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부산의 한국영화 7편 [1] - <경의선>
2006-10-24
글 : 이다혜

2005년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영화는 윤종빈 감독의 졸업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였다. 허문영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는 2006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았던 이 영화로 인해 “초저예산으로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생겼다고 말했다. 신선하게만 느껴졌던 한국영화의 새로운 경향은 올해 더욱 거센 물줄기를 타고 되돌아왔다. 부산영화제는 ‘한국영화의 오늘’ 부문에 저예산과 독립영화만을 모은 섹션 ‘비전’을 신설했고, ‘새로운 물결’ 부문에 초청받은 한국영화 두편도 10억원 미만의 예산을 가진 저예산영화다. <역전의 명수>로 씁쓸한 데뷔전을 치렀던 박흥식 감독은 상업적인 성공에의 강박을 버리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 <경의선>으로 돌아왔고, 먼 길을 돌아 지천명을 앞둔 나이에 데뷔작을 만든 김태식 감독은 중년 사내의 황당하고도 쓸쓸한 여정을 희비극으로 엮어낸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로 아시아 신인감독들과 나란히 출발선에 섰다. ‘비전’부문 영화는 모두 일곱편이다. <여자, 정혜> <러브토크>의 이윤기 감독은 낯선 만남 속에서 길을 잃은 듯하지만 기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여자의 여정을 <아주 특별한 손님>으로 뒤쫓는다. 성지혜 감독의 <여름이 가기 전에>는 봄바람처럼 들뜬 연애의 감정과 쓰디쓴 뒷맛을 섬세하게 기록하고, 2년 전 <마이 제너레이션>으로 부산영화제의 스타가 됐던 노동석 감독은 장르영화에 한 걸음 다가선 청춘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다시 한번 부산과 조우한다.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의 민병훈 감독은 <포도나무를 베어라>로 중앙아시아의 낯선 풍광을 떠나 한국 청년의 내면적인 방황을 들여다본다. 허문영 프로그래머의 감상을 빌린다면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듣는 것처럼 고전적인 우아함”이 느껴지는 시선으로. 게이감독이라는 라벨로 유명했던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는 고풍스러운 멜로영화이면서도 오히려 그 때문에 칼날에 몸을 내맡기는 듯 아픈 용기가 느껴지는 영화다(김동현 감독의 <상어>는 2005년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이미 선보인바 있어 이번 기획에서 제외했고, 신동일 감독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기사를 쓰는 시점까지 영화를 볼 수 없어 부득이 첫 만남을 미루어야 했다). 부산영화제는 무엇보다도 숱한 아시아영화를 만나는 자리겠지만, 이 한국영화들도 어느 하나 그냥 보낼 수 없다.

낯선 이와 나누는 귀한 소통의 시간

박흥식 감독의 두 번째 영화 <경의선>

“흥행 생각하지 않고 영화 찍는 게 좋다.” 박흥식 감독의 한마디는 데뷔작을 찍고 심했던 마음고생을 엿보게 해준다. 2005년, <역전의 명수>를 연출한 박흥식 감독은 개봉 뒤 이어진 혹평과 흥행 고전으로구독하던 신문과 영화잡지를 끊었다. 준비하던 영화를 포기하고 데뷔하기 위해 이래저래 끌려다닌 영화였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 크게 남았다. 그가, <경의선>으로 돌아왔다. “이룰 수 없는 꿈, 죄의식과 외로움이 서정적인 영상에 실려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작품”이라는 부산영화제 상영작 설명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로.

지하철 기관사 만수(김강우)는 자신의 일에 열심이다. 매일 하는 안내방송 한마디에도 정성을 다한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대학 강사로 일하는 한나(손태영)는 유학 시절 애인이자 대학교수이며 유부남인 선배(백종학)와 불륜관계다. 같은 도시에 살아도 결코 엇갈릴 일 없는 두 사람의 인생은 나름의 방식으로 평안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날 파국이 찾아온다. 눈 내리는 밤, 만취해 종점까지 기차를 타고 간 두 사람은 폭설이 내리는 종착역에 남게된다. 어색해하던 두 사람은 자신에 대한 거짓말과 허세로 말문을 연다.

<경의선>은 박흥식 감독의 경험담으로 가득한 영화다. 한나가 독일 유학을 다녀온 것처럼, 박흥식 감독도 독일 유학을 다녀왔다. 영화에서 만수의 관점으로 보여지는 지하철의 터널 통과 장면들은 그가 독일 유학 시절에 본 TV 영상을 떠올려낸 것이다. 좌절에 지친 두 남녀가 만나 대화하며 삶을 포용하는 이야기는 10대 때 구상한 것이다. “부산 태종대에 간 적이 있다. 태종대 끝에 자살바위가 있는데, 늦은 시간에 한 여자가 검은 옷에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다. 그 여자를 보면서 자살하려던 여자가 비슷한 상황의 남자와 마주쳐 자신에 대한 거짓말을 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려다가 결국 진실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상상했다.” 한나의 자조적인 대사에는 감독 자신의 마음도 들어 있다.

박흥식 감독은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갈림길에서 고민하지 않고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경의선> 시나리오를 썼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으니 배우들부터 스탭들까지 좋은 사람들이 모였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80년대에 운동권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컥해서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너희들에게 민중은 너무 멀다. 너희들 담배꽁초는 누가 치우는 줄 아냐.’ 결혼해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추상적인 고민은 점점 멀어진다. 삶에 대한 현실적인 생각이 많아진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싶어하지만 어디선가 눈물을 쏟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의선>은 강력한 위안을 준다. 슬프게 끝내는 건 쉽다. 해피엔딩이야말로 어렵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한 거짓말이 진실로, 그리고 안온한 일상에의 귀환으로 이어지는 <경의선>의 마지막 20여분은 불가능해 보였던, 하지만 우리 주변의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귀한 소통의 순간을 보여준다.

로케이션

한겨울의 임진강역부터 지하철 기관실까지

“배우는 전화하면 오지만 장소는 발로 찾는 수밖에 없다.” 박흥식 감독에게 <경의선>은 로케이션, 로케이션, 로케이션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곳을 직접 가보고 시나리오를 쓴 것은 물론이다. “경의선을 타고 땅굴까지 가보니 감이 서더라.” 추운 겨울날 눈길을 걸으면서 긴 대사를 소화해야 하는 배우들을 한밤중에 임진강 역으로 불러내 걸으면서 대사를 읊게 하기도 했다. 가장 어려웠던 섭외 장소는 지하철이었다. 만수의 직업이 기관사인 만큼 지하철역은 물론이고 기관실도 영화에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지하철에 치어 자살한 사람 이야기도 나오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때 제작자이자 박흥식 감독의 부인인 박곡지 편집기사가 나섰다. “아내가 도시철도공사와의 섭외에 나섰다. 두 배우를 지하철 홍보대사로 촉탁하기로 하고 지하철에서의 촬영을 승인받았다.” 임진강역 장면 뒤에 이어지는 눈길을 걷는 장면은 포천 근처에서 찍었다. 눈이 안 와서 제설기를 동원해 영하 3도를 밑도는 날씨에 영화를 찍었다. 한나의 불륜상대인 대학교수의 서재에 꽂힌 책은 모두 감독 자신과 서울대 독문과 과도서실의 책들이었다. 책을 꽂은 순서도 다 의미가 있다고 하니 꼼꼼히 살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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