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시간>의 배우, 하정우
2006-08-28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김기덕 감독은 한국의 셰익스피어다

하정우는 뉴욕에서 <네버 포에버>를 촬영 중이다. <시간>의 개봉 전까지 한국에 오지 못할 거라는 소식을 먼저 전해 들었다. 그러다 그는 이미 촬영이 끝난 <구미호 가족>의 후반작업을 위해 잠깐 들어왔다. 그리고 짬을 내 <시간>에 관한 인터뷰를 했다. 나눠 써야만 가능한 그 바쁜 스케줄이 그의 요즘 인지도를 쉽게 말해준다.

하정우가 눈에 깊이 들어온 건 물론 <용서받지 못한 자>의 태정으로 나왔을 때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좀더 두고보아야 확신이 들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 주연을 맡은 영화였고, 그 한 편의 호연으로 판단한다는 건 주저되는 일이었다. 주변의 몇몇이 보내는 그런 호감으로서의 보류를 하정우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가 지금 바쁘게 자신을 내몰고 있는 것도 이제부터 나를 더 주목해야 할 거라는 자기의 존재증명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 점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 다음 출연작으로 김기덕의 <시간>을 택한 건 그로서는 중요한 선택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그 선택의 의미와 재미를 물었다.

-여하간 오늘은 <시간> 때문에 자리를 마련한 것이니 거기에 중점을 두기로 하자. 이 영화는 어떤 계기로 출연하게 됐나.
=‘김기덕 필름’팀이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게 됐고, 김 감독님이 나를 염두에 뒀다가 연락을 해왔다. 감독님도 <용서받지 못한 자>를 무척 좋게 보셨고. <시간>에서의 지우 역은 태정이라는 인물에서 부드럽게 변조된 인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건 김기덕 감독의 해석인가 당신의 해석인가.
=감독님이 말씀하셨던 부분도 있고, 내 생각이기도 하다.

-<시간>의 시나리오를 보고 처음 들었던 느낌은 어떤 것이었나.
=처음에는 선입견을 좀 가졌었다. 김기덕 감독님 작품이라고 하면 굉장히 센 표현이 많고, 관객과의 거리가 있을 거라는…. 누구나 다 느끼는 그런 선입견을 나도 갖고 시나리오를 보게 됐는데, 뭐랄까 일단 감독님 첫인상부터 너무 좋았다. 그리고 감독님 초기 작품들, <악어>라든가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고등학교 때 봤는데 그 작품들이 좋았다. 그래서 감독님 영화를 꼭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 시기에 방금 말한 그 작품들을 볼 때는 어떤 점이 좋았나.
=꾸미지 않은 표현들, 날것 같은 생생하고 싱싱한 느낌들. 둘러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직접적인 것들. 또, 포장하려면 아예 포장하는, 한마디로 표현이 어설프지 않았기 때문에 배우로서는 같이 해보고 싶을 수밖에 없다.

-김기덕 감독의 전작에 나온 인물 중 좋아하는 역이 있나.
=누구나 다 이야기하는 <나쁜 남자>인 것 같다. <빈 집>에서 재희씨가 했던 굉장히 유머러스한 역할도 마음에 들고.

-유머러스하다고.
=굉장히 재미있지 않나. 캐릭터가. 나는 너무 웃겼다. 어쩌면 <시간>도 그런 것 같다. 이번에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 가서 감독님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는데, 내가 감독님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인터뷰할 기회가 오게 되면 이 영화의 장르를 코미디라고 말해도 되냐고. 감독님이 웃으면서 그러라고 하더라. 혹시 영화 봤나?

-<씨네21> 시사회 때 봤다. 어떤 점이 유머러스했는지 말해주면 좋겠다.
=나는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가서야 처음 봤다. 어쩌면 배우가 그 안에서 굉장히 심각하고 헌신적으로 연기하는 장면에서, 그러니까 진짜 감정을 써가면서 장면을 운용해나갔고 심각하게 대화하는 장면인데, 그걸 붙여놓고 보면 상황에 맞지 않고, 시각에 따라서는 굉장히 웃긴 곳이 있다. 가령, 성현아씨하고 카페에서 만나 대화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인물들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알고 보면 다 동문서답을 한다. 목적이 다 다르기 때문일 거다.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목적이 다 다른 거다. 어떤 사람들은 세희와 자고 싶어하는 거고 어떤 사람은 그냥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거고, 세희는 지우를 찾고 싶어하는 거고. 세희가 지우 이야기를 어떤 남자에게 할 때도 서로 다른 이야기만 한다. 세희는 그 사람이 지우인지 확인하고 싶어하고, 그 사람은 다른 대답만 하고 있고. 그런 상황이 매우 웃기다. 대사의 반복 같은 것도 그렇고.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면모가 있다. 방금 말한 그런 장면은 보기 드물었으니까.
=하여튼 나는 감독님이 셰익스피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셰익스피어. 너무나 희극적인 순간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걸 나는 그전에 <빈 집>이나 <해안선> <나쁜 남자>에서도 많이 봤다. <빈 집>도 중간 중간에 재희씨가 골프를 치지 않나. 그러다가 결국엔 철사를 뺀 다음에 칠 때는 누가 맞지 않나. 그걸 상대방 리액션까지 다 보여준다. 굉장히 웃긴 거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감동을 주는 게 정말 셰익스피어의 구조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메시지 강한 영화 만드는 예술감독이라고 해서 독특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장난치는 거 좋아하고 유머러스하고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런 감독님을 생각해볼 때 이번 영화야말로 진짜 솔직한 영화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점점 더 진화하고 있다고 느낀다. 다음 작품은 더 굉장한 게 나올 것 같다.

-현장에서 연기하면서도 이 장면은 나중에 웃기겠구나 생각한 곳이 있나.
=몇 장면 있다. (친구가 다른 여자에게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자) 왜 내 전화번호 가르쳐줬어, 그렇게 말해놓고 혼자 전화 기다리는 장면 있지 않나. 그런 장면이나, 시선 끌려고 몰래 컵 떨어뜨리는 장면, 미팅장면, 룸살롱 장면. 그런 장면은 연기하면서도 이건 엄청 웃길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큰 코미디가 될 줄은 몰랐다. 현장에서는 그런 몇 장면 제외하고는 굉장히 숙연했으니까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다른 영화들의 제작방식과 비교할 때 다소 다른데 배우로서는 어떤 차이가 있나.
=장단점이 있지만, 여하간 빨리 찍는 건 집중력을 유지하며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빨리 찍는 만큼 우리가 모르고 놓친 부분도 있겠지만, 나는 좋았다. 그건 큰 단점이 아니다. 이번에 미국 가서 보니 그쪽은 거의 김기덕 감독님 작업방식하고 비슷하다. 프리 프로덕션 꼼꼼하게 하고, 촬영은 무조건 속전속결.

-가장 마음에 들거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
=가면 쓴 세희와 대화하는 장면. 그리고 어떤 남자하고 싸우고 나서 세희를 수술해준 의사를 찾아가서 한잔 하자면서 술 먹는 장면. 그 하루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건 준비를 많이 했다. 가슴속으로 며칠 전부터 조금씩 쌓아나갔고. 술 먹는 장면에서는 진짜 술을 먹었다.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가서 기억에 남았던 건 무엇이 있나.
=첫날부터 뭐… 김기덕 감독님이 유럽에서는 거의 스티븐 스필버그와 양대 산맥을 이루시는 분이라, 우리는 비행기 내리자마자 활주로로 내려왔다. 그 옆에 차가 대기하고 있더라. 그러고나서 대통령이 오면 머문다는 라운지에 가서 쉬었다가 바로 카를로비 바리로 갔다. 그래서 나는 갈 때 프라하공항도 못 들어가봤다. (웃음)

-칸에는 <용서받지 못한 자>로 갔다 왔지 않나. ‘영화제의 사나이’, 이런 명칭을 붙여놓은 지면들도 있던데.
=(웃음) 우연찮게 그렇게 되어서….

-국제영화제에 자주 갈 만큼 좋은 영화에만 출연하는 배우라는 말도 되는데.
=그렇게 해석해주면 감사하지만….

-어쨌든 그런 말 들으면 기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칸에 갔다 와서 그런 생각 많이 했다.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지만, 한국 안에서만 흥행에 좌지우지되는 영화를 선택해서 소모전을 하면서 우리끼리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번에 미국 가서도 칸 갔다 왔냐, <용서받지 못한 자>로 갔다 왔냐, 그런 걸 알고는 놀라더라. 평가를 더 높게 해주더라.

-<시간>에 출연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국내 개봉이 불투명하다고 알고 있을 때인가.
=감독님이 어느 정도는 말씀해주었다. 큰 욕심은 없다고. <활> 때 받은 상처도 들려주고, 그런 것에 대해 얘기도 많이 나눴다.

-하지만 이제 막 뜨기 시작한 배우가 아무리 스타 감독의 영화라고 할지라도 개봉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출연을 결정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우선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으로 얻은, 아직은 뻥이 튀겨진 인지도를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낯간지러워서.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서 더 좋은 기회를 얻었고, 내 목표를 더 길게 잡고 볼 때, 김기덕 감독님 영화니까 한번 해봐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고, 이번 시나리오를 보니 이건 분명히 사람들이 많이 봐줄 만한 영화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또 그 다음 영화는 상업적인 <구미호 가족>이니까 배우 하정우에 대한 균형도 충분히 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시에 그 두 작품을 선택했던 거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 그래 너 잘하는구나 하면서도, 어디 한번 지켜보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다. 영화제에서 만난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님도 그런 얘기를 하더라. <용서받지 못한 자>는 젊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단합해서 만들 수도 있는 그런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보고 나니 하정우라는 배우한테 확신을 갖게 됐다고. 그런 선입견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걸 깨고 배우로서 뭔가 더 보여주고 싶었다.

-지우 역을 할 때 연기의 주안점은 무엇이었나.
=각 장면에 목표를 설정해서 가자는 것이었다. 장면별로 주제를 정했다. 그런 단순한 마음을 갖고 전체적인 톤을 가져갔다.

-그 장면과 목표, 주제라는 것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세희한테 가지 말라고 하면서 결국에는 “자고 가면 안 돼요” 하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사람이 원래 어떤 여자랑 자고 싶을 때 처음에는 겉으로 다른 말을 하지 않나. 취미가 뭐예요, 뭐 이런. 그러다가 결국에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나. 그래서 처음부터 아예 속으로 이 사람이 자고 갔으면 좋겠다, 자고 갔으면 좋겠다 계속 마음을 가지려고 했고, 그러고나서 “자고 가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 요리를 해주는 장면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요리를 해줘야지 생각했고.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나.
=3 대 3으로 미팅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원래 테이블에 앉아서 하는 거였다. 근데 현장 도착해서 세팅 다 되어 있는 상태에서 감독님이 “정우는 미팅할 때 어떻게 해” 하고 물어보시더라. 그래서, “감독님 저는 이런 데 왔으면 바지 올리고 저기에 발 담글 것 같은데요” 했다. 그럼 우리 들어가서 하자고 하시더라. 그래서 카페 안에 있는 물 위에 배 띄워놓고 촬영한 거다.

-사실 이 영화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따라잡기 힘든 장면들도 있다. 가령, 지우가 여자친구인 세희의 얼굴을 고친 성형외과를 찾아가 술 먹자고 하는 장면 같은. 그런 장면들을 연기할 때는 배우에게 어떤 마음이 있어야 했나.
=완벽한 상상이 가장 좋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시나리오나 상황을 받았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자친구하고 그렇게 싸웠으니, 실제로 의사를 찾아가서 멱살 잡을 수도 있는 거고, 여자친구한테 미처 따지지 못한 걸 그 의사한테 따질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배우들은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류가 아닌가.
=영화 속에서 어떤 원피스 입은 여자가 동굴로 들어가고 지우가 따라가는 장면이 있다. 원래 시나리오상에서는 그 동굴 안에서 지우가 그 여자와 섹스하는 거였다. 그건 이해가 안 가더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처음 만난 여자하고 그럴 수가 있나요, 그랬다. 그런데, 며칠 뒤에 감독님이 아예 그 여자가 동굴 안에서 사라지는 걸로 하자 그러더라. 그거 딱 하나 바뀌었고, 그외에는 모든 장면을 다 현실이라고 바라보면서 했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해보면 어떨까. 이 영화의 인물들이 추구하는 사랑법은 독특하다. 인간 하정우로서는 이 사랑법을 어떻게 보나.
=너무 극단적이긴 하지만, 충분히 이해는 간다. 나도 예전에 여자친구에게 버림받았을 때 뭔가 내 자신을 바꾸고 싶다고 느꼈었다. 헤어지면 꼭 머리 자르거나, 파마하러 가거나 하는 영화 속 장면도 있지 않나. 돈만 주면 얼굴을 뜯어고칠 수 있는 요즘 세상에서 시도해볼 수도 있는 자기 변화가 아닌가 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영화제의 사나이, 이런 말 듣는 건 부담스럽다. 몇 작품이나 했다고…. 일단 <네버 포에버>를 8월 말까지 찍을 거다. 다음 작품 결정된 게 있는데 그건 11월까지 찍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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