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3] - 작가 ②
2005-09-29
글 : 김도훈
글 : 이영진
글 : 문석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글 : 박혜명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Princess Raccoon

■ 82살 스즈키 세이준의 만화경 같은 오락가극

1940, 50년대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오락가극 <너구리 저택>을 리메이크한 작품. 자기애에 불타오르는 군주 아즈치 모모야마는 한 예언가로부터 아들인 아메치요가 아버지보다 더 미남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부와 명성은 물론 미모마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친아들인 아메치요를 산에 가져다버리기로 한다(이미 자신의 아름다움을 추종하지 않는 아내를 산에 버린 적이 있는 인물이다). 버려진 아메치요는 산에서 당나라에서 온 너구리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너구리는 인간과 사랑에 빠질 수 없다는 것이 너구리 세상의 불문율. 두 사람의 로맨스는 곧 수많은 장벽에 가로막히고 만다.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은 형식으로만 이루어진 정신없는 만화경이다. 하지만 그 형식조차도 일관성이 없다. CG로 만들어진 세계는 일본의 전통적인 병풍 그림을 연상시키지만 때로는 서양의 유화나 중국 수묵화처럼 보이고, 중국어와 일본어가 뒤섞여 있는데다, 음악은 엔카와 발라드와 힙합을 넘나든다. 배우진도 국적과 가상세계를 넘나든다. 너구리 공주는 중국 배우 장쯔이가, <피와 뼈>와 <밝은 미래>의 오다기리 조가 순진한 미청년 아메치요를 연기한다. 엔카의 여왕인 고 미소라 히바리가 CG를 통해 부활하기도 한다.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을 진심으로 즐기고 싶다면, 형식과 이야기에 대한 영화적 강박을 모조리 버리고 가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 괴상한 뮤지컬은 즐기기 위한 오페레타(경희극)이며, 벚꽃 아래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보는 오락가극의 재연에 가까운 경험이다.

달은 다시 떠오른다 The Moon Also Rises

■ 차갑고 단정한 집을 덥히는 한여름 열정의 열기

뜨거운 입김이 동반되는 사랑은, 앳되고 말간 얼굴의 스무살 초반 여인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참한 딸 시리안을 엄하게 키워온 엄마 바오카이는 둥그렇고 환한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완벽한 남자는 없어. 그런 남자를 실제로 만난다면 두려울 거야”라고 읊조리는 여인이다. 그녀는 딸의 애인 추청이 본토 사람이라며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딸 앞으로 오는 연애편지를 가로채 읽다가 자신이 20년 동안 잊고 지낸 애틋하고도 열정적인 사랑의 감각에 몸이 달아오름을 느낀다. <달은 다시 떠오른다>는 레이스 장식 하나 없는 두 여인의 옷차림마냥 절제된 표현 양식을 추구하는 영화다. 그러나 그 속에서 다루어지는 열정은, 그들의 하얀 명주옷 속 살덩어리를 붉게 덥히는 한여름 더위만큼 뜨겁다. 이 정중동의 에너지를 확장해가는 린청셩의 연출력이 시종 평형을 유지하는 동안, 바오카이를 연기한 여배우 양귀매의 표정근은 자로 잴 수 만큼 섬세하게 변화한다.

흔들리는 구름 The Wayward Cloud

■ 섹스, 목마름 그리고 차이밍량의 고독

모든 것이 말랐다. 대만은 극심한 가뭄으로 버썩버썩 말라간다. 그리고 두개의 메마른 영혼이 있다. 싱차이는 공중화장실에서 몰래 물을 길어나르고, 포르노 배우인 샤오캉은 야밤에 아파트 옥상의 물탱크에서 시원하게 샤워를 즐긴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어쩌면 이 사람이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다. 하지만 싱차이는 샤오캉이 포르노 배우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흔들리는 구름>은 차이밍량의 98년작인 <구멍>과 이란성 쌍둥이처럼 대구를 이루는 영화다. 건기와 우기를 다루는 두 영화는 똑같이 주인공들의 환상을 대변하는 생뚱맞은 뮤지컬 장면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흔들리는 구름>은 <구멍>보다 훨씬 집요하게 고독을 파고든다. 차이밍량은 외로운 도시가 앓는 마음의 병과 열쇠를 잃어버린 인간의 황폐한 속내를 병적인 이미지로 토해내고야 만다. 차이밍량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언제나 그렇듯, 10분 넘게 이어지는 포르노 촬영장면은 고통스럽게 보는 이를 울린다.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 겨울보다도 차가운 상실의 느낌이 밀려온다

빚독촉에 시달리면서 편집을 하고 있는 영화감독 김은 사촌형 일규의 연락을 받고 고향 속초에 간다. 일규는 그에게 한국전쟁 때문에 헤어진 남편을 만나려는 어머니의 중국 여행에 동반해주기를 부탁하지만, 그가 속초에 도착하고서야 여행이 연기되었다고 알려준다. 민박에 짐을 푼 김은 버스 안에서 잠깐 마주쳐 마음이 끌렸던 여자 영화를 다시 만난다. 그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으려는 그녀를 따라 무작정 태백에 가고, 뜻하지 않은 여행은 사라진 자신의 고향을 찾는 길로 이어진다. 실향민들이 북으로 가는 철도가 연결되기를 기다려온 그의 고향은 그 소망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간결한 스토리를 가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부산에 머물면서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을 만들어온 전수일 감독의 네 번째 영화다. 그의 영화들은 정밀하지만 관념적이었고, 허공을 부유하는 듯했다. 그러나 황혼녘을 의미하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그 시간이면 느끼게 되는 알 수 없는 애틋함처럼, 슬프고 안타까운 영화다. 전수일 감독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영화 속에서 편집 중인 영화는 전수일 감독의 <내 안에 우는 바람>이고, 전수일 감독의 고향 또한 속초다). 찾아야 하지만, 결코 되찾지 못할 무언가, 그로 인해 영원히 불완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삶. 한없이 길 위를 걷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애초 목적지 없는 여행을 떠난 탓에 주저앉고 마는 남자와 여자의, 또 다른 폐곡선을 그려간다.

사랑하기 위한 용기 The Courage to Love

■ 노래를 따라 떠도는 사랑 이야기

<남과 여> <아름다운 이야기>의 클로드 를르슈가 만든 멜로드라마. 쌍둥이 자매와 그들의 연인, 그 연인들의 연인들 사이에 얽힌 사랑의 그물을 오가며 노래하듯 엮어낸 이야기들을 담았다. 재즈클럽의 바텐더 안느는 클럽에서 노래하는 중년의 이탈리아 남자 마시모에게 관심이 있다. 그는 파트너이자 연인이었던 샤가 혼자 레코드를 내기 위해 떠난 뒤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안느의 쌍둥이 자매 클레멘틴은 여배우 사빈느의 저택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와 사빈느의 남편은 파트너에게 배반당한 아픔을 공유하다가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랑하기 위한 용기>는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그때그때 감정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영화다. 원인보다 결과가 먼저 나오고, 낯선 인물들이 끼어들고, 사랑은 혼돈에 빠진다. 그러나 프랜시스 레이의 음악은 그 모두를 감싸안으며 이 기묘한 영화를 풍요로운 뮤지컬로 만들어준다.

PIFF가 추천하는 아시아 걸작선

아시아 걸작 30편을 한자리에

<대도시>
<클로즈업>

섹션명 그대로, 아시아 각국의 걸작 30편을 한데 모은 보양식 성찬. “지난 10년은 아시아영화의 역사를 꼼꼼히 짚기에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프로그래머들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거장을 우선 꼽았다. 키르기스스탄의 악탄 압디칼리코프, 베트남의 마니 라트남과 당낫민, 스리랑카의 레스터 제임스 페리어스, 필리핀의 리노 브로카, 타지키스탄의 바흐티아르 쿠도이나자로프, 카자흐스탄의 아미르 카라쿨로프, 인도의 리트윅 가탁, 방글라데시의 므리날 센, 우즈베키스탄의 나비 가니예프, 몽골의 M. 루브산잠츠 등 그동안 국내에서 접하지 못한 거장들의 영화가 한꺼번에 부산에 몰려온다. 잘 알려진 거장들의 경우에도 “영화사적으로 중요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소개된” 작품을 배려했다. 이 기준에 따라 샤티야지트 레이의 <대도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 이마무라 쇼헤이의 <신들의 깊은 욕망>, 허우샤오시엔의 <연연풍진>, 스탠리 콴의 <완령옥>,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순수의 순간>, 에드워드 양의 <공포분자>, 스즈키 세이준의 <지고이네르바이젠> 등이 영화제 동안 부산 프리머스, 메가박스 등에서 한 차례씩 상영회를 가진다. 관객의 호응이 뒤따른다면, 흔적이 희미한 아시아 영화사의 첫장을 새로 쓰겠다는 영화제쪽의 의지는 10주년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매년 지속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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