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짱구는 못말려>의 유치원 원장, <곰돌이 푸>의 티거 목소리 설영범
2007-01-23
글 : 강병진
사진 : 이혜정
섬세함과 터프함의 야누스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의 유치원 원장님은 노처녀 선생님들 사이에서 외롭게 떠 있는 섬이다. 험상궂은 얼굴 때문에 뜻하지 않게 화를 내는 것으로 오해받고 아이들에게는 두목님으로 불린다. 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큰 사람이다. 타고난 섬세함과 본의 아닌 터프함을 지닌 원장의 성격은 목소리를 덧입힌 성우 설영범의 연기 덕에 더욱 구체화된다. <곰돌이 푸>의 감성적인 호랑이 티거와 <이상한 나라의 폴>에서 버섯돌이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대마왕 목소리기 모두 설영범의 것이라면 원장님의 야누스적인 목소리 역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유치원 원장은 여자분들이잖아요? 아이들을 엄마처럼 따뜻하게 감싸주는 이미지를 갖고 있고요. 짱구의 원장님은 거칠게 생긴 남자지만, 그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에요. 남들이 듣기엔 내 목소리에도 그런 모습이 있었나봐요. (웃음)”

베테랑이란 말을 붙이기에도 부족한 경력 30년의 성우지만, 설영범은 원래 신춘문예에 도전하던 작가지망생이었다. 전라남도 부근의 한 섬에서 만화책을 독파하는 소년이었던 그는 서울로 올라와 CBS와 극동방송에서 어린이 프로그램 극본을 쓰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열정으로 똘똘 뭉친 젊은 작가지망생에게도 생활의 어려움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KBS에 계시는 아버지 친구분이 성우 시험이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운좋게 한번에 붙기는 했는데, 아마 필기를 잘 쳐서 붙었을 거예요. 목소리는 잘 묻어간 것 같고…. (웃음)” 하지만 그의 타고난 목소리의 혈통은 이미 남다른 것이었다. 함께 이야기할 때면 가슴이 울릴 정도로 힘이 있었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물려받았는데, 체력은 못 따라가겠어요. 녹음 전에는 항상 다운되어 있다가 녹음할 때만 기력을 찾는 편이에요. 그런데도 옛날에는 매일 술마시고는 목소리 기름지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웃음)”

독실한 크리스천인 설영범은 지난 88년 술과 담배 등 “생활에 아무 필요없는 것들”을 모두 끊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알코올과 니코틴이 섞이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종종 경건한 분위기로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곤 한다. 지난 연말 방영된 <십계>에서는 모세 역을 맡아 제자들에게 십계명을 하사했고, SBS 다큐멘터리 <물은 생명이다>에서는 금요일마다 물과 환경의 중요성을 설득하고 있다. 그의 목소리에 경건함이 자라기 시작한 것은 제레미 아이언스와 처음으로 입을 맞춘 <미션>의 가브리엘 신부가 시초였다. “주변에서 보기에 제 삶에서 그런 종교적인 모습이 드러났던 것 같아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제레미 아이언스의 목소리를 전담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도 많이 하게 됐죠. (웃음)”

명랑발랄한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생기를 돋울 때도 설영범은 항상 웃음 이외의 것들을 전하려 애쓴다. 그에게 영화와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은 모두 사람 중심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 일치하는 매체들이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 수 있을까를 이야기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주로 보는 애니메이션은 특히나 따뜻한 기운을 전하는 마음으로 녹음해야 해요. 멀리 있어도 마음은 통한다고 하잖아요.” 다른 한편으로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통해 얻는 것도 있다. 특히 <곰돌이 푸>의 티거와 <아이스 에이지>의 매머드 맨프레드는 그 자신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캐릭터들. “티거는 한명쯤 곁에 있었으면 하는 친구예요. 시샘도 하지만 결국에는 주변 친구들을 배려하는 캐릭터죠. <아이스 에이지>의 맨프레드는 아버지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어요.” 아이들을 생각하는 설영범의 마음은 현재 그가 가진 꿈에도 배어 있다. “지구의 한 소년이 우주 너머의 어느 존재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지를 깨닫는 내용의 라디오 드라마”를 만드는 것. 글로도 쓰고 싶지만, 사랑하는 아내 때문에 망설이고 있단다. “글에 대한 욕심은 언제나 갖고 있는데, 아내가 쓰지 말라고 해요. 자신이 성실한 독자가 되어준다고, 자기를 위해서만 쓰라고 하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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