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ion4: IMAGINATION - 제멋대로 굽이치는 상상력의 쓰나미가 부산항을 덮쳤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화-서퍼들은 서핑보드를 들고 파도에 오르자. 한번 타면 내릴 방법은 없지만, 이런 파도는 다시 오지 않는다.
함부르크 강습소 The Hamburg Cell
■ 가해자 시점에 동승, 9·11 테러의 재구성
아랍계 혈통인 듯한 한 남자가 공항에서 공중전화를 건다. 여자가 받는다. 그는 “사랑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그 위로 ‘2001년 9월11일’이라는 자막이 뜬다. <함부르크 강습소>는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인 9·11 테러를 소재로 삼은 극영화다. 레바논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지아드는 함부르크대 유학 중 이슬람 무장단체 지하드에 우연히 가입, 열성 단원이 된다. 이 영화는 당시 재판기록과 각종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됐다. 철저한 테러 준비과정과 5년이라는 길고 외롭고 혹독한 시간을 버티게 한 이들의 신념이 영화의 알맹이다. 왜 이들은 자살테러를 결심하는가?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당신의 이해를 구하는 순간은 지아드가 항공학과 유학생 비자를 따내 미국에서 비행기 조종수업을 배울 때가 아니라 “아랍민족의 모욕과 속박의 시대는 끝났다. 알라신이여, 당신이 족하실 때까지 오늘 내 피를 취하소서” 하고 부르짖을 때다.
다크호스 Dark Horse
■ 유쾌하고 신선한 북유럽발 이질감
건물벽 페인팅 일을 하는 청년 다니엘은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인간적으로 자유분방하다. 역시 무능력하며 대책없는 절친한 친구 제이콥과 함께 잔머리 굴려가며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연명해오던 그는 사랑스런 백치미의 여인 프랑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어머니도 할머니도 홀몸으로 지내는 프랑의 집안에서 기둥 역할을 하게 된 다니엘은 그때부터 어른이 되는 수업에 들어간다. 북유럽의 재기발랄한 감독 다구르 카리의 두 번째 장편 <다크호스>는 질감 거친 흑백화면과 12개의 챕터로 만들어진 독특한 형식의 영화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연상시키는 고풍스런 비주얼 안에서 다니엘과 제이콥, 프랑을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는 공처럼 튀어다니며 실소와 폭소를 번갈아 자아낸다. 그 이질감이 유쾌하고 신선하다. 러닝타임 내내 유지된 적당한 거리를 좁히며 따뜻한 결말과 형식으로 마무리되는 막장은, 신선함이 지루하다 느껴질 때쯤 맛보게 될 달콤한 사탕이다.
땅 위에 쓴 글 Writing on the Earth
■ 신을 징벌하리라. 헤모글로빈으로 흘려 쓴 <죄와 벌>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신의 목에 도끼를 겨눈 한 남자의 복수극. 기도 끝에 어렵사리 얻은 아이가 죽자 남자는 이성을 잃는다. 그는 “고통받는 우리를 내려다보시니 즐겁습니까?”라고 하늘에 대고 울부짖으면서 키우던 양을 죽이고, 집을 불태운다. 신에 대한 찬양은 신에 대한 오인일 뿐이라고, 신을 조롱하는 것이야말로 신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믿는 남자는 급기야 신을 떠받드는 사람들의 자식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의 계도 제의를 더해간다. 대사를 자제하는 대신 격렬한 핸드헬드 카메라와 절망의 푸른 색조 화면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면서 증오와 분노로 가득한 인물의 심리를 급박하게 따르는 영화. 20년 동안 단편영화만 만들었다는 감독은 장편데뷔작에서 인간은 신의 장난감인가라고 묻고, 또 묻는다.
마인드 게임 Mind Game
■ 눈과 마음을 따르는 상상력의 마인드 게임
<마인드 게임>은 말 그대로 마인드 게임이다. 머리로 따라가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마음을 따라가는 영상 실험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만화가 니시는 오래전에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첫사랑 명을 명의 언니가 일하는 선술집에서 만난다. 선술집에는 곧 명의 아빠를 찾아온 괴물 같은 사채업자들이 들이닥치고, 니시는 사채업자의 총에 맞아서 죽는다. 천국에서 신과 마주한 니시는 다시 살아나 사채업자를 제압하고 도망치다가 거대한 고래에게 삼켜진다. 고래 뱃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일행(???)은 거기서 30여년을 살아온 노인을 만난다.
<마인드 게임>은 이를테면 순수한 애니메이션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다. 실험적인 장편애니메이션에 기꺼이 도전해온 ‘스튜디오 4℃’와 극장판 <크레용 신짱>으로 주목받은 유이사 마사아키 감독은 눈과 귀로 집어삼켜 마음으로 이해해야 할 순수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다. 인물들의 외형은 애니메이션과 실제 배우들을 오가고, 2D와 3D, 픽실레이션과 로토스코핑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애니메이션 기법들이 총동원된 비주얼은 화면에 은하수를 뿌려놓은 듯하다. 유이사 마사아키 감독은 이처럼 놀라운 영상에 “실패자라도 좋다. 스스로의 인생을 만들어나가고 싶다”는 당당한 메시지를 담아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자신만만하게 보여주는 <마인드 게임>은 <이노센스>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제압하고 2004년 일본문화청미디어예술제 애니메이션 대상을 수상했다.
레밍 Lemming
■ 북유럽산 데이비드 린치식 판타지
온화한 성품을 지닌 알랭과 베네딕트는 서로에게 충실한 젊은 부부다. 둘은 알랭의 회사 상사인 리샤르와 알리스 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한다. 예민한 알리스는 극도의 불안감을 보이며 자리를 망친다. 이후 알리스는 알랭과 베네딕트에게 각각 다른 방식으로 계속 접근을 해오고, 묘한 눈빛에서 위험한 욕망을 드러내는 알리스를 젊은 부부는 거부하지 못한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레밍’은, 개체 수가 서식지 안에서 과도한 번식을 이룰 경우 바닷물에 떼로 뛰어들어 원래의 평형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습성을 지닌 북유럽산 나그네쥐다. 이는 알리스로 인해 무의식에만 존재했던 금기를 향해 나아가는 두 주인공의 상황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의식을 지배하는 무의식, 현실과 꿈의 경계 와해라는 주제와 형식은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감독의 다소 과한 욕심이 영화를 혼란스럽게 몰아가는 감이 없잖지만 알리스를 연기한 샬롯 램플링의 카리스마가 평형추 역할을 한다.
히든 Hidden
■ 윤리를 볼모로 한 이미지와 서사의 술래잡기
<퍼니 게임> <피아니스트> <늑대의 시간>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미카엘 하네케의 신작. 영화는 별 다를 것 없는 어느 프랑스 중산층의 대문 앞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곧 그것이 중산층 조르주 부부에게 배달된 테이프의 화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조르주 부부는 누가, 왜 자신들의 대문을 촬영해 보냈는지 알 길이 없다. 테이프는 조금씩 다른 내용을 담은 채로 조르주 부부에게 반복적으로 배달된다. 그러던 중, 조르주는 어린 시절 자신의 집으로 입양되었다가 쫓겨난 알제리인 마지드의 복수극이라고 추정하고 그를 찾아간다. 영화는 고요하게 시작하지만, 그 시작은 아주 끔찍한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정말 거기에 담긴 진실을 본다는 뜻인가? <히든>을 보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 질문을 앞세운 미카엘 하네케는 이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충격요법의 스타일로 게임을 제안한다. 2005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 The Grace Lee Project
■ 서구에서 아시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한국계 미국인 2세 그레이스 리는 이렇게 말한다. “난 우리반의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독특하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천만의 말씀. 미국 내에서 그레이스 리라는 이름의 여성은 캘리포니아에만 500명, LA에는 314명이 산다.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내가 아는 그레이스 리? 똑똑하고, 상냥하고, 조용해요”라고 답한다. 조금 화가 난 그레이스 리는 ‘단지 똑똑하고 상냥한’류로 살아가지 않는 그레이스 리들을 찾아나서기로 한다. 낭랑한 목소리를 지닌 감독은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다. 능력있는 아나운서, 종교적 삶의 비전이 확고한 스물셋의 아가씨, 소외된 흑인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 커뮤니티 운영에 평생 힘써온 88살 사회운동가, 한국에서 7년간 레즈비언 인권활동을 벌여온 여성 등을 찾아다니며 감독은 거대한 서구사회에서 아시아계 소수민족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무거운 주제를 독특하면서도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풀어간다.
시티즌 독 Citizen Dog
■ 판타지로 버무린 타이판 <첨밀밀>
촌뜨기 폿은 가족의 성화에 밀려 일자리를 구하러 방콕에 간다. 통조림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한 그는 경비원으로 직업을 바꾸지만 이번엔 폐소공포증 때문에 고생이다. 질식할 것 같은 도시에서 폿이 숨쉴 수 있는 건 같은 건물 청소부인 진 때문이다. 그는 하늘에서 어느 날 떨어진 흰 책을 신주단지 모시듯 들고 다니는 강박증환자 진에게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진은 폿에게 따뜻한 눈길을 주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 꿈이 없는 남자 폿과 꿈 많은 여자 진의 러브스토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시티즌 독>은 엉뚱한 캐릭터들과 기발한 상황들이 가득하다. 잘려나가 통조림에 담겨진 손가락은 주인을 알아보고, 죽은 할머니가 도마뱀으로 환생해 의기소침한 폿에게 기운을 불어넣고, 하늘에서 헬멧이 쏟아져 죽은 퀵서비스맨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살아나고, 테디베어는 사람처럼 담배를 피우고 말을 한다. 마치 천연염료를 스크린에 덧붙인 듯한 환상의 색감은 캐릭터를 설명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펜엑 라타나루앙과 함께 타이영화에 새 기운을 불어넣은 위시트 사사나티앙의 신작. 데뷔작 <검은 호랑이의 눈물>에 이어 그는 이번에도 현실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색의 향연을 펼친다. 타이 고유 의상과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색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6개월간의 후반작업을 통해 완성됐다는 <시티즌 독>은 평생 소장하고픈 근사한 그림책 같은 영화다. <모던 타임즈> <매그놀리아> <첨밀밀> 등의 영화 속 장면을 효과적으로 패러디한 것이나 거대한 쓰레기 산 위에서 다시 조우하는 두 남녀의 모습은 좀처럼 뇌리에서 지우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