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4] - 신예
2005-09-29
글 : 김도훈
글 : 이영진
글 : 문석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글 : 박혜명
자유의 반란을 꿈꿔라

Vision2: ROOKIE - 새로운 재능의 조류가 싱싱한 활어들을 부산항으로 밀고왔다. 영화 미식가들이라면 신인들이 낚은 펄펄 뛰는 횟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참을 수 없는 비릿함도 색다른 별미다.

로버트 카마이클의 엑스터시 The Great Ecstacy of Robert Carmichael

■ 21세기 <시계태엽장치 오렌지>

이라크 전쟁이 한창인 시절, 영국의 자그마한 항구도시에는 비틀거리는 소년들이 있다. 그들은 급우들의 돈을 빼앗고, 폭력을 행사하고, 소녀를 강간하며, 엑스터시와 대마초를 사탕처럼 소비한다. 중산층 홀엄마와 살아가는 로버트 카마이클은 학교 연주회를 위해 첼로를 켜는 반듯한 소년. 하지만 카마이클의 마음 역시 서서히 썩어져간다.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카마이클은 두명의 친구와 함께 유명 요리사의 집에 몰래 잡입하고, 비린내나도록 끔찍한 악마성을 드러낸다. <로버트 카마이클의 엑스터시>는 21세기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다. 전쟁과 살육과 마약과 미디어의 거짓으로 점철된 현대 영국의 아이들은 광기를 다스리는 데 능하지 못하다. 평범한 소년 카마이클의 시계에서도 태엽은 하나 빠져있고, 그것은 불꽃처럼 한순간에 인간성과 도덕성을 태워내린다. 음반 프로듀서인 토머스 클레이의 장편 데뷔작 <로버트 카마이클의 엑스터시>는 관객의 심장과 머리를 못이 박힌 망치로 내리찍는 듯한 영화적 경험이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에 30분 넘도록 지속되는 영화적 폭력은 상상의 한계를 저만치 넘어선다. 이건 슬래셔영화를 즐기는 기분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신예의 도발적인 사회고발인가, 아니면 그저 구역질나는 싸구려 영상폭력인가. 어쨌거나, <로버트 카마이클의 엑스터시>는 불쾌한 방식으로 불쾌한 세상을 고발하는 영화이며, 그 여운은 끔찍할 만큼 오래 지속된다.

모텔 The Motel

■ 잔인한 고통 속에서 소년은 성장한다

삶의 벼랑 끝에 선 사람, 또는 두 시간의 욕정을 채우려는 남녀 외엔 찾지 않는 허름한 모텔이 있다. 이 모텔의 주인은 중국계 아줌마지만, 이 모텔의 진짜 일꾼은 아줌마의 아들 어니스트다. 이 열세살짜리 꼬마는 학교에서 지낼 때를 제외하면 모텔을 위해 모든 시간을 허비한다. 방 청소며 시트 교체, 야간 데스크 근무까지 모두 어니스트가 맡아야 한다. 게다가 엄마의 험악한 잔소리까지 감당해야 하니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간 아버지의 빈자리는 고스란히 어니스트의 몫이다. 어느 날 한국계 미국인 샘이 모텔로 들어오면서 어니스트의 삶은 변화한다. 샘으로부터 ‘남자가 되는 법’을 배운 어니스트는 짝사랑하는 소녀 크리스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엄마에게도 반항한다. 한국계 마이클 강 감독의 데뷔작인 <모텔>은 10대 초반에 이른 한 소년의 잔인한 유년기를 보여준다. 결국 세월은 가게 마련이고 소년은 성장하게 되는 법. <모텔>은 그 시절을 성난 얼굴이 아니라, 자잘한 일상 속에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돌아본다.

청소부 시인 Poet of the Wastes

■ 시도 사랑도 없는 불모지에서 나무를 키우는 청소부

이란에는 300만명의 실업자가 있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청년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들에게 주어진 3천개의 일자리 중에서 하나를 낚아채 테헤란의 청소부로 취직한다. 그는 어린 시절 동경했던 시인의 집 밖 쓰레기를 치우다가 한마디씩 조언을 얻게 되고, 망명 비자를 받지 못해 절망에 빠진 아름다운 여인을 남몰래 사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두 가지 사랑은 모두 희망을 찾지 못한다. 촬영감독과 프로덕션 매니저 등으로 일해온 모함마드 아흐마디는 <가베>로 인연을 맺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시나리오를 받아 데뷔작을 완성했다. 청소부가 되기 위해 천문학의 법칙을 설명하는 대목이나 밤마다 춤추고 노래하는 청소부들의 모습이 낙천적인 영화.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시(詩)와 헌신적인 사랑이 자리할 곳 없으리라는, 암울한 예감이 영화를 지배해간다.

차가운 샤워 Cold Showers

■ 육체는 자라고 마음은 부서진다

사춘기는 영적인 경험인가 육체적인 경험인가, 혹은 둘 다인가. 프랑스의 소도시에 사는 미카엘은 전도유망한 학생 유도선수. 든든한 스폰서가 있는데다, 아름다운 여자친구 바네사와 성적인 환희도 만끽하는 운좋은 청춘이다. 그러나 젊음은 곧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카엘의 영혼은 스폰서의 아들인 끌레망, 바네사와 우연히 시도한 집단섹스 이후 심연으로 기울고, 유도대회의 계체량 측정에 통과하기 위해 살을 빼야 하는 미카엘의 육체 또한 극한으로 치닫는다. <차가운 샤워>는 열기를 감당하지 못해 비틀거리는 세상의 청춘들에 관한 영화다. 전기요금 때문에 TV를 끄고 사는 부모, 돈 많고 자신감 넘치는 끌레망, 자유롭게 성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여자친구 사이에서 미카엘은 성장통을 앓는다. 신예 앙토니 코르디에의 카메라는 마음의 통증을 진단하기 위해 소년들의 육체를 주시한다. 차가운 샤워로 탐스러운 가슴팍을 어루만지듯이.

좋은 배우 A Great Actor

■ 불안은 신념을 만들고, 신념은 진실을 잠식한다

한편의 실험극 공연을 앞두고 극단 배우들은 매일 연습을 강행하지만, 본질에 다가서라는 말만 반복하는 연출가 아래에서 배우들은 서로 반목하고 제 잇속 차리기에 급급하다. “모든 것을 버리겠다”면서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정리하고 극단에 뛰어든 막내 수영의 의지 또한 혼란의 수렁에 빠진다. 연기 수련을 위해 산속으로 수행을 떠났던 지환이 합류하면서 이들의 갈등은 더욱 커져가고,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한 저마다의 안간힘은 끝내 각본 없는 핏빛 리허설을 빚고야 만다. “신념이 그래서 무섭다니까. 진실이 아닐까봐.” 타인에 대한 충고와 위로가 실은 불안에 떠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인물들의 고백을 듣기까지 추적을 멈추지 않는 영화는 흡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연극 배우들을 섭외, 300만원이라는 초저예산 제작비를 들여 완성됐다.

차이나맨 Chinaman

■ 덴마트 중년 남자와 중국 미녀의 정략결혼기

배관공 켈트의 인생은 꼬였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아내에게 빌붙어 사는 아들은 매사에 엄마편에다, 비즈니스도 별볼일 없는 관계로 위자료를 구할 방도도 오리무중. 체념에 빠진 켈트는 중국 식당에 식사하러 갔다가 달콤한 제의를 받는다. 식당주인의 여동생 링이 영주권을 딸 수 있도록 위장결혼을 해주면 두둑한 사례금을 준다는 것. 서둘러 결혼식을 치른 두 사람은 켈트의 집에서 함께 살아가기 시작한다. 항상 중국식 드레스를 입고, 따뜻한 중국식 식사를 차리고, 아침마다 우슈로 몸을 단련하는 링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다. 하지만 서구 남자의 환상이 그리 누추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차이나맨>이 소유할 수 없는 환상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를 애처롭고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단편인 <테이스와 니코>(1998)로 오스카 단편영화상 후보에 올랐던 헨리크 루벤 겐츠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팔월의 일요일들

■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인연의 경계를 보다

호상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에게 그녀가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팔월의 일요일들>을 읽어준다. 그 책 속표지엔 한 남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호상은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를 찾기 위한 호상의 발걸음은, 호상의 아내를 돌보고 있는 주치의에게 이어지고, 그 사연은 다시 이미 죽은 <팔월의 일요일들>의 작가와 친구로 지냈던 헌책방 주인의 일상에 가닿는다. 인연이라곤 없던 이들은 조금씩 서로에게 포개지고 다시 물러선다. 독립장편영화 <팔월의 일요일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담담하지만 동시에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불안한 공기를 지니고 있다. 호상은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는 아내에게 무얼 묻고 싶은 걸까, 외로워 보이는 의사는 자신에겐 의미가 없을 무명의 책에 왜 그토록 집착하는 걸까. 질문은 공허한 나날로 인해 대답을 얻지 못하고 사람들은 경계 앞에서 파열하거나 다만 멈추어선다. <GOD> <단순한 열정> 등을 연출한 감독 이진우의 장편 데뷔작.

미 앤 유 앤 에브리원 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

■ 디지털 시대의 소통 탐험

파편화된 세상에서 다른 이와 진심으로 교류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은 LA 근교 소도시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소통을 탐험하는 영화다. 노인 대상 택시를 운전하며 비디오 작품을 만드는 크리스틴은 구두가게 점원 리처드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아내와 이혼한 뒤 그 집에 얹혀살고 있는 리처드는 그를 피한다. 리처드의 두 아이 피터와 로비는 아버지와의 대화보다는 음탕한 인터넷 채팅에 몰두하고, 이웃집 소녀 실비는 피터를 눈여겨본다. 여기에 펠라티오로 내기를 벌이는 두 소녀, 두 소녀에게 야릇한 메시지를 전하는 앤드류, 죽어가는 아내를 바라보는 마이클, 비밀스런 욕망을 품은 큐레이터 등이 뒤얽힌다. <미 앤 유…>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외롭다는 것이다. 관계와 소통을 향한 욕망은 절실하지만, 그들은 상처받을 걸 두려워하거나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미 앤 유…>의 미덕은 절망적인 단절의 상황에서조차 넉넉함과 웃음을 잃지 않고 마술과도 같은 순간을 포착한다는 점이다. 크리스틴과 마이클이 봉지 속 금붕어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쓰고, 로비가 채팅창에 ‘))<<>>((’라고 적어넣으며, 피터와 실비가 함께 천장을 바라보는 장면 등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물길이 열림을 보여주는 놀라운 대목들이다. 크리스틴 역을 직접 연기하기도 한 푸른 눈의 미란다 줄라이는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유머와 아이러니, 찌릿한 감동, 그리고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줘 칸에서 황금카메라상 등 4개 부문의 상을 받았고, 선댄스에서도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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