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천생 배우의 모놀로그
2007-05-24
글 : 강병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전설의 고향>의 양금석

1막.

캄캄한 무대에 핀 조명이 켜지면 배우 양금석, 무대 위에 홀로 앉아 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면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얼굴이 드러난다. 천천히 객석의 관객을 바라보다가 한곳에 시선이 멈춘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관객과 눈을 맞추고 싶지 않다는 표정. 잠시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객석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이미 나는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어. 까칠하고 기센 여자로만 알고 있겠지. 나도 별 수 없다는 거 알아. 툭하면 쏘아보고, 욕하고, 머리채 붙잡고 싸우기나 했으니까. 갖고 있는 상처가 너무나 커서 더 다치지 않으려고 자기가 먼저 남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여자였지. 당신들은 그런 이미지가 싫지 않냐고 묻고 싶은 거 아냐? 아니, 싫은 거 없어. 아무렴 어때? 이건 일이잖아. 항상 뽀사시하게만 나와서 남자 품에서 눈물만 짜려는 애들은 촌스러워. 배우라면 다 해야 하는 거 아냐? 하나만 하려고 하면 그건 배우가 아니고 모델이지. 그런 여자들만 연기해야 한다는 것에서 특별한 감정도 없어. 다시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이거든. 어떤 배우들은 다음 생애에도 배우로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것도 없어. 지금 생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배우라서 하는 거야. 배우로 사는 것에 대한 의미 어쩌고 할 거면 그냥 나가. 사실 나는 이런 자리가 귀찮기만 하다고. 사람이라는 게 어디 생각이 쉽게 바뀌겠어? 이미 옛날에 다 이야기했던 걸 또 하라고 하면 짜증나는 게 맞는 이치잖아?

영화는 보고 왔는지 모르겠네. 아마 봤으면 저 여자 또 저런 역할만 한다고 했겠지. 그래, <전설의 고향>에서 맡은 배역도 기센 여자야. 온갖 히스테리로 가득한 엄마지. 젊은 감독들이 용기가 없는 것 같아. 나한테 또 그런 여자를 맡기는 건 너무 안일한 생각 아냐? 사실 그런 이상한 여자만 연기해야 하는 게 피곤할 때도 있어. 만날 눈에 힘주고, 소리 지르는 게 당신들 같으면 좋겠냐고. 심지어 어떤 작가들은 아예 배역 이름에 내 이름을 갖다 붙이더라. <행복을 찾아 드립니다>란 드라마, 봤는지 모르겠네. 거기서 맡은 여자 이름은 서금석이었어. 또 얼마 전 <연인>에서는 정양금이었지. 기분 나빠 죽겠어 정말. 왜 하나같이 이상한 여자들만 시키면서 이름까지 같다 붙이는 거야. 하긴 좀 센 이름이긴 하지. 할아버지가 오래 살라고 지어준 건데, 남자 이름 같잖아. 그러고보면 인생까지 이름을 따라가나봐. 연극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여자들을 연기했거든. 당신들은 내 첫 모습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하긴 뭐든 상관없어. 당신들이 누구를 좋아하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야. 연기하면 할수록 매력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여자지. 그래 맞아, 나랑 닮은 점도 있어. 자신의 세계에 갇혀서 자신의 기준에서만 사는 여자거든.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남들의 말 한마디에 쓰러지기도 하는 사람이지. TV에 와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어. 당신들이 가장 쉽게 떠올리는 작품은 드라마 <결혼>일 거야. 처음 보는 여자가 소매도 없는 슬립만 입고 나와서 담배 물고 있는 게 희한하게 보였겠지. 그때는 나도 욕심이 많았어. 스스로 설정을 많이 했지. 당신들 같으면 유부남이랑 자고 있다가 그 남자 아내가 들이닥쳤을 때 어떻게 하겠어? 감독은 침대에서 일어나라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그게 싫었어. 이 여자가 꿀릴 게 뭐 있어? 그게 잠까지 설칠 일이야? 나는 그냥 자고 있어야 한다고 봤어. 그런 모습이 눈에 띄긴 띄었나봐. 그 이후로 줄곧 이상한 여자만 연기했으니까.

하지만 사실 내가 그런 여자로만 살았던 건 아니야. 당신들이 그런 여자만 기억하고 싶은 거지. 어차피 눈에 띄는 것만 받아들이는 게 당신들 특징이잖아. <여인천하>에서는 헌신적인 어머니도 연기했다고. <하늘바라기>란 일일드라마는 아나? 거기서는 지고지순한 며느리였어. 또 <행복을 만들어 드립니다>에서는 푼수기 다분한 새댁이기도 했지. 뭐 강한 역이든 순한 역이든 어려운 건 없어. 어차피 그 두 여자 모두 나한테 있는 거니까. 분명한 건 내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속은 매우 여린 여자라고. 소라 같다고 할까? 또 당신들은 내 주위에 남자들도 많은 줄 알지? 그게 내 비극이야. 버려놓은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을 안 해. 젊은 남자애들이 팬까페도 만들고 가끔씩 편지도 보내곤 하지만, 그럼 뭐하냐고. 다 그림의 떡인걸. 어떤 때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좋기도 해.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내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거든.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 이런 것도 없어. 그런 걸 남기기 위해서 뭘 하는 것도 싫어해. 이런 이야기 자꾸 하면 하기 위한 말처럼 느낄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무대에 오르고 싶은 욕심은 있어도 그걸 가지고 존재감을 높이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 당신들도 극장을 나가는 순간 지금 본 내 모습은 잊어버려. 더 듣고 싶은 게 있나? 난 더이상 해줄 이야기가 없는데? 그냥 한마디만 하고 일어설게. 당신들도 지금이 최선의 순간이고,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그러면 다음 생애에 대한 미련도 없어질 거야. 그럼 밖에 비도 오는데 조심히들 들어가. 사인이라도 해달라고? 사인은 무슨… 그게 뭔 의미가 있다고. 그만 보채고 안녕하자. 잘들 가.

관련 영화

관련 인물