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싸이언 등 휴대폰, 대한한공 CF 목소리 리처드 김
2007-01-23
글 : 최하나
사진 : 이혜정
아 유 젠틀?

“Feels Good, Cion”, “Outback Steakhouse”, “Are you Gentle?”, “Excellence in Flight”. 메들리를 하듯 익숙한 음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휴대폰, 레스토랑, 자동차, 항공사…. 두서없이 모아놓은 듯한 광고들. 하지만 그 말미에 마침표를 찍듯 카피를 내뱉는 목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다. 리처드 김. 재미동포 2세로 광고 속 미끈한 영어 발음의 주인공인 그는 늘 자신의 휴대폰에 30여곡의 광고음악을 저장하고 다닌다. 이는 가수가 데모 테이프를 챙기듯 언제 어디서나 ‘공연’을 선보이기 위한 준비. 하루에 몇번은 무심코 지나쳤을 문구들이 그의 음성을 타고 라이브로 전해지는 순간, 리드미컬한 한줄의 카피가 마법처럼 귓가를 사로잡는다. “광고를 보며 중년의 외국인을 상상했는데, 제가 성우라는 걸 알고 ‘깬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웃음)” 리처드 김이 한국에서 성우로 일한 기간은 불과 2년.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입혀진 광고는 무려 400편에 달한다. “출연한 광고가 워낙 많다보니 친구들이 가끔씩 농담처럼 얘기해요. TV만 켜면 네가 나를 스토킹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웃음)”

하지만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3년 반 전 한국 땅을 밟았을 때, 리처드 김은 데뷔를 앞둔 예비 영화감독이었다. 미국 USC에서 영화학 석사과정을 밟은 그는 자신의 단편을 눈여겨본 한 국내 제작사로부터 연출 제의를 받았고, 데뷔의 꿈에 부풀어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일은 예상대로 풀리지 않았다. 자금문제로 제작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그는 한순간에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됐고, 영어 과외를 하며 간신히 생계를 이었다. EBS 라디오방송, 아리랑TV의 영화 프로그램 등으로 일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오던 리처드 김이 성우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 때문.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광고의 영어 성우는 외국인 두세 사람이 전부였어요. 그중 한분이 ‘하이네켄’ 광고 일정에 펑크를 냈고, 제가 얼결에 대역을 하게 됐죠. (웃음)”

결과는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젊고 신선한 목소리에 갈증을 느껴왔던 광고주들은 앞다투어 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일감은 순식간에 늘어났다. 특히 MP3나 휴대폰처럼 젊은이들을 타깃으로 한 광고들은 리처드 김의 전매특허가 됐다. “제가 대단해서가 아니에요. (웃음) 마케팅 컨셉이 바뀌면서 묵직하게 깔아주는 목소리보다는 경쾌하고 친근한 목소리가 주목받았던 것 같아요.” 운이 좋았다지만, 기회를 붙잡는 데 리처드 김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큰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학생 시절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했던 연기 수업, 자연다큐멘터리 내레이터 역할을 했던 경험 등이 모두 현재의 자양분이 됐다. “‘호랑이가 지금 사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류의 멘트를 녹음했었는데, 그게 지금 이렇게 이어졌네요. (웃음) 사실 광고 성우는 생각보다 훨씬 책임감이 큰 직업이에요. 나의 말 한마디로 광고 전체의 분위기, 브랜드 이미지가 결정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또 이 일의 매력인 것 같아요.”

광고 외에도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 더빙을 하고, 아리랑TV MC로 출연하는 등 리처드 김은 휴일에도 쉴 틈이 없다. “버터 냄새나는 한국어”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광고 PT용 대니얼 헤니 대역을 맡는 등 그의 활동 범위는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 이상이다. 하지만 리처드 김의 마음속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꿈은 역시, 영화다. “성우로 일하면서 제가 학비로 짊어졌던 빚을 전부 청산했어요. 정말 꿈같은 일이죠.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하려고요.” 임권택 감독의 작품만 스무편 이상 보았을 정도로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도 남다른 그는 이제 성우라는 직업이 선사한 날개를 달고,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시나리오만 3편 있어요. 영화가 크랭크인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성우는 포기해야겠죠? (웃음)” 유혹하듯 부드럽게 “SKY~”를 읊조렸던 그 남자, 리처드 김. 머지않아 목소리가 아닌 한편의 영화로, 그를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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