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백영호 선생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40년 넘게 영화현장에서 스틸 작업을 한 분이다. 1960년대 충무로 풍경 하나쯤은 기록해뒀으려니 싶어 찾아뵀는데 헛걸음이었다. 그의 소중한 앨범을 몇번이고 뒤적였지만, 다방과 여관과 식당이 그득한 과거의 충무로를 담아둔 사진 한장 없었다. “그럴 겨를이 있었어야지. 나도 아쉬워….” 현장 사진이라고 다를까. 배우들의 얼굴만 클로즈업한 사진들에서 과거의 흔적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렇게 돌아왔고, 얼마가 지났다. 하지만 영화사에 쌓인 스틸북을 뒤적일 때마다 그때의 낭패감이 되살아났다. 지금이라고 뭐가 달라졌나. 몇 십년 지나 누군가 이 사진들을 들춰본다면, 그는 2천년대의 한국영화 현장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궁금했다. 뒤따라 이런 추측도 일었다. ‘그들’이 찍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다, 하는. 카메라 들고 슬레이트 치는 과거는 아니잖나. 현장의 스틸기사들이 편당 찍는 사진의 수는 수천장. 왜 접할 수 있는 사진은 기껏해야 수십장일까. 혹시 스틸기사들의 미공개 화첩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현장의 풍경이 담겨져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추궁했다. DVD 캡처 화면 같은 사진 말고 어딘가에 보물을 숨겨놓은 것 아니냐고. 개봉을 위한 일시적 소모품으로서의 스틸이 아니라 언젠가 한국영화를 증거할 결정적 순간을 잡아낸 스틸이 있지 않냐고. 그렇게 물어서 주섬주섬 모았다. 여기 모은 30여장의 사진들은 그 일부다. 소중한 일부를 귀하게 나누기 위해 여기 내놓는다. 귀한 것이니만큼 오독오독, 잘근잘근 음미하시길.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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