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부산의 한국영화 7편 [7] - <후회하지 않아>
2006-10-24
글 : 김도훈
동성애 멜로드라마 속에 숨긴 비판의 칼

이송희일 감독의 일곱 번째 영화 <후회하지 않아>

넌 부자여서 도망할 곳이 있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어. 수민이 재민을 향해 나지막이 내뱉는 순간, <후회하지 않아>의 목소리는 명백해진다. 이송희일 감독이 카프 작가 강경의 <인간 조건>에서 빌려온 이 대사는 <후회하지 않아>가 소년들의 달짝찌근한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작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후회하지 않아>가 관객을 데려가는 곳 역시 종로 구석의 음침한 호스트바. 열여덟 순정의 게이가 아니라 가난한 남창들이 손님들의 몸을 핥으며 삶을 영위하는, 비루한 서울의 구석이다.

수민(이영훈)은 주간에는 공장에서, 야간에는 대리운전기사로 일하며 살아가는 고아다. 수민의 인생이 또 다른 악장으로 접어드는 것은 공장 부사장의 아들 재민(이한)을 만나면서부터다. 수민과 재민은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계급의 차이는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는 회사에 반기를 들고 뛰쳐나간 수민은 먹고살기 위해 서울의 게이 호스트바에 취직하고, 재민은 수민을 찾아 종로의 뒷골목을 헤매고 다닌다.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재민의 성정체성을 알고 있는 부모는 결혼을 종용하고, 가진 것을 놓지 못하는 재민은 현실에 굴복하며 수민을 떠나간다. 이제 분노만을 가슴에 새긴 수민의 비극은 눈 내리는 겨울날의 야산으로 향한다.

<후회하지 않아>는 이송희일 감독이 처음으로 마주한 남자들만의 이야기다. <후회하지 않아>를 기획할 당시만 해도 이송희일 감독은 ‘게이 감독’이라는 호칭에 질력이 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설적인 퀴어영화를 만들기로 한 이유 중 하나는 <슈가힐> <굿로맨스>와 <동백꽃>으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 중에서 “여성의 시선없이 게이 남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풀어낸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남자의 로맨스와 파국에 거침없이 포커스를 맞춘 <후회하지 않아>는 결코 보드랍지 않다. 호스트바 장면들은 동성애자 관객과 이성애자 관객을 각기 다른 이유로 불편하게 만들고, 영화의 형식은 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낡은 호스티스영화 장르를 그대로 따른다. 마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세계처럼, <후회하지 않아>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의 외피 속에 칼을 하나 감추고 있는 듯하다.

이송희일 감독은 <후회하지 않아>가 교훈극이라고 말한다. 다만 교훈의 날은 이성애자 사회가 아니라 동성애자 사회 내부를 향해 서 있다. “계급의식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계급운동은 시작되는 것이다. 동성애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인 상황을 탓하며 자조하지 말고 좀더 투명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는 경직된 태도로 동성애자 관객의 숨은 죄책감을 교화하려들지 않는다. 대신 이 비장한 통속극은 인간의 치유를 이야기한다. 욕망에 충실하라. 소유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하라. 간결하고도 통렬한 메시지는 눈 내리는 야산에서 진행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내 가슴을 먹먹하게 친다. “아니에요! 그 무엇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무엇도 후회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내게 줬던 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상관없어요!” 동명의 곡에서 결연하게 내뱉는 에디트 피아프의 목소리를 음미해보자면, <후회하지 않아>는 스스로의 욕망을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의 영화일 것이다.

출연배우들

이한·이영훈·김정화·이승철·김화영

배우를 찾는 일이 고통의 연속이었음은 영화가 본격적인 궤도에 접어드는 순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저예산은 문제도 아니었다.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시나리오를 받은 대부분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지명도있는 배우들이 말 그대로 경악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연을 결정한 배우들은 탤런트 이한과 감독의 전작 <굿로맨스>에서 유부녀와 사랑에 빠지는 고등학생 역을 맡았던 이영훈이다. 2004년에 MBC 공채 탤런트 31기로 데뷔한 이한은 드라마 <굿세어라 금순아>에서 한혜진의 전 남편으로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고,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굿바이 솔로>를 통해 대중에게 큰 각인을 남긴 신인배우다. 재민의 성정체성을 알고 상처받는 약혼녀 역할은 <그녀를 모르면 간첩> 이후 두 번째로 스크린에 모습을 내보이는 김정화가 맡았다. 애초에 이 역할은 문소리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가족의 탄생>의 촬영 일정과 겹치면서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재민의 부모님을 연기하는 연극배우 이승철과 김화영은 각각 이청아의 아버지와 배두나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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