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세상에서 가장 천진한 ‘선수’의 웃음, <소년, 천국에 가다>의 박해일
2005-11-11
글 : 이다혜
사진 : 오계옥

시간도 박해일의 표정은 비껴간 것 같았다. 7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삼대에 걸쳐 운영된 작은 이발소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동안, 박해일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는 장난감을 선물받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유쾌함이 넘실거렸다. 사람들로 둘러싸인 좁은 공간에서 천진한 표정을 요구받던 그는 멋쩍은 듯 웃다가도 초등학생 같은 표정을 천연덕스럽게 지어 보였고, 카메라가 다른 곳을 향해 있는 순간에는 오롯이 혼자 방 안에 있는 것처럼, 혼자만의 놀이를 생각해내는 양 골몰한 얼굴이 되곤 했다. 부모님과 누나가 집에 돌아오기 전, 어두운 방 안에서 불도 안 켜고 가상의 스파이더맨과 대결하곤 했다던 어린 시절에서 그는 멀리 떠나온 것 같지 않았다. <연애의 목적>에서 “지금, 젖었어요?”라고 대담하게 작업의 기술을 펼쳐 보이던 그는 어디로 갔을까 하고 있는데, 그가 씩 웃는다. “(사진을) 여자 목욕탕에서 찍는 건 어때요?”

<소년, 천국에 가다>에서 박해일은 우연한 사고로 순식간에 어른이 되어 삼십대 미혼모 부자(염정아)를 향한 연정을 불태우는 어른 같은 꼬마 네모를 연기했다. 일상적 연기가 요구되던 이전 영화들과 달리 이번에는 환상적인 면이 강해서, 만화책을 읽듯 시나리오를 맛나게 읽고 출연을 결정하고는 아이들의 얼굴을, 희로애락에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그 표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애인 척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집 근처 초등학교로 자전거를 타고 가 하굣길 아이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톰 행크스 주연의 <빅>을 다시 보면서 어린 시절을 아리게 떠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연기의 답은 자신 안에 있었다. “연기자에게는 자기만의 터득이 있다. 영화의 틀을 잡는 건 감독님이지만 감정적으로 접근해 관객이 이야기를 믿게 하는 건 배우다. 어디까지 내 느낌으로 할까 물음표를 던지고 시작했는데, 그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이 오더라.”

“교장 선생님을 가장 가까이서 본 경험은 초등학교 때 제기차기로 전교 7등 먹었을 때”, “어렸을 때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그때는 역시 터미네이터! WWF(프로레슬링) 보고 학교에서 애들이랑 흉내내다가 다치고 그랬다”고 파안대소하며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박해일에게 영화는 활짝 열린 놀이터다. 극중인물을 몸에 고스란히 익힌 채, 스탭 수십명이 둘러싸고 쳐다보는 것은 까맣게 잊고 혼자 ‘놀듯, 지르듯’ 연기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모습을 잘 찍어줄 때가 가장 즐겁다는 것을 보면. 촬영하면서는 연상인 염정아에게 ‘염 선수’라고 부르며 술잔을 기울였다지만 “<소년, 천국에 가다>는 사실, 염정아씨 영화에요”라며 정색할 때는 어른 같은 꼬마 네모가 고스란히 겹쳐졌다. 어릴 적 옆집 장난꾸러기 소년과 수다를 떠는 듯했던 그와의 대화는 그래서 자연인 박해일과 연기자 박해일을 혼동하게 만들었다. 연기를 하는 것 같지 않고, 원래 그는 ‘그런 사람일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연애의 목적> 개봉 뒤, 집에 가다가 길거리에서 두 연인이 그를 알아봤는데, 여자의 “박해일이다”라는 말에, 술에 취한 남자가 “야, 이 변태새끼야!”하고 지나갔다는 일화는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온 국민의 의심을 산 연쇄살인 용의자로 출연했던 <살인의 추억>에서 침묵으로 포효하는 그의 눈동자는 송강호의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대사로 이어졌다. 누구라도 변명을 해주어야 할 것 같았던 그 눈동자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순수함과 악마성이 공존하고, <소년, 천국에 가다>에서는 유년과 노년이 공존하는 그 눈빛을 어떻게 영화가 욕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박해일에게 영화는 하는 게 아니라 ‘빠지는’ 것이다.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자기 시간을 갖는 것, 안 좋게 응집된 것을 풀어줄 수 있는 술, 일상에 대한 건강함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그는, “더 잘 괴로울 수 있다면, 그 괴로움을 승화시킬 수 있다면… 빨리 그 모든 걸 느껴버리고 싶은 욕심이 든다”고 조바심쳤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장서처럼 다양하고 많은 영화를 찍고 나면 ‘나의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말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대감이 치솟는다. “이제 서른인데, 서른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두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달리자. 달리다보니 어느새 서른 지났네, 그렇게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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