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5] - 현실 ①
2005-09-29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글 : 박혜명
글 : 김도훈
글 : 이영진
글 : 문석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현실의 등대를 바라보라

Vision3: REALITY - 세상을 굽어보는 등대의 불빛이 부산항을 비춘다. 높은 곳에 올라 울고 웃으며 변해가는 대양의 사람들을 바라보고픈 관객이라면, 등대로 오르는 계단을 겁내서는 안 된다.

해바라기 Sunflower

■ 아버지와 아들과의 30년 전쟁

아버지는 아들에게 폭군이다. 아버지의 자애는 아들에게 폭력이다. 엄마에게 매타작을 당하면서도 골목에서 새총질을 멈추지 않는 열살배기 시앙 양. 존재조차 몰랐던 아버지가 나타나면서 이 꼬마에게도 시련이 찾아든다. “너는 내 두 번째 기회야!” 문화혁명의 격류에 휘말려 10년 하방생활을 해야 했고, 이로 인해 더이상 붓을 들 수 없게 된 아버지는 강제로 시앙 양을 화가로 키우려고 하고, 이때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30년 갈등이 시작된다. 로큰롤과 마약으로 대표되는 문화개방의 파고를 실제 겪으며 혼란의 성장기를 보냈던 감독은 <샤워> <지난날> 등의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새것과 헌것의 충돌을 응시한다. 당을 위해 위증도 서슴지 않던 문화대혁명을 시작으로 아파트를 사려고 위장 이혼을 하는 현재까지, 중국의 지난 30년을 꼼꼼히 돌아본 덕분에 흔한 성장영화의 울타리를 넘어선 작품.

동굴에서 나온 누렁개 The Cave of the Yellow Dog

■ 영적이고 세속적인 평원의 삶이란

몽골인은 죽은 개가 머리를 땋은 소녀로 환생할 수 있도록 꼬리를 머리 밑으로 내리고 묻어준다고 한다. 머리를 땋은 유목민 소녀 난살이 깎아지른 절벽의 동굴에서 누렁개를 찾아낸 것도, 희미한 전생을 기억해서일까. 아버지는 늑대의 일족을 몰고올 것을 염려해 개를 버리려 하고, 소녀는 친구를 보내려는 아버지가 못내 야속하다. 결국 가족이 떠나면서 개는 버려지지만, 주인을 섬기는 개의 본능이 위기에 처한 난살의 남동생을 구하자 아버지는 개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다큐멘터리를 공부한 여류감독 비암바수렌 다바아는 영적이고도 세속적인 평원의 삶을 문화인류학 탐구자료처럼 담담하게 카메라에 담는다. 양은 똥을 싸고, 몽골 아이들은 똥을 가지고 놀고, 몽골의 어머니는 똥으로 불을 지펴 양젖을 데운다. 수천년간 지속된 과거의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동화 같은 소묘.

얼어붙은 땅 Frozen Land

■ 얼어붙은 땅에서 무릎을 꿇은 인간군상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의 핀란드. 500유로짜리 지폐 한장이 어느 해커의 프린터를 통해 세상에 나온다. 지폐는 주정뱅이 교수 아버지에게 쫓겨난 소년의 손에 쥐어지고, 곧 비천한 성격을 지닌 자동차 판매원의 손으로 흘러들어간다. 지폐의 행방은 곧 잊혀지고, 위조지폐로 시작된 인간들의 관계가 거기에 얽혀든다. <레스트리스>(2000)와 <러버스 앤드 리버스>(2002)로 핀란드의 새로운 물결이 된 아쿠 루히미에스는, 톨스토이의 <가짜 티켓>을 원작으로 태피스트리처럼 직조된 비극을 만들어냈다. 비루한 인생들은 타인의 인생을 파괴하며 스스로의 목을 죄고, 결국 사스처럼 전염된 운명은 지폐의 주인인 해커에게 되돌아와 얼어붙은 땅에 뜨거운 피를 쏟아낸다. 2001년 예테보리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얼어붙은 땅>은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운명론에 가까운 우울한 삽화다.

로스트 앤 파운드 Lost and Found

■ 변화의 물결 동유럽의 뉴 제너레이션

<로스트 앤 파운드>는 주목받는 동유럽의 신예들이 ‘세대’라는 주제로 만든 다섯편의 단편영화를 모은 옴니버스영화다. 불가리아의 부모는 아들의 결혼을 위한 성대한 축하연을 준비하고 있고, 아들은 지금 아름다운 프랑스인 아내와 함께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중이다. 하지만 부모와 아들은 서로 다른 대륙에서 살아가고, 그들의 단절된 전통을 이어주는 것은 미약하게 들려오는 휴대폰의 목소리다. 루마니아의 시골 소녀는 아픈 엄마를 방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수도인 부쿠레슈티 나들이에 나섰다. 소녀는 엄마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에게 칠면조를 뇌물로 바쳐야 하지만, 동그라미와 네모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한 칠면조는 소녀의 유일한 친구다. 무스타르는 다리 하나를 경계로 보스니아와 유고슬라비아로 갈린 마을. 부모들은 죽음의 기억을 안고 살지만, 전후세대인 소녀들은 똑같이 제니퍼 로페즈를 좋아하는 친구일 뿐이다. 유고슬라비아의 늙은 트램(노면전차) 차장은 스튜어디스로 일했던 화려한 젊은 날을 속으로 품은 채 살아간다. 하지만 딸은 과거의 기억을 벗어버리라 외치며 남자를 따라 브라질로 도망치겠다고 선언한다. 스트레스와 과거의 회한이 북받쳐오른 차장 아줌마는 트램 조종석에 앉아 폭주를 시작한다.

다섯명의 신예들은 ‘세대’라는 거대한 주제 아래서도 결코 긴장하거나 정색하지 않고 신랄한 유머 감각을 통해 동유럽인의 정체성을 맛깔나게 풀어낸다. 단편의 힘을 확실히 보여주는 <로스트 앤 파운드>는 노쇠한 작가주의의 성지, 동유럽영화의 미래에 새로운 희망을 싣는 협주다.

반갑지 않은 사람 Persona Non Grata

■ 그것이 진실 맞습니까

진실은 마주치기 어렵다. 바르샤바에 주재하는 늙은 폴란드 대사 빅토르는 아내 헬레나가 병으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오랜 친구 올레그와 헬레나 사이의 관계의 진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옛 KGB 요원, 현 러시아 외무부 차관인 올레그는 빅토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빅토르의 착각이었을까. 그는 러시아-폴란드 무기협정 성사를 돕기 위해 임시 파견된 젊은 폴란드 영사 부부에게 아버지 같은 호의를 베풀었다가 협정이 어그러지자 영사 부인 옥사나가 올레그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한다. 이 영화는 개인에게 유의미한 진실의 경계를 묻는다. 빅토르는, 올레그와 헬레나의 관계를 풀지 못했지만 올레그와 옥사나의 관계는 풀려고 적극 덤빈다. 원하는 성과는 거두었지만 그것이 진실인지 여전히 혼란스럽고, 올레그는 또 한번 입을 다문다. 빅토르는 무력하게 물러선다. 지적인 자의식이 한랭건조한 형식 안에 밀도있게 담긴 이 영화는 그 마지막 순간 위에 자신의 모든 무게를 덜컥 올려놓는다.

천국을 향하여 Paradise Now

■ 자살 테러리스트들의 고백과 설전

서방 언론은 몸에 폭탄을 두르고 이스라엘로 향하는 젊은 테러리스트를 비난하지만, 물어보진 않는다. 스무살 나이에 왜 죽음과 살인을 택했는지, 무엇을 얻고 싶은 건지. <천국을 향하여>는 삶을 시작조차 해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그 답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영화다. 그리고 드문드문 드러나는 대답 속에서, 현실의 지옥보다는 비록 허구일지 몰라도 마음속의 천국을 택하겠다는 어린 선언이 마음에 꽂혀온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드와 할레드는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한 보복 테러를 수행하게 될 전사로 선택받는다. 그들은 폭탄 벨트를 착용하고 이스라엘로 향하지만, 국경을 넘는 순간 사소한 사고가 생겨 일이 틀어지고 만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천국을 향하여>는 자살테러를 비호한다는 오해를 받았지만, 제작자 아미르 하렐은 이 영화는 “팔레스타인 점령의 비극과 그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을 파괴하는 방식”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말로 <천국을 향하여>를 옹호했다. 이 영화가 단 한순간도 이스라엘의 입장에 서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희생과 희생이 악순환을 이룬다는 지적, 살아남기 위해 이스라엘에 협력할 수밖에 없는 끄나풀의 비극, 테러에 무방비로 노출된 선량한 시민들의 모습은 이 전쟁을 끝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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