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산업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대작의 제작비 규모도 올라가고 있다. 이젠 순제작비 기준으로 80억원은 넘어야 대작으로 분류되는 분위기다. <괴물> <중천> <한반도>는 공히 100억원에 가까운 순제작비를 들이는 영화들이다. 세편 모두 단순히 규모와 스펙터클을 나열하기 위해 그 엄청난 돈을 쓰는 건 아니다. <괴물>은 CG로 만들어진 판타지를 통해 한국사회의 리얼리티를 드러내며, <중천>은 중국 로케이션과 다양한 미술작업으로 중간계라는 신비의 공간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하고, <한반도>는 대규모 로케이션을 통해 가상의 역사를 재현함으로써 현재의 국제 질서와 한반도의 운명을 보여준다. 2006년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은 선해외판매나 해외마케팅 요소를 영화 속에 포함시켜놓아 엄청난 리스크를 피해가려 노력하고 있다.
‘한강에서 괴물이 나온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이 만든다.’ 이 두 문장만으로 많은 사람들을 흥분케 한 프로젝트 <괴물>은 일반적인 할리우드 괴수영화와는 다르다. 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데서부터 그 차별성은 명확해 보인다. 헛폼을 잡거나 힘들어간 대사 한마디 읊지 않는 이 비루한 캐릭터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마음에 동조됐던 봉준호 감독의 분신들로 보인다. 한강 둔치 매점에서 빈둥거리며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 박강두(송강호)부터 가족 중 유일한 대졸자라고 거들먹거리는 남일(박해일), 양궁을 할 때를 제외하면 뭔가 나사 풀린 듯한 느낌의 남주(배두나), 그리고 이들을 모두 건사해야 하는 아버지 희봉(변희봉)까지. 하지만 이들의 나른한 삶은 뜬금없이 괴물이 등장함으로써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강두의 딸 현서(고아성)가 괴물의 입속으로 통째로 들어가는, 그야말로 판타스틱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이 가족은 괴물과 맞상대를 펼친다. 그렇다고 이들이 최첨단 장비를 동원해 현란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리는 없는 일. 이 우스꽝스럽지만 애처로운 분투는 재앙을 맞은 우리네의 모습을 거울로 비추듯 적나라하게 보여줄 것이며, 가족을 지키기 위한 소시민적 의지 또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80년대의 공기를 스크린 안으로 포착해냈듯, 이 영화 안에 봉준호 감독의 ‘시대정신’이 스며들 것 또한 확실하다. 볼거리? 총 110억원의 순제작비 중 미국 오퍼니지(CG), 호주 웨타 워크숍(크리처디자인) 등의 비주얼 관련 예산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니 걱정은 붙들어매시길.
그곳은 죽은 자들의 땅이다. 육체가 죽은 뒤 영혼이 49일 동안 머물며 승천을 준비하는 공간인 여기는 ‘중천’이라 불린다. 통일신라 말기 왕실 퇴마(退魔)부대인 처용대 소속 병사 이곽(정우성)은 반란에 참여했다가 다른 동료들이 모두 참수당하는 와중, 홀연 중천으로 빨려들어간다. 산 육신으로 죽은 자들의 땅에 발을 디딘 그는 오래전 죽은 연인과 똑같이 생긴 여인 소화(김태희)를 만난다. 소화는 영혼들의 반란으로 혼란에 빠진 중천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 죽은 애인과 이름과 성격 모두가 다름에도 소화에게서 사랑을 느낀 이곽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반란군에 맞서려 한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문제의 반란군은 당시 관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처용대 동료들이다. 이곽은 소화와의 사랑을 택할 것인가 동료와의 의리를 지킬 것인가. 중국 올 로케이션으로 진행되는 <중천>은 <무사>에 참여했던 중국 스탭들이 다시 뭉쳐 만드는 장대한 스케일의 판타지 무협영화다. <무사> 때 김성수 감독의 연출부였던 조동오 감독의 감독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순제작비 90억원 정도가 들 초대형 프로젝트다. 10월 말 촬영에 들어가 내년 2월쯤 일정을 마치게 된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 남과 북의 노력 속에서 드디어 한반도가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된다. 이 감격적인 상황, 침략 본능을 버리지 못한 일본이 딴죽을 건다. 그들의 공작은 통일을 방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반도를 위기상황에 빠지게 한다. 이제 100년 넘게 고이 간직돼왔던 역사적 비밀을 파헤치지 않으면 한반도는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최악의 상황이 된 것이다. 조재현이 이 수수께끼를 풀려는 사학자로, 강신일이 그를 돕는 도굴꾼으로 출연하며, 안성기가 한국 대통령, 차인표는 국가정보원의 요원으로 각각 등장하게 된다. <한반도>는 미스터리 요소를 가미한 가상역사극이라는 점에서 <다빈치 코드>를 떠올리게 한다. 뜻하지 않은 살인사건에 휘말린 <다빈치 코드>의 로버트 랭던처럼, 조재현이 연기하는 이 사학자는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조선왕조와 함께 무덤 안에 파묻혀 있던 어떤 비밀을 밝혀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대형 액션장면과 다양한 특수효과들이 등장할 이 영화의 순제작비는 100억원 정도. 현재 10회차 정도 촬영이 이뤄진 상태다. 당초 차기작으로 <택스>를 준비하고 있던 강우석 감독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 초고를 보면서 방향을 급선회했다. 강우석 감독은 “흘러가는 대로 미래를 꿈꾸기보다 과거를 되새겨보면서 현재를 살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제작 배경을 설명한 바 있다. 사회·정치적 사안을 직접적으로 건드린 <실미도> <공공의 적2>와 달리 판타지 요소를 취하고 있지만, 이 영화 또한 강 감독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쓰여질 것으로 보인다.
문제적 감독의 모호한 프로젝트
임권택,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의 신작들
2006년 한국 영화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을 ‘문제적 감독’들의 프로젝트는 아직 미궁 속에 있다. 사람들의 기대감을 더욱 자극하기라도 하려는 듯, 이들 영화는 아직 윤곽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조바심만을 자아내고 있다.
우선, 거장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가 될 <천년학>은 알려진 대로 소설가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원작은 <서편제>가 포함된 <남도사람> 연작 중 하나로, 송화와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던 오빠가 훗날 송화를 찾아 선학동이란 곳을 찾아온 이야기를 그린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이 이청준 작가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이야기는 임 감독의 방식대로 크게 바뀌었다고 알려진다. 작은 예로 주인공 남자의 연령대가 원작의 중년 남성에서 30대로 내려갔다는 것. 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 영화는 “임권택 감독 작품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순수 멜로영화의 모습”을 띨 전망이다. 애초 올 여름부터 촬영에 돌입할 예정이던 이 영화는 아직까지도 구체적인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사쪽은 임 감독이 시나리오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상당한 분량의 장면이 전남 장흥과 전북 부안 등지에 만들어진 오픈세트에서 촬영될 예정이며, 오랜 영화적 동지 정일성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게 된다.
<오아시스> 이후 4년 만에 영화를 만드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가제) 또한 관심이 쏠리는 작품. 경남 밀양을 배경으로 피아노 학원에서 교습을 하는 여자와 카센터 사장인 남자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는 이 영화를 놓고 현재 이창동 감독은 시나리오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한나 프로듀서에 따르면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존재할지 여부도 아직 결정나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11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는 당초의 계획은 다소 미뤄지게 됐다. 그가 굳이 밀양을 배경으로 하게 된 것은 지난해 말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밀양(密陽)이라는 이름이 ‘secret sunshine’의 뜻을 갖고 있다는 점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말로 미뤄볼 때 그 ‘비밀스런 햇살’은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될 것이 틀림없다. 이 영화는 이창동 감독이 설립한 제작사 파인하우스필름에서 만들어진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도 2006년 안에 빛을 볼 것이 확실하다. 그는 애초 늦여름쯤 한 작품을 찍기 시작하려 했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 일단 미룬 뒤, 현재 새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올해 찍으려던 작품이 여름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내년 4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신작은 봄과 관련된 영화다. 그와 절친한 한 영화평론가는 “특정 계절이 이야기와 관련된다기보다는 계절의 공기를 영화 속에 품겠다는 이야기”라고 전한다. 현재 프랑스 등 해외 투자자들과도 긴밀한 논의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김기덕 감독은 애초 예정됐던 <총>을 미뤄놓고 다른 작품을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평소 능력으로 볼 때 2006년에도 1편 이상이 만들어질 것은 확실하다.
박찬욱 감독의 HD프로젝트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스스로를 전투용 사이보그라 착각하는 망상증 소녀의 이야기. 애초 올해 안에 촬영을 시작하려던 이 영화는 시나리오 작업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질 예정인 강제규 감독의 신작은 아직도 안개 속에 있다. SF장르라는 이야기만 들릴 뿐, 제목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 관계자는 “내년에 촬영에 들어가지만, 개봉은 2007년일 것”이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