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우, 김순명, 김학성을 소개합니다
1945년 이전 한국 영화사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일제 식민지라는 정치·사회적 상황이 절대적 이유다. 필름과 관련 자료 등이 해방과 함께 일본으로 대량 유출됐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후 발굴이나 복원 또한 미진했다. 그 시기에 나온 창작물에는 어김없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폄하가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영화의 발견’이라는 주제로 해방 이전 4편의 한국영화를 발굴, 상영했던 전주국제영화제는 올해도 무지와 편견을 부수기 위한 섹션을 마련했다. ‘특별상영: 재일한국영화인의 발견’에서 상영되는 5편의 작품들은 이병우(이노우에 간), 김순명(우베 다카시) 같은 한국 영화사에서 누락된 인물들을 다시 불러내려는 안간힘이다.
이병우 감독은 전주 출신으로 1928년 소비에트영화에 영향을 받아 프롤레타리아 집단인 프로키노에 참여하고, 이후 일본 유성영화예술연구소, 아트프로덕션 등에서 활동하면서 일본에서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떨쳤다. <대괴수 용가리>(1967), <성웅 이순신>(1971) 등을 계기로 한국영화와 인연을 맺은 그는 이 무렵 국내 기술 스탭들의 일본 교류를 직접 추진하기도 했다. 이번에 상영되는 <설국>(1939), <하늘의 소년병>(1941), <기지의 아이들>(1953) 등은 그의 ‘손맛’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 한편, 다나카 후미히토의 다큐멘터리 <두 이름을 가진 남자>(2005)에서는 두 이름으로 살면서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을 오갔던 영화인 김학성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 상영작 중 하나인 <조선의 아이들>(1955)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조총련 문화부장을 지냈으며,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촬영을 맡기도 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했던 이들의 존재를 전주국제영화제가 알게 된 건 야마가타다큐멘터리국제영화제를 통해서이다. 재일외국인으로 일본 영화사에 흔적을 남긴 이들의 영화들을 모아 상영했던 특별 프로그램 중에서 이들의 이름을 확인했고, 지난해 50년도 더 된 필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늘의 소년병은> 친일적인 내용이 없지 않지만 당시 기술 수준에 비해 월등한 촬영기술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의 아이들>은 일본 교육제도 안에서도 어떻게든 한국말을 배우려는 아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게 정수완 프로그래머의 귀띔이다.
다양한 실험영화 만나는 ‘영화보다 낯선’
이미지의 미로 속으로
인간의 시각은 익숙한 그 무엇인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감각이다. 추상 속에서 구상(具象)을, 기호 같은 이미지의 조합 안에서 내러티브를 발견하려는 것은 영화관객의 본능일 것이다. 전주영화제가 해마다 준비해온 아방가르드영화 섹션 ‘영화보다 낯선’은 그러한 본능을 잠시 미뤄두고, 미로 같은 이미지의 폭격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 적극적인 관객이 될 것을 주문한다. 올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필름메이커 피터 체르카스키의 특별전이 준비돼 있고,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비면> <원거리 전쟁> 등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실험영화를 만들어온 미디어 아티스트 하룬 파로키의 신작 등도 우리를 기다린다. 언어로는 설명이나 포착이 곤란한 날것 그대로의 새로운 영화라는 것이 이 작품들의 공통점이다.
키스를 위해 다가오는 두 남녀의 모습 중 입술이 만나는 장면만을 삭제한 <러브 필름>(피터 체르카스키, 1982), 총을 쏘는 카우보이와 그 총에 맞아 쓰러지는 상대의 모습을 한숏에 담은 <숏-카운터 숏>(피터 체르카스키, 1987) 등은 관습적인 영화적 인식을 비꼬는 유머러스한 실험영화의 전형이다. 그리피스의 <론데일 통신사>(The Lonedale Operator, 1911)와 <인톨러런스>(1916)를 비교하며 공간의 분할만을 수행하던 숏이 어떻게 영화적 시점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그리피스 영화의 구조를 향하여>(하룬 파로키, 2006)는 아예 영화교재의 역할을 자임할 정도다.
기존의 필름을 활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거나 이미지를 조합하여 독특한 영상체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또한 실험영화의 전통적 방식 중 하나다. 홈무비를 재편집하다가 급작스럽게 정지시킴으로써 평범한 행복 속에 깃든 불길한 표정을 포착한 <해피-앤드>(피터 체르카스키, 1996), 다양한 도표와 그래프, 차트를 연결하여 3천여년간 이어진 인류 이주의 역사를 설명해내는 <인-포메이션>(하룬 파로키, 2005)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구구절절한 내러티브나 설명적인 영상에 의지하지 않고 분절적인 기호만으로도 복잡한 감정과 이론이 전달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