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부산의 한국영화 7편 [6] - <포도나무를 베어라>
2006-10-24
글 : 김현정 (객원기자)
내면의 두려움을 구원하는 기적의 순간

민병훈 감독의 세번째 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

<벌이 날다>로 데뷔한 민병훈 감독은 모스크바에서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 영화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생가를 찾아 아르메니아로 떠난 적이 있다. 집만 한채 덩그러니 있는 파라자노프의 생가를 보고 아르메니아의 수도로 돌아오던 민병훈 감독은 도중에 트럭을 얻어 탔고, 운전사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하룻밤 숙소를 마련했다. 그날 밤 운전사의 가족이 찾아와 그가 아프다며 민병훈 감독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민병훈 감독을 만난 남자는 아르메니아어와 러시아어를 섞어가며 너에게서 내 모습을 보았다, 고 말했다. “나는 신비주의자는 아니지만 이상한 두려움을 느꼈다. 20, 30년 뒤의 내 모습이 내 앞에 현존해 있다면, 그리고 그가 민병훈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 기이한 경험이 수년이 지나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씨앗이 되었다.

신학생 수현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이미 나아 퇴원한 뒤다. 학교로 오던 길에 옛 여자친구 수아를 만난 수현은 흔들리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학장 신부에게 목자의 길을 그만두겠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학장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라며 자신의 친구가 있는 수도원에 잠시 머물 것을 권한다. 학장의 친구인 문 신부는 까닭 모를 고독에 시달리며 남몰래 술을 마시곤 하는 인물이다. 그 수도원에 거처를 정한 수현은 수아와 똑 닮은 견습수녀 헬레나를 만나 갈등하고, 헬레나 또한 수현이 낯설지가 않다.

속세의 인연에 흔들리는 신학생이라는, 멜로로 느껴지기 쉬운 스토리를 가진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언뜻 보기에 민병훈 감독의 경험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2004년 부산프로모션플랜(PPP)에 제출되었던 시나리오의 원형에서 수현과 문 신부는 서로 겹치는, 한 사람의 삶을 같은 순간에 나누어 사는 두 사람이었고, 문 신부 또한 마음에서 차마 쳐내지 못한 여인을 두고 있었다. “문 신부의 이야기까지 담기가 부담이 되었는데, 그것을 없앤 지금이 오히려 명쾌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태여 그를 설명하려 드는 것보다는.” 오랜 집필 과정을 거치며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이처럼 수현에게 포커스를 맞춘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는 또렷한 상으로 맺히기보다 조금씩 포개어지는 인물들의 잔영이 어른거리는 다중의 상으로 떠오르곤 한다.

그러므로 수현의 내면에 다가가기 위해선 집중이 필요하다. “카메라 삼각대의 나사를 풀고 약간 흔들리도록 인물을 찍었다. 처음 해본 건데 그렇게 하면 관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물에 집중하게 되는 것같다.” 그의 전작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는 자그마한 사람이 풍경처럼 존재하는 산수화 같았지만,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불쑥 커다래진 인물에게 다가가 내면의 두려움을 잡아낸다. 그러나 돌투성이 땅에서 달콤한 우물물이 솟아오르는 기적의 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죽어가던 소녀가 생긋 웃음 짓고, 멈추어 선 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린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그런 초현실적인 순간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괜찮다고 했다. 대사에도 나오듯 ‘깃털처럼 가볍게’ 가면 되는 거라고. 영화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랐지만, 어느 순간 멈추기보다 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영화를 찍었다는 민병훈 감독의 다음 영화는 장미 향기 가득한, 세상을 기쁘게 하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한다.

영화 속의 공간들

거기 그대로 존재하는 신학교와 수도원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중앙아시아의 먼지와 흙이 묻어날 것같던 민병훈 감독의 전작들과 다르게 좁은 공간에서 찍은 장면이 많은 영화다. 그중에서도 신학교와 수도원은 한국영화가 담아 본적이 거의 없는 공간이어서 눈길이 간다. 수현과 친구들이 생활하는 신학교는 광주 가톨릭 대학이다. 지방 촬영분이 늘어나면 제작비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민병훈 감독은 “영화란 그처럼 힘들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며 촬영을 강행했다. 수현이 고난과 구원을 동시에 얻는 수도원은 남양주에 있는 성 요셉 수도원이다. 1년 반동안 수도원장을 쫓아다니며 어렵게 허가를 얻어낸 이 수도원은 민병훈 감독 자신이 어머니와 함께 위안을 찾았던 곳이다. “풍경이 기가 막힌 수도원은 많았지만 그것은 그저 풍경으로 존재할 뿐이다. 나는 인물을 죽여버리는 풍경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도원을 원했다”. 한가지 트릭이 있다면, 수현이 헤매다니는 수도원의 겨울 과수원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배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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