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지하철 안에서 졸고 있던 당신은 아마 정차역을 알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졸음을 쫓아냈을 것이다. 퇴근 뒤에는 집에 돌아와 <무한지대 큐!>를 보며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주말에 찾을 맛집을 알아보기도 했을 것이고, 밤에는 <비타민>의 그녀 덕에 몸의 이상여부를 각성했을지도 모른다. 성우 강희선의 목소리는 이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시청자의 궁금증을 대신 풀어주는 그녀의 목소리는 낭랑하면서도 또렷하고, 빠르면서도 정확하다.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쉴새없이 뿜어대는 내레이션이 힘에 부친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멘트도 많지만, 잡아죽일 듯이 질러대잖아요. (웃음)” 1년에 한번씩 새로 녹음하는 지하철 안내방송도 힘들긴 마찬가지. “같은 음으로 노래를 부르듯” 일정한 톤을 계속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매일 저녁 에너지 가득한 목소리로 시청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고객이 원하니까 해야죠. (웃음)”
매일같이 사람들의 귀로 찾아드는 목소리지만, 그녀가 바로 샤론 스톤의 섹시한 아우라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 CF에서 샤론 스톤의 대역배우에게 목소리를 빌려준 뒤로 강희선에겐 샤론 스톤 전담성우라는 별칭이 주어졌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샤론 스톤에게 쌓인 감정이 많다. “샤론 스톤이 절 망가뜨린 게 있어요. 그가 내뱉는 대사는 모두 ‘침대대사’예요. 사무실이든 건물 밖에서든 항상 눈빛으로 ‘너 지금 날 어쩌고 싶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요. 더빙 전에 시사하면서 욕도 많이 했어요. (웃음)”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배우는 미셸 파이퍼다. 모든 캐릭터를 그때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연기하는 배우라서 그렇단다. “<배트맨2>의 미셸 파이퍼는 영화에서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에서 사랑스러운 여자, 그리고 캣우먼의 강한 이미지까지 4, 5번을 변신해요. 지금까지 목소리를 연기하면서 가장 큰 대리만족을 느끼해준 배우였어요.”
지금의 배우의 몸을 빌려 연기를 하지만, 사실 강희선도 한때는 배우를 꿈꾸던 소녀였다. 서울예대에서 연극을 전공하며 여주인공을 도맡아 연기하던 그녀를 성우의 길로 이끈 것은 당시 그녀의 지도교수였다. 고등학교 시절, 방송반 생활을 하면서 직접 민방위 훈련경보 방송을 했던 전력을 가진 그녀였으니, 강희선 목소리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3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성우 시험에 합격한 강희선은 지금까지 27년 동안 매체를 넘나들며 목소리를 빛내고 있다. “사실 지금도 배우에 대한 욕심은 있어요. 하지만 아직은 내 목소리를 찾는 곳이 많아서 시도해볼 엄두가 나질 않아요.” 그녀가 탐내는 배역은 독특한 성격을 가진 악역. 단, 아줌마 역할은 절대 사양이란다. “선한 것보다는 악역에 더 많은 매력을 느껴요. 도전적인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목소리 연기를 할 때도 심청이 같은 배역만 들어오고, 뺑덕어멈 같은 역할은 거의 안 들어와요. (웃음)”
마음에 드는 배역과 만나는 것 외에도 성우 강희선에게 또 다른 즐거움은 휴먼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하는 것이다. 여러 불우이웃돕기 프로그램의 내레이션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는 KBS <카네이션 기행>에서 감성을 자극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청자에게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사람냄새가 좋아요. 나는 기본적으로 사디스트에 가까운 사람이라서 녹음하는 날 외에 나머지 일주일은 거의 죽어지내는 편이에요. 그런데도 휴먼다큐멘터리를 녹음할 때면 내가 행복한 사람이란 걸 자주 느끼게 돼요.” 힘든 일도, 아쉬운 것도 많은 직업이지만 그래도 강희선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목소리이길 원한다. “힘들어도 밝은 척하면서 열심히 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어요. 언제까지 날 찾아줄까 싶어서 열심히 하는 거죠.” 하지만 지하철과 TV가 그녀를 버린다면 스크린 속에서 배우 강희선을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중년의 악역. 욕심 가질 영화감독은 충분히 많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