이야기를 두번 겹쳐놓는다는 인위적 장치로 인해, 우리가 보게 되는 (아주 아름다운) 여자의 정체성에는 신비한 방식으로 균열이 생긴다. 어떤 충격이나 다른 효과 없이 이루어지는 이 대목은 가장 시시한 장면에서조차 드러나는 유려함이다. 이 유려함을 통해 영화에는 수많은 통로와 질문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된다. 이것들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강렬함은 넥타이의 매듭처럼 어느 순간 갑작스레 조여질 수 있다.

내용과 형식, 둘 다 포기 않는 시네아스트

<극장전> 홍상수 감독과 배우들.

홍상수는 매 영화에서 영화의 형태에 관한 정교한 작업을 하면서도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하는 오늘날의 보기 드문 시네아스트 중 하나이다. 전세계적으로 상업영화는 이야기만을 전달하기 위해 형식적 야심을 모두 포기하고, 작가영화의 대부분은 폐쇄적인 형식적 장치들을 발명하는 데에 전념하고 있다. 반면 홍상수는 이 두 가지 전선에서 동시에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는 이 두 가지 일을 단 한 가지 방법으로 하고 있는데, 이 방법을 통해 영화 속 인물들(때로는 단 한신에만 등장하는 단역들)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감정이입이 가능해진다.

이런 감정이입은 유럽인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놀랍다. 유럽인의 멘털리티와 문화는 스크린에 나타나는 인물들이나 그 인물들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오, 수정!>이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보며, 나는 오늘날 일상 속에서 ‘한국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금은 배웠다고 생각한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영화 속에서 그 실마리를 보았던 태도와 동작, 인간관계의 방식을 다시 발견하였다.

최상급 시네아스트인 홍상수는 그러므로 두 가지 의미에서 자기 나라의 ‘대사관’이다. 한편으로 오늘날 전세계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가장 존경받는 이름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영화의 우아함과 섬세함은 감독이 살고 있는 사회 특유의 집단적 공상과 욕망, 불안과 욕구불만을 향한 보기 드문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길은 또한 모든 인간의 본성을 향해 열린 통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인간에 대한 정보를 주는 데에는 한 가지 이상의 방법이 있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방법과 예술이라는 방법이 그것이다. 홍상수가 사용하는 것은 그중 두 번째 방법이다.

번역 정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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