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8] - 대중
2005-09-29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글 : 박혜명
글 : 김도훈
글 : 이영진
글 : 문석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오이소, 보이소, 느끼소

Vision5: POP - 대중영화의 즐거운 수족관이 부산항에 열렸다. 만화경 같은 영화의 순수한 매력 앞에서 시네필과 자갈치 아지매의 경계는 무너진다. 사랑스러운 관상어들을 구경하러, 오이소.

퀸즈 Queens

■ 그 남자들과 그 남자들의 사정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게이 단체 결혼식. 그곳으로 향하는 다섯명의 엄마들이 있다. 판사인 헬레나의 아들 위고는 섹스중독증에 걸린 누리아의 아들 나르시소와 결혼할 예정이고, 영화배우 레이제스의 아들은 정원사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다. 결혼식이 개최되는 호텔 사장 마그다의 아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온 뻔뻔스런 식당 주인 오펠리아의 아들과 백년가약을 맺을 셈이다. <퀸즈>는 주책없을 정도로 대책없는 퀴어코미디다. 엄마들은 아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힘겨워하는 과정을 넘어선 지 오래고, 그들의 목표는 어떻게든 단체 결혼식을 사고없이 치러내는 것. 물론 다섯명의 엄마와 한명의 아빠, 여섯명의 아들에다 개 한 마리가 쉴새없이 떠들어대니 일이 제대로 되어갈 리 없다. 당대 최고의 스페인 중견 여배우들의 노련한 앙상블이 돋보이는, 유쾌하고 정신없는 스페인산 코미디영화다.

컨벤셔니어즈 Conventioneers

■ 사랑이냐 신념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공화당원 데이비드와 민주당 지지자 리아는 가을, 뉴욕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기간에 조우한다. 남자에겐 아내가 있고 여자에겐 약혼자가 있지만 두 사람은 학창 시절의 추억을 더듬다 사랑에 빠진다. <컨벤셔니어즈>는 컵도 같이 쓰지 않는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의 러브스토리를 소재로 ‘사랑이냐 신념이냐’하는 선택의 문제를 던진다. 질문 자체는 중한 것일지라도 이 영화가 답을 풀어가는 방식은 적당히 현실적이며 적당히 감성적이다. 실제로 지난해 열린 미 공화당 뉴욕시 전당대회 기간 중 촬영된 이 영화의 수미를 장식하는 전당대회 및 시위장면들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리얼리티를 보여주지만 그것이 핵은 아니다. 신념과 바꿀 만했던 사랑의 끝에서 나온 데이비드와 리아의 선택은,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의 그것이 아닌 남자와 여자의 그것이다. <컨벤셔니어즈>는 과장도 냉소도 자제하면서 우리가 수긍할 만한 현실적인 로맨스를 담아낸 멜로드라마다.

린다 린다 린다 LINDA LINDA LINDA

■ 한때 젊음으로 빛났던 모든 이들을 위하여

반짝이는 여고생들의 축제를 다정하게 기록한 수작. 멤버간의 불화와 한 멤버의 부상으로 여고생 밴드가 위기에 빠진다. 카리스마 있는 기타리스트 케이는 보컬을 찾다가, 지나가던 한국인 유학생 손을 발탁한다. 학교 축제에서 공연하기 위해 80년대 인기그룹 블루 하트의 노래를 맹연습하는 소녀 밴드. 아직 일본말이 서툰 손은 노래방에서 혼자 연습을 하고, 케이는 눈물나도록 행복한 꿈을 꾸고, 자그마한 로맨스도 일어난다.

<후나키를 기다리며>로 부산영화제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던 야마시타 노부히로는 나른한 유머 감각을 지닌 감독이다. 그의 소녀들은 늘어져 있다가도 팔짝거리며 후렴구 “린다 린다 린다”를 열창하고, 수다를 쏟아내기보다 엉뚱한 대사 몇 마디로 진심을 표한다. 손을 맡은 배두나가 고유의 캐릭터 그대로 영화에 녹아 있는 모습도 놀랍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도 모르는 채 보컬이 된 그녀가 한밤의 텅 빈 무대에서 한국말로 멤버를 소개하는 장면은 빛나는 청춘의 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 The Unforgiven

■ 군대란 정글에서 밀려난 청춘들의 슬픈 연가

<용서받지 못한 자>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한 줄기씩 교차하면서 비극에 다가가는 미스터리다. 무더운 여름밤, 태정은 휴가 나온 군대 후임이자 중학교 동창인 승영의 전화를 받고 그를 만난다. 군복도 갈아입지 않은 승영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서 자신을 귀찮아하는 태정에게 따라붙는다. 두 청년이 함께 보내는 하룻밤 사이사이에 그들의 군대 시절이 삽입된다. 태정은 고지식하여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승영을 감싸주곤 했지만, 그 행동은 내무반 군인 대부분을 승영의 적으로 돌리는 상황을 낳는다. 승영은 태정이 제대한 다음에 결코 닮지 않겠다던 고참들에게 빌붙어야만 했다.

군인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군대가 어떤 곳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휴가 나온 군인들의 초조한 말투와 공허한 느낌, 새삼스럽게 담배를 배우게 된 사연 같은 것들을 통해, 돌아서 그곳을 건너다볼 뿐이다. 그러나 ‘군대 이야기’라고 손쉽게 설명할 수 있는 <용서받지 못한 자>는 학교나 직장이어도 괜찮았을 위계와 처세와 적응의 신랄한 단면도이기도 하다. 잘해주면 기어오른다, 네 말이 맞기는 해도 군대는 그런 곳이 아니다. 이런 군대 생활의 명제들은 무사히 살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익혀야만 하는 잠언이다.

윤종빈 감독은 이 영화가 장편데뷔작인데도 생존의 규칙과 미스터리, 비극에 짓눌린 젊은이의 선택을 밀도있게 이어붙였다. ‘고문관’이라고 할 만한 친구에게 잘해주려다가도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는 짜증, 승영이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관한 궁금증, 반복되는 대사가 던지는 복선은 단순하고 짐작할 만한 이 영화의 스토리를 끝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로 만든다.

몽골리안 핑퐁 Mongolian Ping Pong

■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사탕인가. 핥아도 본다. 알인가. 품어도 본다. 몽골 소년 빌리케, 다와, 에르구투 세 친구에게 고민이 생겼다. 어느 날 발견한 흰 탁구공의 정체를 놓고 이들은 갑론을박을 펼치다, 결국 할머니의 말을 듣고 정령들의 보물이며 행운의 부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던 중 유랑극단이 가져온 TV를 통해 이들 삼총사는 문제의 흰 물체가 중국의 국기(國技)인 탁구에 쓰이는 공임을 알게 되고, 소중한 물건이니만큼 하루빨리 베이징에 전달해야 한다며 고비사막을 넘으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한다. 호들갑을 떠는 건 아이들 뿐일까. 다와의 아버지는 안테나 접시판 대용으로 양철 쟁반을 매달고서 TV를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빌리케의 아버지는 불쏘시개로 쓰던 유명 잡지에서 근사한 집을 보고 꿈을 꾸고, 빌리케의 누나는 유명 배우가 되기 위해 대도시에 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얼굴 누런 부시맨을 만들어 억지 웃음을 유발하려고 애쓰는 대신 멀찍이 떨어져서 조금씩 문명에 자리를 내주는 초원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영화.

봄의 눈 Spring Snow

■ 눈송이도 숨을 죽이는, 그러나 격정적인 사랑

<고>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유키사다 이사오는 매번 색채가 다른 영화를 만들어왔다. 어쩌면 원작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듯도 한 그의 신작은 <봄의 눈>. 탐미주의로 이름 높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각색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부유한 귀족가문의 자제 기요아키는 어린 시절 친구인 사토코를 사랑하면서도 그 감정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먼저 마음을 드러낸 사토코에게 매몰차게 굴고, 사랑에 겁먹어 소식을 끊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사토코가 천황의 주선으로 왕자 중 한명과 약혼하게 되자 숨어 있던 사랑은 급류처럼 그를 휘감는다. 평범한 러브스토리인 <봄의 눈>은 귀족 집안의 가풍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배우들의 단아한 자세와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으로 시선을 붙드는 영화다. 화려한 의상, 눈 속에 파묻힌 일본식 가옥, 나무들의 푸른 그늘 아래 흐르는 물줄기, 그리고 쓰마부키 사토시와 다케우치 유코를 볼 수 있는 영화.

차밍스쿨 & 볼룸댄스 Marilyn Hotchkiss Ballroom Dancing & Charm School

■ 차차차와 말렝게가 영혼을 구원하리니!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프랭크는 아내가 자살한 뒤 아픈 기억을 속으로 머금고 살아가는 빵가게 점원. 아침 일찍 빵배달을 나가던 그는 고속도로에서 참혹한 자동차 사고를 목격한다. 부서진 자동차 안에는 어린 시절 사랑하는 여자와의 약속장소로 향하던 스티브가 죽어가고 있었고, 그는 프랭크에게 대신 마릴린 호치키스 댄스 스쿨로 가서 여자를 만나달라고 부탁한다. 내키지 않는 제의에도 불구하고 고인을 위해 댄스 스쿨을 찾은 프랭크. 스티브의 여인은 그곳에 없었다. 하지만 프랭크는 자신도 모르게 춤의 세계에 빠져든다.

배우 출신인 랜덜 밀러 감독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구식의 댄스 스쿨을 통해 죽은 자와 산 자의 상처를 포근히 감싸안는다. 프랭크는 죽은 아내의 환영을 벗어던지고, 어머니의 댄스 스쿨을 운영하던 미스 호치키스는 어머니의 이름을 벗고 자신의 이름을 되찾으며, 댄스 스쿨의 회원들은 각자가 짊어진 과거의 무게를 딛고 현재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영화는 종종 플래시백을 통해 죽어가는 스티브의 어린 시절 기억, 60년대의 순진하던 미국을 되살려낸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스티브의 과거가 기억의 필터를 거쳐 정제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차밍스쿨 & 볼룸댄스>에는 이상화된 추억마저도 꼭 껴안아주고 싶도록 만드는 사랑스러움이 있다. 차차차와 말렝게의 리듬에 맞춰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는 호화 캐스팅(로버트 칼라일, 마리사 토메이, 메리 스틴버젠, 존 굿맨, 숀 애스틴, 도니 월버그)도 자그마한 인디영화에 단단한 힘을 싣는다.

점프 보이즈 Jump! Boys

■ 울보라도 좋다! 멋지게 뛰어올라 아름답게 착지해다오!

감독의 친형은 초등학교 체조선수들을 가르치는 코치다. 여섯살부터 여덟, 아홉살까지, 듬직한 큰형에서 날마다 울어대는 울보까지, 일곱명의 조그만 소년들. 감독은 뜀틀과 도마와 평행봉을 가지고 노는 이 아이들의 나날을 기록하고 때로는 “코치가 못되게 굴지는 않니?”라는 짓궂은 질문도 던지면서 전국대회까지 따라다닌다.

<점프 보이즈>는 다큐멘터리지만 극영화의 기법을 차용해 재미를 만들어낸다. 아이들 주변에 크레파스 그림 같은 테두리를 둘러주거나 애니메이션을 삽입하고, 최고의 장기를 설명할 때는 슈퍼맨처럼 날도록 연기도 시킨다. 그러나 가장 큰 재미는 역시 체육관에 풀어만 놓아도 생명력을 뿜어내는 꼬마 체조선수들이다. 모의대회를 할 때마다 꼴찌를 하고 도마 위에서 한 바퀴도 돌지 못하는 여섯살 어린아이의 눈물 글썽이는 눈동자는, 조금 미안하기는 해도, 웃기고 귀여워 마음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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