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7회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4]
2006-04-26
글 : 씨네21 취재팀
색다른 재미를 찾는 모험가를 위한 선택

과감하게 질러보아요~

인터넷이 안 돼서 심심하지 않냐고요? 친구가 없다고 외롭지 않냐고요?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영화보기의 진수라면 혼자놀기가 아닐까요? 전주까지 내려와서 남들 다 보는 영화나 본다면 기차표가 아깝죠. 어깨를 넓게 펴고 조금은 과감하게 질러보세요. 10여분간 롱테이크가 지속되거나, 황당한 사건에 입이 떡∼ 벌어져도 영화관을 나설 때는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할 겁니다.

폴리스 비트 Police Beat
로빈슨 드버/ 미국/ 2005년/ 81분/ 시네마스케이프

범죄를 다룬 동명의 칼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폴리스 비트>는 이질적인 것들이 빚어내는 매력으로 가득한 영화다. 백인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캠핑을 떠난 뒤, 세네갈 출신의 흑인 경찰 Z는 익사체와 죽은 새, 살해당한 누군가의 시체를 처리하고, 정신나간 노인을 바다에서 끌어내는 등의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강박적으로 여자친구의 배신을 상상한다. 연락이 두절된 여자친구는 며칠 만에 메시지를 남기면서 여행이 즐겁다거나 여행을 연장한다는 소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Z는 자신의 고향언어로 이어지는 내레이션 속에서 “혹시 너는 시간의 궤도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너는 나를 버리는 것일까”라며 중얼거린다. 창백하게 묘사된 바닷가 도시 시애틀의 풍경, Z의 현실 같은 악몽과 악몽 같은 현실의 교차, 뮤직비디오처럼 구성된 극악한 범죄장면 사이로 엿보이는 Z의 향수병 등이 범벅이 된 채 영화는 진행된다. 이는 온갖 종류의 환상과 피해의식, 강박관념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일상과도 같다. 로빈슨 드버 감독의 첫 장편 <우먼체이서>와 <폴리스 비트>는 모두 선댄스영화제에서 상영됐으며, <폴리스 비트>는 지난해 <필름 코멘트>가 꼽은 ‘최고의 미개봉작’ 중 한편이기도 하다.

안드레이 루블료프 Andrei Rublev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러시아/ 1966년/ 185분/ 특별전: 저항의 알레고리 소비에트 연방의 금지된 영화들

<이반의 어린 시절> 이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내놓은 두 번째 장편영화. 러시아의 성상화가인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영화의 초점은 그를 둘러싼 15세기 러시아에 있다. 영화는 한 남자가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화면 가득 들판이 펼쳐지며 그 사이 강이 흐른다. 아름다운 풍경에 미소를 짓는 남자는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갑자기 기구는 추락하고 그는 땅에 떨어진다. 추락의 이미지로 서두를 연 영화는 곧 추락한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삼위일체를 그리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루블료프는 곳곳의 전쟁과 약탈, 강간과 살인의 현장을 목격한다. 종교인으로서, 예술가로서 그는 현실적 고뇌에 빠지고 영화는 예술가의 임무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총 9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여 전체적인 주제를 연상시키는 프레스코 구조를 취한다. 타르코프스키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러시아 귀족사회와 민중 사이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루블료프는 현실적인 고통과 절망 속에서 이를 극복할 종교적 사명감을 획득하고, 영화는 마침내 완성된 그의 작품 <성삼위일체>를 보여준다. 1969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러시아 내에서는 당국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971년까지 상영이 금지됐다.

생산적 활동 Throw the Cross Away
오점균/ 한국/ 2006년/ 97분/ 한국영화의 흐름

급하게 사랑을 나누고 싶은데 공간이 마땅치 않아 거리를 헤매고, 골목을 뒤진 적 있는가. 오점균 감독의 단편 <생산적 활동>(2003)은 20대 초반의 가난한 연인이 섹스할 곳을 찾기 위해 도시 순례에 나선다는, 그리고 두 연인의 애정행각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도 활력을 던져주는 ‘생산적 활동’임을 증명했다. “2년 뒤 같은 모티브와 타이틀을 빌려와 만들었다”는 장편 HD영화는 이번엔 ‘생산적 활동’을 향유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결국엔 치러야 하는 고통에 좀더 관심을 둔다. 결혼 3년차의 가정주부 미유. 그녀는 아이를 갖고자 하는 남편 재성과 사이가 좋지 않다. 미유가 친구가 운영하는 결혼상담소에 취직한 뒤로 이들 부부의 사이는 더욱 악화된다. 결혼상담소에서 우연히 만난 자동차 판매원 동휘를 만나 사랑에 빠진 미유는 결국 이혼을 결심하고, 동휘와 동거를 시작한다. ‘생산적 활동’을 거듭하는 미유와 동휘 그러나 이들의 관계 또한 급속히 삐걱거린다. 부부라는 규정된 관계의 강요에 떠밀려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 생산적 활동을 포기한 미유는 과연 자신이 꿈꾸고 또 택한 생산적 활동을 계속 영위할 수 있을까. 인위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격한 불신과 비난을 품고 있는 불온한, 그러나 생산적인 영화.

사이에서 Between
이창재/ 한국/ 2005년/ 98분/ 한국영화의 흐름

반신반의하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 있어 다큐멘터리 방식은 더없이 효과적이다. 일출 무렵의 바닷가, 몸에 깃들려는 신을 거부하는 제자와 그런 제자에게 신을 맞이하는 무념의 태도를 거듭 강조하는 무당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사이에서>는, 몸서리치는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게 된 무당들의 사연을 담고 있다. 비슷한 소재를 다뤄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영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가 한국적인 무속신앙의 본질을 담았다면, <사이에서>는 기구한 운명에 자신을 맡긴 이들의 개인적 고뇌에 집중한다. “무당은 곧 삶의 조언자”라고 믿는 이해경은 다섯살 된 아들의 죽음과 자신의 병, 갖가지 사고 끝에 무당의 삶을 선택한다. 그는 스물여덟의 나이에 내림굿을 받고도 여전히 신내림을 두려워하는 인희와 삼십년 무병 끝에 무당이 될 결심을 하게 된 여자 등을 거둬들인다. 어느 누구도 무당의 길을 내켜하지 않던 이들이 날선 작두에 오르고, 온갖 잡귀까지 정성껏 대접하는 등의 낯선 굿판을 이창재 감독은 일상적으로 묘사한다. 무당이 잡신을 받아들이듯, 무속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관객 역시 이들의 거짓말 같은 삶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컴배트 Combat
파트릭 카르팡티에/ 벨기에/ 2006년/ 57분/ 디지털 스펙트럼

고통에서 쾌락 그리고 복종에 이르는 사랑의 과정을 그린 <컴배트>는 극영화와 실험영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서 욕망의 끝을 엿본다. 동성애이자 사도마조히즘 관계를 탐닉하는 두 사내가 숲속에서 벌이는 격렬한 몸싸움과 몽환적인 일상이 교차되는 가운데 한 남자의 꿈꾸는 듯한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내 욕망이 두려웠다”던 이 남자가 “더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너를 발견했다”고 말하기까지,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이에 충실하게 되기까지를 묘사한다. 두 남자의 대화는 간결하지만, 이 남자의 담담한 독백은 절절하다. 짧은 러닝타임과 간결한 내러티브를 지닌 영화지만, <아들>의 집요한 핸드헬드와 <인티머시>의 창백한 푸른 톤, <브로크백 마운틴>의 담담해 더욱 격렬한 감정 등 영화를 보는 내내 풍부한 레퍼런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내공이 돋보인다. 때로 잘 세공된 내러티브보다 관객의 오감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영화적 방식이 낯선 욕망을 가까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증명하는 영화. 스산한 바람소리와 타는 듯 붉은 하늘 등의 자연과 생생한 살결을 지닌 두 남자가 서로에게 상처를 내거나 보듬는 모습에 집중하다보면 급작스럽게 결말이 찾아온다. 그러나 이는 무한반복 혹은 심화를 암시한다.

북쪽에서 온 이야기 Stories frome the North
우루퐁 락사사드/ 타이/ 2005년/ 87분/ 디지털 스펙트럼

언제부터 영화가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일상은 전쟁터, 파악하고 처리하고 모아두어야 할 수많은 정보가 쏟아진다. 그를 잠시 잊으려 찾는 게 영화라면, 영화마저 복잡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당위성은 없다. <북쪽에서 온 이야기>는 말없는 영화다. 도시의 번잡한 풍경으로 문을 연 영화는 야자수 너머 아련한 하늘로 보는 이를 이끈다. 그곳에는 타이 시골의 조용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해는 하늘을 물들이고 달은 구름을 물들인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 사각사각 벼를 베는 소리가 지친 마음을 위무한다. 바람에서도 색이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영상이 계속되지만, 영화는 풍경을 잘라와 대리만족을 주는 ‘그림 같은’ 영화는 아니다. 9개 소제목 아래 펼쳐지는 시골의 일상 속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삶이 담겨 있다. 농부는 개와 오두막에 앉아 저녁을 느끼고, 아이들은 저들만의 이야기로 밤을 지샌다. 이제 그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늘 중얼대는 할머니. 감정마저 휘발한 그의 얼굴에도, 자식과 통화하는 순간만은 어미의 표정이 스쳐간다.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문득 뛰쳐나와 독립영화를 만드는, 어느 타이 감독이 선물하는 명상의 순간이다.

소비에트 특별전

검열의 칼끝에 선 금지된 영화들

1950년대 흐루시초프의 등장은 소련사회에 해빙을 가져왔지만, 소비에트 정권의 검열제도는 영화계를 얼어붙게 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가 개방 정책을 펴기까지 수많은 영화들이 상영을 금지당했고, 일부는 제작단계부터 정부의 간섭을 받았다. 이번 전주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금지된 영화들을 특별전으로 준비했다. 검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했던 영화들이 눈에 띈다. 오타르 이오셀리아니 감독의 <노래하는 검은새가 있었네>는 무료하게 살아가는 한 남자의 삶을 담아낸다. 이오셀리아니 감독은 하릴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기나 하는 남자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초상을 얘기한다. 누벨바그의 영향이 짙게 묻어나는 <나는 스무살>(마를렌 후치예프)은 1961년 당시 소련사회에 대한 정밀한 관찰이며, 알렉세이 게르만의 첫 번째 장편 <체크포인트>는 스탈린 체제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다. 앞의 두 영화가 비교적 선동적이라면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우크라이나 랩소디>는 멜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작품. 전쟁으로 약혼남을 떠나보낸 옥산나는 고향에 남아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영화는 우크라이나의 풍광을 담아낸다. 이 밖에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참회>(텐기즈 아불라제), 실험적인 영상을 보여주는 <기나긴 이별> 등이 상영작 리스트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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