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일어나 냉장고 소리에 귀기울여보겠어요. 추운 겨울 아침, 밤새 돌았던 보일러를 느껴보겠어요. 이들이 눈물겨운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기 때문.” 이게 대체 무슨 소리? 낭랑하고 사랑스러운, 꿈결 같은 목소리가 뚱딴지같은 문장을 읊조린다. 박찬욱 감독의 ‘소꿉놀이’ 소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전편에 잔잔히 흐르던 정체불명, 신원 미상의 수상한 목소리다. 영화 속 라디오의 정체만큼이나 궁금증을 자아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우 주유랑. “…슬픔에 잠기는 것, 죄책감, 망설임, 쓸데없는 공상, 설렘, 감사하는 마음. 이상, 순서는 나쁜 순서대로였어요” 같은 대사를 시 낭송처럼 속삭이며 영군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장본인이다.
그가 연기한 아나운서 목소리는 처음부터 영화에 나온 것처럼 맑고 예쁜 느낌으로 의도된 건 아니었다. 영군에게 불가해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할인 만큼 원래 설정은 준엄하고 카리스마적인 지배자에 가까웠다. 오디션에 참가해 연출부의 지시대로 연기를 끝낸 주유랑은 문을 나서기 전 “저, 그런데 이런 느낌은 어떨까요” 하고 맑은 소프라노로 같은 대사를 읊어 보였다. 상냥한 목소리와 불가해한 대사의 묘한 어긋남이 감독의 마음에도 들었던지 결국 주유랑 버전의 몽환적인 아나운서가 관객을 만나게 됐다. 그가 아나운서 역에서 받은 느낌은 지배자라기보다는 “영군의 마음속 친구, 또는 제2의 영군”이었다. 연기를 하면서 가장 공을 들인 건 진짜 아나운서 같은 정확한 발음이었지만, 단순히 아나운서와 비슷해 보이려고 애쓰기만 했다면 지금처럼 애착이 가진 않았을 것이다. “제가 정말 감독님께 감사드리는 건, 어디에도 없던 이런 아나운서를 마음껏 연기할 수 있는 행운을 주셨다는 거예요.” 몇몇 대사는 목소리와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 즉석에서 수정되기도 했다. “왜 그는 하얀 맨들을 제껴버리고 틀니를 전해주러 오지 않는가”라는 대사는 원래 ‘하얀 맨들을 죽이고…’였다. 무시무시한 말도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그를 보며 방음벽 너머 스탭들도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1994년 KBS 공채 성우로 목소리 연기를 시작했지만, 그는 동국대 연극영화과에서 연극연기를 전공한 배우 출신이다. 극단 ‘수레무대’에서 활동하며 체호프 페스티벌, 거창국제연극제 무대에 섰고, 2000년 주연을 맡은 <카르멘> 공연 때는 첫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몸이었지만 무대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출연을 결정했다. 그러던 중 대학 동기에게서 “성우 공채 시험이 있는데 한번 같이 볼래”라는 연락을 받았고, 우연히 친 시험에서 생각지도 못한 합격 소식이 날아왔다. 조금은 특이한 이름 때문인지, 큰 키에 늘씬한 몸매가 주는 첫인상 때문인지, 그에게 맡겨진 역은 주로 중국 무협영화의 여자 무사들이나 007 시리즈의 본드걸이었다. 여러 외화와 애니메이션을 거치며 성우 연기의 묘미에 빠져들었지만, 온몸으로 캐릭터와 일체가 될 수 있는 배우의 꿈 역시 계속 간직하고 있다. “떨어지긴 했지만 사실 <싸이보그…>의 요들송 소녀 은영 역의 오디션을 봤어요. 그 인연으로 결국 아나운서 역을 맡게 됐지만, 내가 성우로서 목소리만 빌려주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나운서 역도 다른 인물들과 똑같이 배우라고 생각했고, 대본을 받고 이게 어떤 그림으로 표현될지 상상해가며 연기하는 과정이 매우 즐거웠어요.” 그동안 완성된 영화를 받아 목소리를 입혀온 그에게, <싸이보그지만…>은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듯한 경이로운 체험이었다고.
성우로서든 배우로서든 그가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은 그간의 낭랑한 목소리와 달리 분위기있는 ‘스모키’한 인물. 카르멘처럼 에너지 넘치는 인물도, 이중인격자처럼 다양한 면모를 표현할 수 있는 역할도 동경한다. 주어진 역할에 자신만의 변형을 첨가하길 좋아하는 그는 관습적으로 재현되곤 하는 여성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어떻게 의외의 매력을 표현할 수 있을지 상상하곤 한다. <싸이보그지만…>을 통해 연기에의 열정을 다시 한번 확인한 주유랑의 앞으로의 목표는 우선 연극을 1년에 한편 이상 하면서 꾸준한 배우가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