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과 모래에 생명 불어넣는 거장의 숨결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은 연금술사. 이지 트릉카는 인형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만들어낸 불멸의 예술가다. 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체코의 인형극은 20세기에 들어와 이지 트릉카의 손에 의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속으로 성공적으로 편입되었고, 그의 영향력과 예술혼은 일본의 가와모토 기하치로 같은 또 다른 대가들에게 전승되어 내려왔다. 올해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서 볼 수 있는 이지 트릉카의 작품은 <베이스와 첼로 이야기>(1949), <사이버네틱 마더>(1962), <손>(1965), <왕자 바야야>(1950) 등 모두 네 작품. <손>은 갑자기 나타난 손에 의해 자신의 창조적 세계를 침범당한 한 도자기공을 그리는 작품으로, 무력으로 짓밟힌 체코의 현실에 대한 트릉카의 비판 정신이 잘 드러난다. 이번 회고전의 걸작들은 트릉카의 제자였던 일본 작가 가와모토 기하치로의 작품 <사자의 서>와 함께 보는 것도 좋다. 체코 출신 스승의 미학이 어떤 방식으로 일본의 전통적 인형 장인에게 전승되었는지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존경을 보내온 러시아의 유리 놀스테인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애니메이션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들은 컷아웃 기법(이미 제작된 종이인형을 오브제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기법)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단순한 2차원적 질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실사의 합성, 다층 촬영과 신속한 편집이라는 놀스테인의 스타일이 2차원의 컷아웃애니메이션에 3차원의 세계를 불어넣은 것이다. 코 회드먼 같은 또 다른 컷아웃애니메이션의 대가들과 달리, 다작을 하지 않는 놀스테인은 지금껏 6편의 작품만을 세상에 내놓았다. SICAF에 초청된 작품들을 모두 본다면 놀스테인의 지난 역사를 모조리 섭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길 잃은 고슴도치가 물고기와 개의 도움으로 친구 새끼곰을 만난다는 내용의 <안개속의 고슴도치>는 <이야기속의 이야기>와 이어서 보는 것이 좋다. 놀스테인의 대표작으로 종종 거론되는 두 작품은 이야기의 구조와 미학적 형식에서 형제 같다. <백로와 두루미>는 현실 정치를 조용히 비판해온 동구권 애니메이션의 특색이 잘 드러나는 단편. 백로와 두루미가 청혼과 거절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는 70년대 미·소 냉전시대에 대한 나직한 비판에 다름 아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대부분의 동구권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그러하듯 놀스테인 역시 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동구권의 월트 디즈니’로 불렸던 놀스테인은 현재 차기작을 위해 기부금을 모으는 중이라고 전해진다.
그외에도 헝가리 작가 페렝 카코와 네덜란드 작가 마이클 두독 드 비트의 특별전이 열린다. 이미 2003년 SICAF 개막식에서 모래애니메이션 쇼를 통해 관객의 마음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린 경력이 있는 페렝 카코는 5월25일 마스터클래스와 모래애니메이션 퍼포먼스를 가질 예정. 마이클 두독 드 비트의 특별전에서는 종이 위에 연필로 그려진 단순한 선이 어떻게 생명을 얻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드 비트 역시 5월27일에 마스터클래스와 사인회를 가질 예정이다. 또한, 르네 랄루(<판타스틱 플래닛>)의 13분짜리 단편과 알렉산더 알렉세예프의 핀스크린애니메이션이 궁금하다면 프랑스 애니메이션 특별전을 빡빡한 시간표의 구석에라도 허할 일이다.
지브리 클래식과 다카하다 이사오
지브리를 만나고, 지브리를 본다
고령의 장인 다카하다 이사오가 SICAF에 참가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꾸려가고 있는 노감독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비롯한 대표작들의 상영에 발맞춰 마스터클래스와 한·일감독대담 워크숍을 가질 예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지브리의 색깔을 창조해온 대가의 숨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기회. 특히 고령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마지막 방문이 될 공산이 크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작 <마녀 배달부 키키> 역시 지브리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상영된다. 한국에서 DVD 발매가 이루어지지 않은 유일한 미야자키 작품 <마녀 배달부 키키>는 스크린에서의 재발견을 요하는 사랑스러운 소품이다. 너무나 자주 들어 닳아버린 이름이지만, 지브리의 작품들이 주는 시각적이고 정서적인 충만감은 결코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