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침묵에 진심을 담아, <예의없는 것들>의 신하균
2006-08-18
글 : 장미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정말 모르겠다.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지. 신하균의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은 점점 더 호기심을 부추겼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그를 햇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회사 옥상에 세워놓았다. 더위에 약하다더니 포즈를 취하는 그의 이마와 콧잔등 위에 연신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배경을 정리하느라 잠시 촬영이 중단됐을 때, 이 모든 소란 속에서 신하균은 태연히 노래를 불렀다. 주변에는 들리지 않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술만 달싹거리며 흥얼흥얼. 그때 그는 4차원 세계에서 이곳으로 툭, 내던져진 비현실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그의 입속에서 맴돌았을 그 무형의 가사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냥 혼자 지어낸 노래일 뿐이다.” 줄기찬 물음에도 말은 않고 씩 웃는다. 곤란한 상황이 닥쳤을 때 신하균의 대처법, 웃기. 입술이 반원을 그리고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할 때, 그는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그 틈을 타 잽싸게 질문을 던지면 자기 얘기를 조금 풀어놓다 어느새 꽉 입을 다문다.

“백 가지 질문을 해야 한 가지 진심을 말할까 말까한 배우”라던 다른 기자의 평처럼 신하균은 14번째 장편 출연작 <예의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면서도 쉬이 속의 것을 꺼내놓지 않았다. <페이스>의 각본을 쓴 박철희 감독의 데뷔작 <예의없는 것들>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이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심각하지 않게 엉뚱한 재미를 주면서 풀어내는 영화”다. 극중 신하균은 짧은 혀 때문에 제대로 말을 못해 혀 수술을 위한 수술비를 모으려는 킬라로 출연했다. 벌레를 죽이는 에프‘킬라’처럼 세상의 ‘예의없는 것들’만 골라 제거하는 이 인물은 킬러 일에 적격인 과묵한 혀를 지녔다. 그러고보니 타인의 말을 즐겨듣는 대신 도통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신하균과 닮은 구석이 있다. “액션도 발레 역의 김민준씨가 다 했지, 감정 표현을 훨씬 많이 한 사람도 그녀 역의 윤지혜씨다. 나는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럼 정말 한 게 없다고 쓰겠다, 는 협박 아닌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던 그는 조금 뒤 슬쩍 속마음을 흘렸다. “대사가 없다는 것이 촬영하기 전에 부담은 됐다.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무슨 표현이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도 했고. 참 부조리한 대답인 것 같은데, 가만히 있는 것이 어려우면서도 쉬웠다. 이게 좀 난해하다. (웃음)”

말문을 굳게 걸어 잠근 킬라는 혼자만의 세계에 온전히 파묻혀 있다는 점에서, 외계인에 대한 허무맹랑한 이론을 품고 살아가는 병구(<지구를 지켜라!>)나 소리없는 감독에 갇힌 류(<복수는 나의 것>), 누나를 죽이려 한 김영훈(<박수칠 때 떠나라>)과도 겹치는 면이 있다. 신하균은 사랑을 품은 로맨틱한 남자(<서프라이즈> <화성에서 온 남자>), 여린 어깨의 형(<우리형>), 적군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는 군인(<공동경비구역 JSA> <웰컴 투 동막골>)이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4차원 세계에서 건너온 듯 이 세상의 언어와 규칙에 미숙한 캐릭터를 맡았을 때 가장 돋보였다. “평상시 관심을 가졌던 얘기에 눈길이 간다. 거기에 새로움이 있으면 더 좋고. 관심사는 폭넓은 편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우리는 하루하루 변해가니까. 같은 걸 다뤄도 그걸 표현하기 위한 소재는 다양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듣도 보도 못한 비범한 캐릭터를 선택하기도 했던 그는 정작 자신을 돋보이게 해줄 캐릭터가 아니라 영화 자체의 완성도나 짜임새에 먼저 주목한다. 그건 영화란 것이 배우 홀로 맞설 수 없는 만만찮은 적수임을 신하균이 알기 때문이며, 그래서 함께 일한 감독들에 대한 얘길 쏟아낼 때 그의 옅은 갈색 눈은 더욱 오묘한 빛을 발했다.

“박철희 감독님은 주변을 썰렁하게 만든다. 내 대사가 없는 거 뻔히 알면서 한 테이크 끝내고 다른 테이크로 가기 전, 이번엔 대사 있는 거 알지, 이러신다. (웃음)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영화를 찍을 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다지 뭐, 보통 사람 같지 않고 이상했다는 말이다. (웃음)” <지구를 지켜라!>를 연출한 장준환 감독이 ‘아드레날린이 쫙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을 표현해달라는 식의 아리송한 지시를 내렸다는 건 주지의 사실. 그럼 장준환 감독만큼 썰렁한 분이냐고 되묻자 신하균이 폭소를 터뜨린다. 장진 감독의 <기막힌 사내들>로 데뷔해 박찬욱, 김지운 등 쟁쟁한 감독들과의 작업을 거치며 충무로에 몸담은 지 8년째. 오래전 얘기 같겠지만, 배우생활의 출발점이 어디였는지 새삼 묻고 싶어졌다. “처음엔 막연한 동경에서 시작됐다. 나를 흥분시키고 재밌게 만드는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기도 했지만, 학교 다닐 때 극장에서 영화보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시험 끝나면 딱 요걸 볼 수 있겠다, 며 신문 하단(의 영화 광고)을 들여다보기도 했고. 지하철 계단을 통해 극장으로 올라갈 때, 표 사려고 기다릴 때도 너무 설레었다.”

분노로 타오르다가도 금방 서늘하게 식어버리곤 했던 배우 신하균과 달리, 미동도 없이 조용히 서 있는 또 다른 신하균은 평생 불같이 화를 낸 적도, 가슴 떨릴 만큼 행복했던 적도 없는 그야말로 수평선 같은 사람이다. “쉴 땐 그냥 집에 가만히 있는다. 특별히 하는 건 없다. 가끔씩 지인들 만나거나 술을 마시는 정도.” 대답이 짧아 인터뷰하기 어려운 배우로 손꼽히던 그는 요즘 실없는 농담을 곧잘 던질 정도로 말수가 늘었다. 정재영, 강혜정, 임하룡 등의 배우들과 함께 출연한 전작 <웰컴 투 동막골> 이후 생긴 조그만 변화다. “그때 날씨가 추워 스탭과 배우들이 천막 속에 모여들어 난로불을 쬐곤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나 궁금해 슬쩍 얘길 엿듣곤 해 ‘복덕방 아저씨’라는 별명도 얻었다.” 허리를 굽히는 깍듯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신하균과의 인터뷰를 마쳤다. 4시간이 흘렀지만 바깥의 여름빛은 여전히 눈부셨다. 대체 아까 신하균이 부른 노래는 뭐였을까, 궁금한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스타일리스트 김영주·메이크업 임미현·의상협찬 Sweet Revenge by 홍승완, Hugo Boss, TIME homme, 제너럴 아이디어 by 범석, ROCHAS, Spring Court, le coq sport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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