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혜 감독의 데뷔작 <여름이 가기 전에>
모진 사랑의 열병 때문에 상처를 입고서 ‘이제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랑은 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맹세란 너무도 쉽고 빨리, 다시금 눈먼 열정에 묻혀버리고 만다는 것을. <여름이 가기 전에>의 주인공 소연(김보경)도 그 부질없는 다짐의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파리에서 유학 중인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다가 순수한 남자 재현과 가벼운 만남을 갖고 있다. 하지만, 소연의 마음속에는 한때 파리에서 열렬히 사랑했다 헤어진 이혼남 외교관(이현우)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소연은 부산에서 출장 중인 그를 만나기 위해 부득불 내려가기도 하고, “파리로 돌아가기 전 우리집에서 함께 지낼까”라는 그의 제안에 솔깃해 짐을 싸갖고 언니네 집을 나오기도 하지만, 남자의 미적지근한 반응 때문에 항상 기대와는 다른 결과를 맞이할 뿐이다. 정작 만나고 나면 그와의 관계가 건조하게 말라붙었다는 사실을 거듭 깨달으면서도,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면 소연의 가슴은 왜 항상 부풀어오르는 것일까. 그는 시시포스의 도로(徒勞)같은 사랑을 멈출 수 있을까.
20대와 30대, 한국과 프랑스, 그들 경계 사이에서 버둥거리며 안식처를 갖지 못한, 이 부유하는 여성의 그림자를 조용히 뒤쫓는 <여름이 가기 전에>는 성지혜 감독의 데뷔작이다. 굳이 부연하면 ‘늦은 데뷔작’이랄까. 우연히 참석한 <그들도 우리처럼>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가슴이 떨리는 첫 경험”을 한 뒤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그는 허진호, 이종혁, 오기환 감독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화아카데미 9기 졸업생이며,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와 이현승 감독의 <네온속으로 노을지다> 연출부를 거친 충무로의 ‘고참급’이다. 몇 작품만 더 겪으면 ‘입봉’의 길로 갈 수도 있었던 그가 1995년 홀연히 파리로 날아간 것은 “딱 한달 동안 영화만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 한달 동안 그는 영화, 특히 누벨바그와 깊은 사랑에 빠졌고 아예 영화이론을 공부하게 된다.
<여름이 가기 전에>에서 감독의 8년 유학 경험이 묻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물론 연애담 그 자체야 그 자신의 것이 아니지만, 그는 “내가 연애를 할 때 느꼈던 감정을 비슷하게 전달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품고 영화를 구상했다. 물론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서 붕 떠 있던 스스로에 대한 자각 또한 이 영화와 관계있을 터. 연애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니 당연히 에릭 로메르의 영향도 존재한다. “얼마 전에도 <모드의 집에서 하룻밤>을 봤는데 많은 감정을 겪었는데도 새로운 감정에 동화될 수 있는 인물들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정말 이 양반 도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캉스 동안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을 풍부하고 세심한 감성으로 담아낸다는 점 또한 로메르의 체취를 느끼게 하는 점. 구조나 형식미보다 캐릭터들의 미묘한 내면에 집중한다는 점에서도 로메르의 세계와 닮아 있다. “비교적 늦게 데뷔하다보니 욕심이나 야심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는 그는 준비 중인 다음 영화 <여덟번의 감정>(가제)에서는 ‘열린 시점’이라는 영화적 질문을 던져볼 요량이다.
로케이션
한겨울이 오기 전에 여름을 찍다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 <여름이 가기 전에>는 계절 배경이 상당히 중요한 영화다. “사람들은 바캉스에 항상 기대를 많이 하는데 사실 별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에릭 로메르의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이 영화에서 여름은 방학과 휴가철의 의미뿐 아니라 ‘뜨거운 열정’이라는 의미 또한 갖고 있다. 하지만 제작 여건은 감독의 의도를 무색게 했다. 이 영화는 지난해 8월에야 영화진흥위원회의 HD 지원작으로 선정됐다. 이후 세세한 촬영을 준비하다 보니 촬영은 11월 초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결국 성지혜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밤장면을 낮에 촬영하는 ‘데이 포 나이트’가 아니라 여름장면을 초겨울에 찍는 ‘윈터 포 서머’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햇살이 워낙 좋았던 지난해 초겨울 날씨에 무성한 낙엽을 치우거나 심지어 눈을 쓸어내는 스탭들의 고생이 곁들여져 늦여름의 느낌은 스크린 안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얇은 옷을 입어야 했던 배우들의 고생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